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167화 (167/857)

167화 선택, 그리고 각성 (5)

두 데미갓의 몸이 잘게 부서지더니 프레이에게 흘러 들어왔다.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프레이는 이 입자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인드라와 밀레드의 사념을 구성하던 신력, 그 자체다. 데미갓의 존재를 이루었던 근본이 고스란히 프레이에게 흡수되었다. 강제로 손을 쓴 것이 아니다. 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녹여 냈다

데미갓의 기억이 프레이에게 흘러 들어왔다.

부작용은 없었다. 이들은 더 이상 프레이를 적대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막대한 용량의 기억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프레이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의 정신은 충분히 데미갓 두 명분의 기억을 소화할 수 있었다.

“…….”

입자를 모두 받아들이자, 그들이 가진 권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남의 것이 아닌 처음부터 자신의 힘이었던 것처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감이 왔다.

더없는 충만함이 전신을 채웠으나 만족하기엔 이르다.

산이 하나 더 남아 있으니까.

그것도 가장 높은 산이었다.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포기를 종용케 하는 태산.

리키는 칼을 뽑으며 말했다.

“그 힘만으로는 로드를 이길 수 없을 거야. 실마리는 되겠지만,”

리키가 말한 그 힘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

“신마력을 알고 있었나?”

“아니. 하지만 어떤 힘인지는 이해했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키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전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신마력을 사용하는 것도 아주 오래 관찰했다는 뜻이다. 그 본질까지는 꿰뚫지 못했더라도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는 유추해 냈으리라.

또한 그는 로드의 힘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남자기도 했다. 프레이의 힘이 그에게 닿을지, 닿지 못할지 판단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프레이가 솔직하게 묻자 리키가 말했다.

“나를 굴복시켜라.”

“…….”

“나의 권능까지 손에 넣으면, 로드를 충분히 위협할 수 있다.”

“칼의 권능 말인가?”

확실히 리키의 권능은 대단하지만 육탄전엔 별 소질이 없는 자신에게는 적합한 힘이 아니다.

프레이의 떨떠름한 기색을 읽었는지 리키가 고개를 젓는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무엇이든 벨 수 있다. 설령 로드가 만든 공간일지라도.”

리키는 인드라와 밀레드가 있었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너에게 보탬이 되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그들의 사념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테고, 인드라의 뇌전만이 아니라 밀레드의 권능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되겠지.”

“밀레드의 권능?”

“천리안(千里眼).”

“…….”

“당장 감을 잡기는 힘들겠지만 앞으로 있을 싸움에서 큰 힘이 될 거다. 적어도 완벽하게 다루게 되면 손해 볼 건 없지.”

리키의 말이 이해가 갔다.

요컨대 방금 손에 넣은 두 데미갓의 권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는 뜻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한 발자국씩 걸어가며 경지를 높이면 된다. 그 속도가 비록 더디더라도 괜찮다. 시간은 많다.

물론 눈앞에 있는 남자를 꺾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다.

* * *

처참하게 패배했다.

처음에는 항상 이런 꼴이니, 전신의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겨 나갔는데도 헛웃음부터 나왔다.

‘괴물이군.’

리키와의 짧은 일전을 통해 다시 한 번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데미갓 중에서 유일하게 로드를 위협했던, 명실상부한 2인자가 맞다.

이치를 벗어난 강함.

약점이랄 것이 보이지 않는다. 칼을 뽑은 리키는 문자 그대로 무적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무엇이든 베어 낸다. 앱솔루트, 인드라의 뇌전, 신마력까지. 프레이는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이 그의 앞에선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된 것처럼 느꼈다. 칼바람에 산산이 부서지는 낙엽.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어.”

프레인은 처음으로 그런 말을 꺼냈다.

인드라, 밀레드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신마력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다면 그 둘을 이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도 리키를 이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어떤 방식으로 싸움에 임할 건지부터 생각해야 된다.

리키는 검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는 자리에 털썩 앉아 고심하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노릴 틈이 있다면 칼을 뽑기 전인가?’

빈틈이나 약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때의 리키도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니까. 하지만 칼을 뽑았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약한 게 맞다.

하지만 리키의 발검은 문자 그대로 신속(神速)이다. 사전 동작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칼자루에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발검이 끝나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적어도 지금 자신의 수준으로는 그 틈을 파고드는 건 불가능하다.

프레이가 막다른 곳에 몰린 기분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리키가 툭 말했다.

“네가 어떻게 인드라를 이겼는지 생각해라.”

힌트인가? 프레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방금 그게 리키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힌트일 것이다. 보통 이런 깨달음은 스스로 얻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인드라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건 의지의 차이다. 인드라는 밟아도 밟아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프레이에게 질려 버렸다. 점점 신마력 사용에 능숙해지는 모습을 보고 흔들렸다. 집중력이 분산되었고, 끝내는 공포까지 느꼈다.

프레이의 정신이 인드라를 압도했다.

‘리키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 리키의 정신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런 자의 신념을 굴복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인드라나 밀레드는 충분히 파고들 구석이 있었지만, 리키에겐 그런 틈조차 없다.

“…….”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그러면서 머리만 싸매진 않았다.

싸운다. 생각한다. 싸운다. 생각한다.

그 작업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한다. 지루하고 괴로운 나날들이 이어졌지만, 좀처럼 답이 보이지 않는다. 리키가 알려 준 힌트도 환영처럼 기웃거릴 뿐, 실체가 잡히지 않았다.

시간은 느릿하지만 확실히 흘러갔다.

리키와의 싸움은 프레이에게 커다란 벽이었다.

일전의 싸움처럼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리키와의 첫 번째 싸움으로부터 최소 수십 년은 흘렀는데도, 그때에 비해 나아진 게 없다. 여전히 일방적으로 깨질 뿐이다. 이기기는커녕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방법조차 보이지 않는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자만할 생각은 없지만 프레이는 데미갓 둘을 압도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리키는 잔류 사념이다. 실제의 리키보다 강하지 않다.

‘약해진 리키가 이 정도라면 로드는…….’

프레이는 고개를 털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반드시 로버를 토벌하겠다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는 절망하지 않겠다.

그 사실만큼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

…흔들리지 않는다?

프레이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리키에게 뒤쳐진다. 공격, 방어, 속도, 상황 판단과 반응속도까지.

하지만 한 가지, 밀리지 않는 것도 있다.

“신념.”

뿌리내린 의지. 그것만큼은 리키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 맞아.”

모든 건 자신의 의지에서 시작된다. 마나든, 신력이든, 신마력이든 상관이 없다. 구분 지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더욱 강해진다.

“그렇구나.”

리키가 가진 권능이 왜 강한지 알겠다. 그의 신념이 누구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극한까지 갈고닦은 정신은 더없이 날카로운 한 자루 검이 된다.

“하하.”

프레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막혀 있던 숨통이 탁 트였다. 올라갈 길이 보이지 않는 태산에서 길을 발견했다. 그 길이 얼마나 험한지는 모른다. 구름을 뚫고 치솟은 산이 얼마나 높은지도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길을 찾았다. 나아가야 될 방향을 알았다.

지금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이제는, 발걸음을 옮길 일만 남았다.

* * *

싸웠다.

더없이 처절하게 싸웠다.

몸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사지가 잘리든, 내장이 쏟아지든, 목이 베이든 개의치 않는다.

프레이에게 승패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리키를 굴복시켜, 그의 권능을 손에 넣어야 된다는 생각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나의 신념이 더 굳건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남자로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리키에게 적수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

격한 외침을 쉴 새 없이 토해 냈다.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감정을 불태웠다.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몰입이 아닌 몰아(沒我). 목적을 잊고, 상대를 잊고, 나 자신마저 잊는다.

…….

…….

그리고 어느 순간,

프레이의 몸이 갈라지는 것보다 리키의 칼이 먼저 부러졌다.

“…….”

부러진 칼을 내려다보던 리키가 갑자기 두 손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프레이를 보며 말했다.

“내 패배다.”

“…….”

한 마디.

저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을 쏟아부었나.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으나, 의외로 감정은 요동치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하다.

“아직 더 싸울 수 있잖아.”

그 말대로다. 고작 칼 한 자루가 부러졌을 뿐이다. 그의 몸에는 큰 상처가 없다. 오히려 프레이 쪽이 더 많이 다쳤다.

그러나 리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나 보군. 이곳은 현실과 다르다. 이 세계에서 칼이란, 신념이 구체화된 무기지. 그게 부러졌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까.”

“…….”

“너의 의지가, 나의 신념을 꺾었다는 것이다.”

리키가 희미하게 웃었다.

“결국 네가 말한 대로 모든 걸 손에 넣었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실감이 났다.

길고 길었던 수련이 이제 끝났다는 사실이.

그리고 심상 세계를 떠날 순간이 왔다는 것도.

“잊지 마라. 이곳에서의 기억을.”

스르륵

리키의 몸이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인드라, 밀레드와 같다. 그도 프레이에게 흡수되기를 자처하고 있다. 리키는 프레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동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그런 기색을 보였나?”

“아니. 하지만 느낄 수 있지.”

그래. 느낄 수 있겠지. 이곳은 그런 세계니까.

“나는 사라지는 게 아니다. 프레이… 아니 루카스, 네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 거지. 인드라와 밀레드처럼.”

“…고맙다.”

프레이는 그리 중얼거린 뒤, 시간을 두고 말을 이었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무엇 하나 이루지 못했을 거야.”

진심이었다. 리키는 물끄러미 프레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낯간지러운 소리는 그만하지.”

“그래. 피차 그런 거에 익숙하지는 않지.”

동시에 픽하고 웃었다. 이별이 아니다. 그의 사념은 이곳에서 사라지겠지만, 유지는 이어진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웃을 수 있었다.

리키의 모습이 거의 흐릿해지며 그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깨어난 이후엔, 서둘러야 될 거다.”

“……?”

자세히 물을 틈도 없었다. 프레이의 의식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쿠르르…….

심상 세계가 붕괴하며, 그간 겪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순간 프레이는 자신이 이곳에서 시간을 얼마나 보냈는 지 알게 되었다.

현실에서는 1초,

심상 세계에서는 832년.

천여 년에 준하는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프레이가 눈을 떴다.

그리고 깨달았다.

서둘러야 된다는, 리키가 했던 말의 의미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