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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171화 (171/857)

171화 베니앙 아르젠토 (3)

겁화劫火.

세상의 종말에 일어나는 대화재. 그 파멸의 불꽃을 다루는 게 아그니의 권능이었으나, 따지고 보면 실키드는 그에게 있어 썩 마음에 드는 장소는 아니었다.

이 황량한 사막엔 태울 것이 없다. 건축물들은 모두 돌이나 모래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무가 귀한 지역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아그니의 권능이 약해진 건 아니다. 그의 불길은 태울 것이 없어도 타오른다.

탓.

대지를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스노우다. 아그니는 그녀의 자세에 주목했다. 리키가 떠오른다.

동시에 느껴진 건 짙은 불쾌함이다. 위협적이라서, 혹은 리키가 생각나서 그런 게 아니다. 어설프게 리키를 흉내 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스스로 놀란다.

아직도 그를 동족이라 여기고 있는 건가?

콰앙!

아그니가 휘두른 왼손이 스노우에게 꽂혔다. 스노우가 급히 칼을 들어 아그니의 팔을 막았으나 훌륭한 방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중압감을 채 이기지 못하고 튀어오를 때 이상의 속도로 낙하한다.

콰앙!

스노우의 몸이 감시탑에 처박혔다. 그런 다음에도 멈추지 않고 바닥을 굴렀다. 수십 바퀴 정도 구른 이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그니의 공격 하나하나가 막대한 화기를 품고 있다는 증거다.

‘괴물 같은 놈.’

스노우가 이를 갈았다. 아이스 엘프인 그녀에게 있어 아그니의 겁화는 특히나 더 끔찍한 힘이었다. 칼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화끈거리는 고통을 억지로 무시하며 아그니를 노려보았다.

[형편없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너는 리키의 검술을 쓸 자격이 없다.]

화염의 육체를 가진 존재라고 생각지 못할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스노우는 그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네가 바로 리키의 진짜 어포슬이겠지. 그가 죽었으니 너는 잔여 신력을 좀 더 잘 다룰 수 있게 됐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네 검술을 보아라. 그게 내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건.”

[네 그릇이 리키의 신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거다.]

스노우는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절감하고 있었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가장 도움이 되지 않는 건 그녀일지도 몰랐다. 그건 일찍이 스노우가 느껴 본 적이 없던 무력감이었다. 스노우는 아그니에 대한 분노보다도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게 더 힘들었다.

아그니가 손을 뻗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베니앙보다 먼저 스노우를 죽이고 싶어졌다.

노라가 움직인 건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몸엔 붉은 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그니의 불길 때문은 아니었다.

무왕권 비기. 염혼炎魂.

노라는 한밤중에 떨어지는 유성처럼 긴 족적을 남기며 움직였다. 가볍게 대지를 박차자, 쏜살처럼 순식간에 아그니의 안면까지 도약할 수 있었다.

[……!]

아그니도 이 순간만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법을 쓴 것도 아니고 단순히 육체 능력만으로 이 높이까지 도약할 줄은 몰랐다. 이반보다 두 배는 더 높은 곳까지 뛰어오른 것이다.

그러나 당황하는 것도 잠시. 아그니의 입이 쩍 벌어지고 그곳에서 새파란 불길이 토해졌다.

노라는 헐겁게 묶어져 있던 붕대를 마저 풀더니 풍차처럼 세차게 돌렸다. 아그니의 불꽃이 붕대에 빨려 들어갔다.

‘평범한 붕대가 아니군.’

비록 급하게 쓴 것이라고 해도 자신의 겁화를 두르다니. 아그니는 불을 뿜는 걸 멈추고 팔을 휘둘렀다. 그 거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가공할 속도다. 아그니가 가진 육체가 염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움직임이었지만, 지금의 노라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노라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한 번 더 다리를 박찼다. 그리고 아그니의 턱에 주먹을 꽂았다.

콰직!

아그니가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렸다. 언뜻 보기엔 아그니의 얼굴이 완전히 날아간 걸로 보였지만 노라는 방심하지 않았다. 앞서 치러진 이반의 교전을 보았다. 이 정도 상처는 그에게 치명상이 아니고, 큰 위협도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본질에 닿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노라의 주먹이 연속해서 들어갔다. 공격이 적중할 때마다 아그니의 거체가 강풍을 맞은 불길처럼 세차게 일렁였다.

덕분에 밑에 있던 소수의 생존자들은 노라의 공세를 희망찬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 아그니가 출현한 이후, 처음으로 그가 맥을 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연격을 이어가는 노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걸 지우려는 듯 더욱 격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아그니는 반격하지 않았다. 마치 공격이라는 기능이 상실된 것처럼 노라의 주먹을 모두 허용하며 몸을 흔들 뿐이었다.

한동안 그런 상황이 이어지자 처음엔 노라가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생존자들의 표정도 점점 굳어졌다.

‘유효타가 없는 건 아니야.’

노라는 그리 생각했다. 아그니는 반격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노라의 공세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본질엔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 공격은 기껏해야 견제의 의미밖에 주지 못한다. 아그니를 끝장내기엔 한참이나 부족하다.

‘염혼을 전개해도 아그니의 본질엔 닿을 수 없단 말인가?’

노라가 절망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일렁이던 불꽃이 갑자기 훅 사그라들었다.

아그니의 몸이 증발이라도 한 듯이 사라졌다.

“어?”

몇 남지 않은 생존자 중 하나인 대족장, 투아리크는 그 광경을 보고 눈을 한차례 비볐다.

“뭐, 뭐야?”

“끝난 건가?”

전사들이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변을 붉게 물들인 열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늘한 바람마저 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방심하지 마요!”

노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인 순간이었다.

콰앙!

허공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가까이에 있던 전사 하나의 몸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건물에 처박힌 전사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무, 무슨!”

“방금 뭐가 일어난 거지?”

전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폭발은 연이어 일어났다.

콰앙! 콰앙! 콰앙!

노라는 그 폭발이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발자국처럼 보였다. 생존자들을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희생자들은 단순히 폭발 범위 근처에 있었던 불운한 자들일 뿐이었다.

저 폭발은 어딘가로 향해 착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경로의 끝에 있는 존재를 보는 순간 노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베니앙 아르젠토!”

“…….”

베니앙 또한 폭발이 자신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건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 수준으로는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베니앙이 쓸 수 있는 수단은 하나밖에 없다.

용언. 다시 한 번 그 힘을 사용하려던 순간.

“꺅!”

이반이 그녀를 안고 폭발범위에서 벗어났다.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까는 신세 졌다. 네가 아니었다면 난 죽었겠지.”

“아, 아아. 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이반은 베니앙을 집요하게 쫓아오는 폭발을 향해 곁눈질하며 다리를 움직였다. 폭발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게다가 이사카와 닉스가 그 진격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따라잡지 못한다는 걸 느꼈을까.

폭발이 멈추더니 그곳에 화염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쿠오오-

폭풍과 함께 아그니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끔찍한 열기가 다시 한 번 재현되었다. 그의 온전한 모습을 보고 모든 이들이 절망을 느꼈다.

‘스승님의 연격을 맞고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건가?’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가장 강한 공격력을 가진 게 노라였다. 그 노라가 사용한 비장의 수단으로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다니.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다.

멍청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쓸 수밖에 없다.

이반이 굳은 얼굴로 베니앙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놈은 너를 노리는 것 같군.”

“네. 그럴 거예요.”

베니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는 항상 말했다. 자신의 용언이 데미갓 토벌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그 말을 의심한 건 아니지만, 정말로 용언으로 그 정도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 자신의 용언은 아그니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었다. 무려 3초씩이나.

“한 번 더 놈을 멈춰 줄 수 있겠나?”

“네?”

“내가 놈에게 한 방 먹이겠다.”

이반이 주먹을 쥐며 말했다.

베니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요.”

“좋아.”

스으으-

이반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노라를 비롯한 스노우, 이사카, 닉스.

그리고 대족장 투아리크와 광전사 구아루스, 쌍칼의 우르하가 이반 앞에 섰다. 그들도 아그니가 노리는 게 베니앙이란 사실을 이해했다. 지금 이 순간도 아그니는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찮군.]

아그니는 솔직함을 담아 중얼거렸다. 적당히 봐주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충분한 힘을 사용하며 이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는다. 생각보다 이들의 저력이 만만치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아그니의 시선이 닉스에게 향했다. 역시 가장 큰 걸림돌은 저 여자다. 어포슬인 그녀만 아니었어도 썬 하트를 사용해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글거리던 필멸자들이 제법 줄어들었다. 떨거지들은 대충 정리된 것 같으니, 이 모습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아그니는 원래 자신의 본모습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리키와의 일전에서 그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과 레이린, 아난타, 노즈독을 압도했다.

그 작고 초라한 모습에도 나름대로의 강점이 있다. 특히 지금처럼 힘을 조절해서 행사해야 될 때는.

화륵.

불길이 그의 몸을 한 번 감쌌다. 아그니의 크기가 점차적으로 줄어들더니, 인간과 흡사한 크기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의 화신처럼 전신이 타오르고 있는 모습이다.

크기는 작아졌다. 압도적인 위용이 줄어들고, 피부를 태우던 열기도 훨씬 옅어졌지만 좌중에 있는 자들 중 긴장을 푸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아그니가 손을 휘저었다. 바닥을 뚫고 불이 치솟았다. 여태까지 보았던 불기둥이 아니었다. 그건 뱀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화염으로 만든 혀를 날름거리며 그대로 닉스를 낚아챘다.

“큭!”

닉스가 몸을 비틀었으나, 이 화염의 뱀이 가진 치악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그니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억지로 벗어나려고 하면 몸뚱이가 두 동강 날 거다. 아무리 불사조라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겠지.]

“내가 죽으면 당신도…….”

[죽이는 게 아니다. 흡수하는 거지. 모르겠나? 지금 너는 이미 내 수중에 들어왔다는 것을.]

닉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그니가 그 모습을 즐기듯 말을 이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 한 번 도박을 감행하는 것도 괜찮을 거야. 나로선 어떤 결과도 환영이니까.]

아그니의 평탄한 어조엔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닉스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하려는 발버둥이 오히려 개죽음을 앞당길 수도 있는 것이다.

‘과연. 이게 힘을 집중한다는 건가.’

아그니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모습일 때보다 세세한 힘의 조정은 더 편해진 느낌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들을 압도했던 리키의 저력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노라와 스노우가 아그니와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둘 모두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건 아그니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콰앙!

아그니의 몸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노라는 바닥에 처박힌 채 피를 흘렸다. 이마가 깨진 건가?

염혼의 지속시간은 끝났다. 이 상태로 아그니에게 타격을 주는 건 힘들다. 그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도 시간을 끄는 건 할 수 있다. 스노우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노라보다 훨씬 필사적이었다.

‘…내가 리키의 신력을 제대로 쓸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저 화염의 육체도 베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분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스노우는 신력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검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부심도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이 정도까지 무력할 줄은 몰랐다. 아예 전력에 보탬이 되지 않을 수준이 아닌가. 짐짝으로 치부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칼에 신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그니에게 달려갔다. 아그니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권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신력을 칼에 감은 것뿐이다. 사용방법이 한참 잘못되었다.

다시 한 번 폭발이 일어났다. 스노우가 온몸에서 피를 흩뿌리며 튕겨나갔다.

[한심하군.]

아그니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스노우를 내려다보았다. 싸울수록 점점 불쾌함의 농도가 짙어져간다. 이 여자는 당장 태워 죽여야 된다.

그리 결심한 순간 거대한 힘의 기류를 느꼈다. 아그니는 힘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이반이다. 그의 몸에서 응축된 마나가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활화산처럼 거칠고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아그니의 표정엔 큰 위기감이 없었다.

쿠오오-

이반은 맥동하는 마나를 주먹으로 끌어 모았다.

무왕권의 비기는 전승되는 게 아니다.

모든 계승자가 각각의 비기를 만들어내니까. 그리고 그 순간은, 전대 계승자의 비기를 본 이후가 된다.

이반은 오늘 처음 노라의 비기를 보았지만, 자신의 비기에 대해선 예전부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라의 비기인 염혼. 화火의 속성을 가진 마나를 전신에 둘러 신체능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킨다. 굉장한 기술이었지만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걸 한눈에 깨달았다.

‘한 방이 좋아.’

그리 중얼거렸다.

그에게 있어 비기란, 오의란 필살기必殺技를 의미했다. 완성도적인 측면에서 노라의 비기는 갈채를 받아야 마땅한 결과물이었지만 이반의 적성과는 맞지 않는다.

꾸우욱.

전신의 마나가 이반의 주먹에 모였다.

마나가 담긴다. 더없이 순수하고 막대한 마나가, 한계에 한계를 거듭하여 압축된다.

방금 전 사용했던 철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폭발력이 그의 주먹에 모였다.

그래도 부족하다. 한참이나,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주하고 있는 절망적 상황.

하늘과도 다름없던 스승의 패배가 가져다준 충격.

아그니란 절대자가 보이고 있는 압도적 위엄.

그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

‘이걸로는 안 돼.’

단순히 한계까지 마나를 압축한다고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노라가 말했던 것처럼, 공격력은 그녀가 한 수 위였다.

그럼 무엇을 담아야 되지? 부족한 부분을 충당할 수 있는 게 뭘까?

지금 나한테 뭐가 남아 있지?

마도무인에게 마나를 제외하고, 뭔가 담을 만한 게…….

‘아.’

그 순간 이반은 머릿속에 벼락이 친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내 생각.’

나의 생각, 나의 심정, 나의 신념.

그걸 담으면 되지 않은가.

“크하하…….”

이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거면 된다. 이 간단한 걸 왜 이제야 알아챈 건지.

그가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 이반이 서있는 곳은 아마칸 사막이 아니었다.

탁 트인 평야. 거슬리는 것 따위 하나도 없는, 그의 심상세계.

그곳에 오직 자신만이 홀로 서있다.

화륵!

그곳에 한 줄기 불길이 치솟았다. 이반의 세계를 모두 불태울 것처럼 격하게 타오르는 겁화.

알고 있다. 저것이 바로 아그니다. 지금 이반을 가장 불쾌하게 만들고 있는 존재다.

저 불길을 꺼뜨리려면, 태풍이 필요하다. 어설픈 바람은 오히려 불길을 강하게 만들 뿐이다. 지금 필요한 건 모든 걸 쓸어버릴 수 있는 커다란 태풍이다.

‘너를 꺼뜨리겠다.’

이반은 천재가 맞았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풍경은 과거 카사진이 밟았고, 노라가 추구했던 무왕의 경지였다.

쿠구구-

육체가 맥동한다. 그의 몸에서 폭발적인 활기가 솟구쳤다.

[……!]

위험하다. 아그니는 일전을 치르면서 처음으로 그리 생각했다. 연약한 인간의 육체에서 태풍이 보였다. 그것만으로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냥 둘 수는 없다. 아그니의 몸이 다시 한 번 크게 부풀었다.

가장 거슬렸던 닉스는 이미 사로잡혔다.

그러니 일대를 썬 하트로 쓸어버릴 수 있다.

<멈춰라.>

그 순간 베니앙의 용언이 아그니의 몸을 옭아매었다. 아그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드래곤-!]

그와 동시에 이반이 움직였다. 속도 자체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상관은 없다. 아그니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니, 3초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이반의 몸은 거의 지면에 스칠 것처럼 바싹 바닥에 붙었다. 그 상태로 아그니의 턱을 올려다보았다.

‘팔… 아니. 전신이 삐걱대는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응축된 마나가 빨리 내보내달라고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래. 한 번 마음껏 휘저어라.

이반이 껄껄 웃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이름을 짓는 데 센스는 없다. 그래서 심플하게 가기로 했다.

무왕권 비기.

이반의 주먹.

콰가각!

마나가 만들어 낸 폭풍이 아마칸 사막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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