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선택, 그리고 각성 (4)
-패배했다.
싸움조차 성립되지 못했다.
신마력은 순종적이라고 여겼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건 평시에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전투 상황에 돌입하니 신마력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세게 날뛰었다.
분명 뇌전을 뿜을 생각이었는데 마나가 나온다. 반대로 마나를 사용하려 할 때는 뇌전이 나간다. 신마력은 사소한 변화에도 뚝심을 보이지 못하고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
리키는 그저 상황을 관조했다. 인드라에게서 뻗어 나온 벼락이 프레이의 전신을 태웠을 때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프레이도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패배했다.
신마력을 쓰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래도 아직 인드라를 상대하는 건 힘들었다. 특히 뇌신(雷神)이 되어 움직이는 그를 쫓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언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온몸이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고통이 느껴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아가 붕괴될 정도의 고통. 그 수십 배를 매일 수백 번 넘게 겪는다.
그래도 꺾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건 불가능하니까.
다만 내성은 있었다. 프레이에게 육체적인 고통은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설령 뇌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패배했다.
수십 년은 흐르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관심도 없다. 앞서 말했듯이 프레이는 시간의 흐름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아마 리키에게 묻는다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럴 생각은 들지 않는다.
패배 요인에 대해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프레이가 새까맣게 탄 채로 고심을 거듭할 때쯤,
인드라는 리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리키, 너만 협력해 준다면 이 몸을 손에 넣는 건 일도 아니다. 잘못을 바로잡지 않을 텐가? 로드에겐 내가 얘기하겠다. 그는 틀림없이 용서할 것이다.”
효과는 없었다. 리키는 칼을 휘두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으니까.
리키가 칼을 거두며, 프레이를 보았다.
“계속하겠나?”
“아직 멀었어.”
“그래.”
수십 년 만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은 다시 침묵했고, 시간은 흘렀다.
* * *
이겼다.
드디어 인드라에게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여러 요행이 따랐고, 전신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이겼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결정적인 건 의지의 차이였다.
인드라는 날이 갈수록 집중력을 잃었다. 날카로웠던 감각이 천천히 무뎌졌고, 신력의 컨트롤에 자잘한 실수가 생겼다.
반면 프레이는 신마력을 다루는 데에 점점 탄력을 받았다. 그는 이제 두 힘을 어느 정도 구별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 시점부터 숙련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그릇은 충분히 만들어져 있었다. 마나를 다루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신력 또한 사용하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황이었으니까.
프레이에게 필요한 건 계기였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었다. 한 번 이기기 시작하자 승률에도 변화가 생겼다.
열 번을 싸우면 한 번을 이겼다. 하지만 그마저도 만신창이인 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승률이 올라갔다. 열 번에 둘, 셋, 넷…….
이윽고 승률이 반할을 넘은 순간, 인드라는 뒷걸음질을 쳤다.
[말도 안 돼……]
이곳은 심상 세계다. 인드라는 이곳에서 프레이의 기억을 엿보고, 그가 4000년 전의 대마도사인 루카스 트로우맨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무저갱에서 겪었던 인고의 기억 또한 엿보았다.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봤자 인간의 관점에서만 대단한 존재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프레이에게서 느껴지는 굳건한 정신력에 인드라가 위축되고 있다.
‘저 인간의 정신력이 나보다 강하다는 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지금도 인드라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 또한 진실이다. 신력이 뜻대로 뻗어 나가지 않는다. 평정심이 깨졌다는 증거다.
심지어 프레이는 자신의 능력을 학습하고 있다. 그가 뇌전의 힘을 다룬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숙련도는, 본주인인 인드라가 보기에 형편없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앱솔루트와 섞은 기술은 제법 위협적이겠지만, 그래 봤자 뇌전의 힘에서 속도만을 가져갔을 뿐이었다.
번개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힘의 진가는 단순히 속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드라는 단순 능력만으로 따지면 데미갓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위험하다.’
인드라는 더 이상, 프레이의 몸을 뺏는 것 따위에 신경을 쏟을 수가 없었다. 이놈이 지금 손에 넣은 정체불명의 힘을 완전히 다루게 되고, 거기에 뇌전의 힘마저 자신만큼 쓸 수 있게 된다면…….
농담이 아니다. 데미갓은 일찍이 겪은 적 없는 끔찍한 ‘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과거 드래곤과 전쟁을 할 때도 이 정도의 위기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이후, 인드라는 프레이와의 싸움에 전력으로 임했다.
더 이상 상대를 인간이라서, 필멸자라서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프레이는 완전히 신마력에 심취해 있었다. 과거 마도학에 몰입한 것만큼이나 신마력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보면 귀환한 이후, 프레이의 재능이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마도학과 다르다. 여태껏 밟아 왔던 길을 다시 걷는 게 아니니까.
신마력은 미지의 영역이다. 프레이는 지금 새로운 분야를 홀로 개척하고 있었다. 분석과 연구를 통해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고, 부족한 부분은 인드라와의 싸움에서 얻어 낸다.
성장한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다.
‘이 무슨……!’
인간들 중에 말도 안 되는 천재들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다. 불과 수백 년도 되지 않는 한정된 시간 동안,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이를 간 존재들.
그러나 그들을 보고 어떤 데미갓도 공포심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인드라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프레이의 재능에 짙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 * *
10할의 승률. 그 승률을 손에 넣기까지 다시 한 번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인드라는 자신의 권능을 그가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비장의 수인 뇌신화까지 습득했다.
“…더 이상 네놈을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겠군.”
프레이는 인드라를 보았다. 그는 언제부턴가 의욕을 잃은 것 같았다. 혹은 짙은 허무함에 시달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 사실에 스스로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이 데미갓을 이해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그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 세계는 프레이의 정신이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이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인드라와 밀레드는 프레이의 기억을 읽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그건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었다. 프레이 또한 그들의 기억을 엿보았다.
“인드라.”
그를 부른 건 밀레드였다. 리키는 더 이상 그의 사념을 없애지 않았다. 밀레드의 심정에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는.
“리키의 기억을 엿보았다. 너도 그렇겠지.”
“그래.”
“너는 어떻지?”
인드라가 대답하지 않자 밀레드가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혼란스럽다. 우리가 그를 로드라고 부른 건, 그만이 가능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우리들은 한 틀로 묶을 수 없을 만큼 개성적이고, 독립된 개체다. 그런데도 데미갓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동족애를 가진 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던 건…….”
“로드가 있었기 때문이지. 우리를 공정하게, 차별 없이 대하며, 언제나 가장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었던… 지도자.”
그래서 믿을 수 없었다.
로드가 리키에게 했던 제안.
죄 없는 데미갓에게 누명을 덮어씌우고 없애자는 이야기.
그 말을 듣는 순간, 밀레드는 자신의 마음속 깊숙이 박혀 있던 로드에 대한 신뢰가 뿌리째 뽑히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프레이는 잠시 인드라를 바라보다 리키에게 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나 흘렀지?”
리키는 힐끗 프레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시간을 언급한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90년 정도 되겠군.”
프레이는 다시 인드라를 보았다.
“백여 년이 흘렀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우리가 동화되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을 텐데? 밀레드는 리키의 기억을 보았다. 너도 보았을 거야. 아마 리키의 것만이 아닌 내 기억도 보았겠지. 나 역시 그렇고. …그래도 데미갓의 사고방식은 이해하지 못하겠더군.”
“…….”
“너희들은 어떻지? 아직도 인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희들에게 지배당하고, 굴복해야 될 존재로 여기고 있나?”
프레이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는 인드라의 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들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 버리는 건, 지금의 프레이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긴 프레이의 공간이다. 따지자면 그의 세계였다. 약간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것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지워 버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드라와 밀레드는 프레이가 약해지기 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인드라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프레이의 말대로다. 리키의 기억을 보고, 프레이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꼈다. 철옹성 같았던 데미갓의 자부심에 금이 갔다.
점차 프레이에게 감화되어 간다. 처음엔 그 사실에 짙은 치욕과 모멸감을 느꼈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점점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약자의 심정이 이해가 가고… 동정이 갔다.
후회. 그 단어가 떠올랐을 때, 인드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아마 그가 백여 년간 꺼낸 말 중 가장 온순한 어투였을 것이다. 밀레드 또한 제지하지 않았다.
프레이는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사념은 신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이 자리에서 소멸시킨다면 나의 신력이 줄어든다는 거지.”
“신력을 잃고 싶지 않다는 거군. 그 기묘한 힘을 다루게 된 이상, 신력 또한 네 에너지의 일부가 될 테니까.”
“그것만이 아니야. 나는… 너희들의 생각이 바뀌길 바라고 있다.”
프레이는 어렵게 그 말을 내뱉었다. 인드라와 밀레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한 반응이다. 입 밖에 내기 전까지, 그 스스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걸 몰랐으니까. 아마 가장 놀란 건 말을 꺼낸 프레이 자신일 것이다.
데미갓을 변화시키는 것. 4000년 전의 루카스였다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리키를 보았고, 엘리아를 보았다.
“내가 용서라도 구걸하길 바라는 거냐?”
인드라의 목소리에 거친 분노가 실렸다. 프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넌 이미 죽었어. 사념한테 그런 걸 바라진 않아.”
데미갓에게 죽음이란 소멸을 의미한다. 그들은 육체가 곧 영혼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잔류 사념이라 부르는 것이다.
진짜 인드라와 밀레드는 이미 죽었다. 리키도 그렇다.
“…….”
인드라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프레이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천히 생각하고 결론지어라. 지금은 재촉하지 않아. 시간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으니.”
“아직, 여기서 나가지 않을 셈이냐?”
인드라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프레이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네놈은 이 인드라를 완벽하게 압도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지금 네 정신력은 데미갓을 뛰어넘어 초월자의 경지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알고 있다.”
“내 권능의 사용법 또한 훔쳐 갔지. 거기에 그 기묘한 힘… 신력이든, 마나든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한 그 힘을 완벽하게 다루게 되었는데도 여기에 더 있겠다는 것이냐?”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프레이는 대답했다.
“그래.”
이미 눈앞의 인간은 필멸자에게 허락된 그릇을 한참이나 초월했다. 그런데도 더 강해지려고 한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거나 과욕을 가진 게 아니었다. 프레이의 마음에 그런 혼탁한 기류는 느껴지지 않는다.
프레이가 중얼거렸다.
“아직 부족하니까.”
“뭐?”
“이 정도로는 아직 로드를 이길 수 없어.”
“…….”
인드라는 진심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로드를 이긴다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그리 되묻고 싶었다. 이곳이 심상 세계가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인드라는 프레이의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남자는 진심으로, 로드를 이길 생각을 하고 있다.
* * *
프레이는 그 이후 인드라와 밀레드를 상대로 싸움을 펼쳤다. 데미갓 둘을 상대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인드라를 완전히 압도했어도 그 사실은 변치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합을 맞추지 못하고 헤맸다. 데미갓의 독립적인 성향을 고려하면 손발을 맞추기 어려운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은 적응을 마쳤고 그때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단언컨대 프레이가 여태 치렀던 그 어떤 혈투보다 힘든 싸움이 나날이 이어졌다.
단순히 전력이 배가 된 게 아니었다. 인드라와 밀레드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프레이를 압박했다. 제대로 합을 맞춘 데미갓이란 이토록 무서운 존재였다.
처음 수십 번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깨졌다. 싸움조차 성립되지 못했다. 마치 첫날로 되돌아간 것처럼, 천둥 번개와 화살의 비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실마리를 찾은 건 패배 횟수가 약 백 번을 넘었을 때였다.
‘따로 사용하면 의미가 없다.’
신력과 마나를 동시에 발현해야 된다. 어려운 일이다. 앱솔루트에 뇌전을 곁들이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동시에 각기 다른 힘을 선보여야 된다.
한 손으로는 그림을, 다른 손으로는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엄살을 부릴 수는 없다.
얼마나 힘든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프레이에겐 해내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을까? 여전히 모른다.
하지만 프레이는 조금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치라는 생각에 고개를 턴다.
“정말 대단하군.”
인드라는 결국 그리 중얼거리고 말았다. 밀레드 또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들의 시선은 프레이를 향하고 있었다. 멀쩡한 꼴은 아니지만, 반대로 큰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다.
당연하다. 이번 싸움에서 프레이는 승리했으니까.
“인정하겠다.”
“지금의 너는 우리 둘보다 강하다.”
인드라와 밀레드.
두 명의 데미갓이 프레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프레이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상조차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으니까.
비록 잔류 사념이라고 해도 스스로가 데미갓이란 자각이 있는 존재들이다. 오만함과 자존심으로 만들어진 초월자들.
그런 존재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