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170화 (170/857)

170화 베니앙 아르젠토 (2)

상황을 가장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는 건 아마 노라였을 것이다. 그녀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데미갓과의 교전 경험이 가장 풍부했다.

물론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아그니의 강함은 이치를 벗어나 있었다.

노라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며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수백을 넘겼던 전사들 중에서 서 있는 자는 수십도 남지 않았다. 그중 전력이 되는 자들은 두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상대가 좋지 않았다. 아그니의 권능 앞에서 수적 우위는 아무런 전술적 효과를 가지지 못했으니까. 그의 힘은 데미갓 중에서도 특히나 가공할 만한 공격 범위를 가지고 있었다.

아그니가 권능의 일부를 발휘한 것만으로 지형이 바뀌며, 일대가 아비규환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노라도 그 혼란에 말려들 뻔했다. 그녀를 비롯한 몇몇 이들이 아직까지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프레이가 보낸 두 명의 원군 덕분이었다.

화르륵!

아그니의 불길이 다시 한 번 주변을 뒤덮으려고 했다.

그 불길을 향해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노라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설령 불의 정령이라도 저 화염에 버틸 수는 없겠지만, 저 붉은 머리의 여자는 다르다.

화륵.

“큭…….”

붉은 머리의 여자, 닉스가 침음을 삼켰다. 웬만한 불꽃은 그녀의 몸에 그슬린 자국조차 입힐 수 없었지만 아그니의 권능은 예외다. 마음만 먹으면 불꽃마저 불태워 버리는 힘이 있다.

‘…애초에.’

아그니는 닉스를 죽이지 못한다. 그래서 손대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어포슬이 아니었다면 염화에서 태어난 불사조란 사실이 무색하게, 진작 잿더미가 되었을 거다.

콰가각!

반대쪽에서 쏘아져 나간 얼음의 창이 아그니를 향해 쇄도했다. 아그니는 기척을 느끼고 팔을 휘둘렀다. 지면에서부터 일어난 화염의 해일이 창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러나 얼음의 창은 해일에도 녹지 않고 돌파하더니, 그대로 아그니의 몸에 꽂혀 버렸다.

[…….]

효과는 거의 없다. 얼음의 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녹아 버렸다. 그런데도 화염의 해일에 녹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그니를 불편하게 만든다.

‘엘리아의 권능.’

귀찮다.

게다가 저 남자, 이사카가 다루는 신력은 명백히 어포슬의 그릇을 넘어서지 않았나. 자신이 아닌, 다른 데미갓이 놈과 조우한다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콰직!

아그니는 격통을 느꼈다. 그의 거체가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왼쪽 다리가 누군가의 공격으로 소멸했다. 사라진 왼발을 다시 한 번 불꽃이 채웠지만, 방금 전의 공격은 꽤 매서웠다.

“으음…….”

노라는 화상으로 흉측해진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고통도 상상이상이다. 꼼꼼하게 감아 두었던 붕대는 벌써 너덜거리고 있다.

‘카이로가 만든 붕대를 감았는데도 이 꼴이라니. 용암보다 훨씬 뜨겁다는 거군.’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공격을 한 쪽이 더 큰 타격을 입다니. 이 꼴이라면 연타는 무리다. 아그니가 소멸하는 것보다 이자신의 주먹이 먼저 녹아내릴 것이다.

그때 아그니가 쏘아 낸 불꽃이 노라를 덮쳤다. 피하기엔 늦은 상황이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주먹을 쥐려고 하는데, 이반이 나타났다.

그는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이죽였다.

“안 본 사이에 몸이 좀 둔해진 거 아닙니까?”

무왕권. 풍파風波.

주먹에서 뻗어 나온 권압이 화염을 몰아냈다.

‘제법이야.’

노라는 제자의 성취에 내심 기특함을 느꼈지만, 스승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 ‘훈육’이 어설펐나 봐요. 아직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

“…그건 아니고.”

이반이 겸연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그 반응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많이 강해졌어.’

단순히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도 굳건해졌다. 아마 지금의 자신조차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반 또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재회를 했을 때, 노라가 화풀이로 휘두른 주먹을 피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이반이 아직 자신을 스승으로 생각한다는 증거였다.

사실 이반은 노라를 단순히 무술의 스승이 아닌 그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은인. 그에게 노라는 평생을 두고 은혜를 갚아야 되는 존재다.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은 도시 뒷골목에서 주먹이나 휘두르다 어느 날 변사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반이 스승에게 존경과 경의를 잊을 일은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자존심이 불고 오만해져 갔지만, 노라에 대한 태도는 여전했다.

노라는 이반의 탄탄한 육체를 보며 말했다.

“방어력은 이반이 저보다 한 수 위겠군요.”

“사내새끼가 남자구실 하려면 이 정도 터프함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끼? 지금 욕한 겁니까?”

이반이 투덜거렸다.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갑시다. 좀.”

“으흠. 아무튼, 공격력은 아직 제가 좀 더 앞서는 것 같네요.”

“그렇겠죠.”

우두둑

이반이 습관처럼 주먹관절을 풀며 말했다.

“무언가 뾰족한 수라도?”

“아그니의 이목을 끌어 주십시오. 제가 그의 근원根源을 공략해 보겠습니다.”

“효과가 있겠습니까? 저놈 불로 된 몸뚱이를 꺼뜨리는 것도 여간 일이 아닌데, 재생력도 트롤 엿 먹일 수준이지 않습니까.”

“마침 좋은 기회입니다. 무왕권의 비기를 보여 줄 테니까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요.”

“…….”

이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비기는 죽기 전에나 가르쳐 줄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스승님…….”

“아직 죽을 생각 없으니까 밥맛 떨어지는 표정은 짓지 마요.”

“…아니, 진짜. 걱정을 해 줘도 지랄이시네.”

“후후. 욕은 하지 말고.”

노라가 낮게 웃었다. 이반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죽으면 안 됩니다.”

“네.”

“아직 스승님한테 배우고 싶은 게 많으니까.”

“스스로 부족한 걸 알고 있군요. 부족한 제자가 올바르게 성장한 걸 보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흥…….”

이반이 몸을 돌렸다. 이 이상 얘기를 나눴다간 긴장이 다 풀려 버릴 것 같다. 육체는 적당히 경직되어 있는 편이 좋다.

이목을 끌어라. 단순한 말처럼 보이지만 상대가 아그니라면 쉬운 일은 아니다.

‘나한테 시선이 쏠리게 만들어야 된다.’

노라에겐 아무런 신경도 쓰지 못하도록.

하지만 아그니의 시선은 아득히 높은 곳에 있다. 저 정도 높이에서 내려다보면 전황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웬만큼 법석을 떨지 않는 이상 시선을 뺏기는 힘들 것이다.

‘요란하게.’

이반은 그리 중얼거리며 대지를 박찼다. 사납게 내달리는 이반에게 스노우가 붙었다. 그녀가 칼을 뽑으며 말했다.

“어느 쪽?”

“왼쪽.”

“그럼 내가 오른쪽으로 가마.”

둘은 시선을 한 번 교환하고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반은 얼음을 흩뿌리는 이사카에게 말했다.

“어. 그러니까… 프레이 닮은 양반, 지원 좀 부탁하겠수다.”

“내 이름은 이사카다.”

이사카가 불쾌한 태도로 쏘아붙였지만, 이반을 지원하는 데 망설이지는 않았다. 자신의 신력으로는 아그니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걸 이미 깨달았다.

‘상성의 차이인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다. 자신이 화염을 다루고, 놈이 얼음을 다루었어도 결과는 그대로였을 것이다. 다룰 수 있는 신력의 차원이 다르다.

데미갓 중에서도 아포칼립스는 급수가 다르다. 그 사실을 다시 절감했다.

푸화악!

불기둥이 덮쳐 온다. 이사카의 얼음이 불기둥 몇 개를 지웠지만, 다 막지는 못한다.

꾸욱

이반이 양팔을 세워 불기둥을 막았다.

무왕권. 바위방패.

몸을 두른 마나가 활성화되어 방어력을 극대화시킨다. 이반은 작열하는 불기둥을 억지로 비집고 나갔다.

[…….]

아그니가 이반을 보고 오른손을 들었다. 말아 쥐고 있던 주먹이 펼쳐지고, 그의 손바닥에서 화염이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

“하…….”

이반은 아연한 기색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백 개의 화염은 종말이란 단어가 떠오를 만큼 절망적인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맨몸으로 운석을 마주하는 느낌이 이러할까.

‘이런 제기랄.’

시시한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이반은 이미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대지를 누비며 화염을 피해 나갔다. 일렁이는 불길 때문에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반은 순전히 감각에 기인하여 몸을 움직였다.

그의 감각은 놀라울 정도여서 대부분의 화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걸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콰앙!

“끅!”

왼팔을 화염이 집어삼켰다. 차라리 팔을 잘라 내고 싶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반은 그간 몇 번인가 불길에 덴 적이 있었지만, 뇌가 비명을 지를 정도의 격통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마치 영혼 그 자체가 불타는 것 같다.

“젠장!”

하지만 고통에 신음할 여유는 없다. 이반은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달렸다.

‘숨을 마음대로 못 쉬는 게 제일 엿 같군!’

호흡을 다스릴 수 없다는 건 육체를 움직이는 마도무인에겐 치명적인 일이었다. 공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니 마나를 운용하는 데도 장애가 따랐고, 결론적으로 마도무술을 원하는 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아그니와의 거리가 거의 좁혀졌다.

이반은 대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몸이 포탄처럼 하늘을 향해 쏘아지더니, 순식간에 아그니의 허리까지 다다랐다. 거의 구름에 닿을 듯 뻗은 아그니의 거체를 생각하면 입이 떡 벌어지는 도약력이다.

꾸우욱.

이반은 대부분의 마나를 주먹에 넣었다. 상시 전개하고 있던 바위방패의 방어력이 대폭 줄어들며 전신이 화끈거렸다. 어쩔 수 없다. 아그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려면 기존의 마나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무왕권. 철권鐵拳.

콰앙!

아그니의 복부에 이반의 주먹이 꽂혔다. 크기를 고려한다면 벌레한테 물린 정도겠지만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주먹에서 퍼져 나간 풍압이 주변의 불기둥을 일시적으로 잠재울 정도였다.

아그니의 몸이 다시 한 번 기울어졌다. 효과가 있는 건가? 이반이 희망적인 관측을 하려던 순간에.

[여기까지 할까.]

아그니가 중얼거렸다. 쓰러지던 그의 몸이 마치 시간이라도 되돌린 것처럼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화륵!

그의 몸이 한층 거세게 타올랐다.

재생? 아니면 권능을 쓴 건가?

모르겠다. 이반이 넋 나간 얼굴로 아그니를 올려다보았다.

[지난 수천 년간 지성체의 발전을 충분히 억제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 너희들은 암중에서 끝없이 나아가고 있었어. 그리고 결국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 이제는 그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데미갓에게 위협이 된다. 이미 그런 존재가 되었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필멸자들이 작정하고 동족을 토벌하러 다닌다면, 아포칼립스 이외의 데미갓들은 누구라고 해도 목숨의 위협을 느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운이 나빴다.

[여기서 나를 만난 게 너희들의 불운이다.]

가장 뜨거운 불꽃.

아그니가 썬 하트라고 이름 지은 백색의 염화를 토해 내려던 순간이었다.

<멈춰라.>

[…….]

그 목소리는 아마 이 작열지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닿았을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다. 아그니의 몸이 그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뚝 하고 멎었다.

아그니는 곤혹을 느꼈다.

‘이 감각은…….’

과거에 느낀 적이 있다. 수천 년 전 지겹게도 느꼈던 불쾌한 감각, 초월자인 데미갓조차 얽어맬 수 있었던 조율자 고유의 권능.

[용언.]

시전자가 누군지 느낄 수 있었다. 아그니의 시선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한 여자에게 향했다.

녹색 머리카락의 여자. 그녀를 직시하며 내심 의아함을 느꼈다.

저건 드래곤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역사상 데미갓의 유일한 대적자였던 존재치고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존재감이다.

용언이 가지는 강제력도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3초가량. 아그니의 몸은 이미 자유를 되찾았다.

드래곤이 아니다. 애초에 대륙엔 더 이상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프……. 그래. 하프 드래곤인가.

[과연.]

어설픈 존재감과 달리 저 여자야말로 가장 귀찮은 존재다.

아그니는 이곳에 모인 자들 중 가장 까다로운 게 누군지 알게 되었다.

“흡.”

아그니의 타오르는 시선을 받은 베니앙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오금이 떨린다. 무섭다. 도망치고 싶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괜한 짓을 해 버린 게 아닐까?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베니앙은 몸을 멈칫거렸다. 머리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 느꼈던 온기. 목소리. 온화한 눈동자.

나를, 믿는다고 말했다.

“…….”

베니앙의 표정이 바뀌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한 발자국을 크게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오연히 고개를 들어 아그니를 노려보았다.

[…….]

아그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용언은 데미갓에게 가장 걸리적거리는 권능이다. 저딴 반쪽짜리 용언이라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로드조차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니 훗날을 위해, 그녀만큼은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여야 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