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선택, 그리고 각성 (2)
쿠르릉!
인드라의 전신에서 뇌전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라이트닝 배리어가 아니다. 주위에 뇌전의 막이 생긴 게 아닌, 그 자체가 한 줄기 번개가 된 것 같았다.
처음 보는 능력이다. 아마 어포슬인 루케스는 죽었다 깨어나도 쓸 수 없던 권능일 거다. 프레이는 그 원리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팟
인드라의 모습이 사라졌다. 프레이는 안구의 재생을 마쳤지만,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오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그는 번개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심상 세계에 폭풍우가 온 것 같다. 사방에 천둥이 거세게 내려쳤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리키의 모습이 무척이나 위태롭게 보엿다.
그러나 걱정은 불필요할 것이다. 저 남자가 프레이가 아는 리키라면.
리키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두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칼은 지면에 닿을 듯 늘어뜨리고 있다. 그의 시선이 왼쪽으로 향했다.
──.
순간 정신없이 내려치던 천둥 번개가 멎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리키는 사선으로 칼을 그었다.
스걱
베이는 소리는 뒤를 이어 들렸다. 순식간에 먹구름이 개이고, 천둥이 멎었다.
[어… 떻게…….]
인드라의 목소리였다. 사라지기 전과는 전혀 달라진 모습이다. 그는 뇌전이 뭉친 것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프레이는 그게 일부 데미갓들이 가진 초월체의 모습이란 걸 깨달았다.
저 상태의 데미갓에겐 웬만한 공격으로는 효과를 볼 수 없다. 아마 앱솔루트에도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인드라의 몸이 볼품없이 반으로 찢겨져 있었다. 왼쪽 쇄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떻게 이토록 쉽게 벨 수 있는 거지……?]
인드라는 리키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리키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리키…….]
스으
인드라의 모습이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밀레드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시위를 당겼다. 반응이 늦었다. 인드라가 살아 있을 때 같이 협공했어야 됐는데. 뒤늦은 후회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이토록 허무하게 인드라를 제압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어?”
그런데 시위가 당겨지지 않았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활을 내려다보는 순간 시위가 핑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베였다.
“대체 언제…….”
뚜둑-
활이 두 동강 난 건 그 이후의 일이었다. 리키는 칼을 칼집에 넣었다. 밀레드는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불신에 찬 얼굴로 떠듬떠듬 말했다.
“이럴 수는…….”
푸화악!
밀레드의 가슴이 갈라지고 폭포수처럼 피가 치솟았다. 쓰러진 밀레드는 핏물과 함께 희미해지더니, 인드라처럼 사라졌다.
“…….”
프레이는 놀라지 않았다. 순식간에 데미갓 둘의 자아를 사멸시킨 광경은 쉽게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게 리키의 손에서 펼쳐졌다면 얘기는 다르다.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신이 거센 비명을 질렀다. 부들거리는 주먹을 억지로 쥐었다. 속지 마라. 정신력의 엄살일 뿐이다. 어차피 이곳은 심상 세계다. 이 육체도 진짜 육체가 아니다. 고통 때문에 쇼크사라도하면 모를까, 육체가 붕괴되어 잘못될 일은 없다.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자신의 목소리였지만 부정확하다. 혀까지 타 버려서일까? 프레이는 몇 번 입을 우물거렸다. 그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억지로 참고 말을 잇는다.
“너는 내가 알던 리키가 맞나?”
“잔류 사념일 뿐이다.”
리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잔류 사념이라는 개념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풀어서 보면 이해는 간다. 잔류된 사념. 요컨대 눈앞의 리키는 진짜 리키라고는 할 수 없다. 방금 사라진 인드라, 밀레드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난 아직 네 결정을 흡수하지 않았는데…….”
“아난타의 독에 당했더군. 놈이 사용하는 건 극독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죽음의 액체다. 내가 남긴 결정이 관여하지 않았다면 넌 이미 죽었겠지.”
프레이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렇단 건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건가.”
“파리 목숨이긴 하지만, 이 세계에선 상관이 없는 얘기다.”
“어째서?”
“죽기 직전의 찰나는 영겁과도 같으니까. 그렇다고 여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주마등. 실제로는 1초도 안 되는 시간이 아주 길게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심상 세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프레이는 리키의 말을 이해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도와줘서 고맙─.”
“선택해라.”
리키는 뒤늦은 감사 인사를 끊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프레이는 순간적으로 침음을 흘릴 뻔했다.
그가 죽고 남긴 결정이었다.
선택.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듣는 순간 그가 말하는 선택이 무엇임을 알아챘다.
마나와 신력.
인간과 데미갓.
필멸자와 초월자.
리키가 특유의 고적한 눈으로 프레이를 보았다.
“…그걸 받아들이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데미갓처럼 되겠지.”
리키가 짧게 대답했다. 엘리아조차 섣불리 입에 담지 못했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처음에는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할 거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의 사상에 물들게 될지도 모른다. 방금 사라진 밀레드, 인드라 또한 그렇다. 그들은 완전히 사멸한 게 아니야. 너의 몸을 뺏기 위해 앞으로도 호시탐탐 기회를 기다릴 테니까.”
몸속 깊숙한 곳부터 거부감이 고개를 들었다. 리키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나를 잃게 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인격이 아예 변하고, 사상이 변질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더 이상 프레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데미갓처럼 된다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프레이 블레이크, 아니. 루카스 트로우맨의 자아가 격하게 구토를 했다. 프레이는 이를 악물었다.
결정을 미루었던 문제가 눈 깜박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럼 신력을 받아들여도 종내엔 파멸만이 기다리겠군.”
“그렇겠지.”
“만약 신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죽는다. 이미 아난타의 독이 깊숙하게 침투되었으니까. 네가 가진 마나, 혹은 기존의 신력만으로 몰아낼 수는 없다.”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다. 프레이는 허탈해지고 말았다.
리키의 손에 있는 결정은 진짜 결정이 아니다. 저건 단순히 상징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이 세계의 프레이가 저걸 받아들이면 현실의 육체 또한 리키의 결정을 완벽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일반적인 데미갓의 몇 배나 되는 막대한 신력이 프레이의 몸을 채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아니게 되겠지.
그건 싫다. 마음 같아선 그냥 죽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았다.
우선 아나스타샤가, 슈하이저가 죽는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친우가 다시 허무하게 죽을 것이다. 이반 일행 또한 아그니에게 전멸할 것이다. 그곳에 있는 베니앙도, 스노우도, 노라도 죽는다.
로드는 이미 카스트카우 제국을 삼켰고, 서클의 세력을 뿌리 뽑기 시작했다. 파라곤의 상황도 순탄하게 풀리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서클 이상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마각을 드러낸 데미갓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다.
이 사막에서의 싸움은 그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단적으로 말해서 대륙의 존망이 걸려 있었다.
이미 프레이의 목숨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받아들여야 된다.’
프레이가 구슬로 손을 뻗었다.
‘한 줌의 인간성이라도 남아 있는 한, 나는 신력을 행사하며 데미갓과 맞서 싸우겠다.’
이 굳은 결심이 결코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뻗은 손이 구슬에 닿는다.
“…….”
아니. 닿기 직전에 멈춘다.
프레이의 표정이 바뀌었다. 멈칫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리키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위화감이 들었다. 본능? 아니. 그런 시시한 감각이 아니다. 이 위화감에는 논리가 있다.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해명만 할 수 있다면, 위화감의 정체만 알 수 있다면 분명…….
생각해야 된다. 무언가 놓친 건 없나? 이상하다고 생각할 건 없는 건가? 뭐라도 좋으니까 힌트를…….
“아.”
[선택해라]
리키의 말이다.
이상한 말이다. 선택하라니? 리키의 제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신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으니까.
아집을 세워서, 끝내 신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는 것. 그것도 선택지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야.’
그런 건 선택이 아니다. 리키는 얼간이가 아니다. 그딴 실없는 제안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다.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프레이는 다시 한 번 리키를 바라보았다. 직시했다. 그리고 그의 눈빛 깊숙한 곳에 있는 미약한 기대감을 찾을 수 있었다.
“아니야.”
그래. 아니었다.
프레이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엔 근심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리키의 무표정한 얼굴에 변화가 일어났다.
“뭐가?”
“두 개 다 아니었어.”
프레이는 덥석 결정을 잡았다.
“신력은, 가져가겠다.”
“…….”
“하지만 마나도 버리진 않겠어.”
리키가 잠시 멍한 얼굴로 프레이를 보았다. 그의 얼굴엔 어느덧 자신감이 돌아와 있었다. 해답을 찾은 현자처럼 눈이 빛나고 있다.
“두 가지 힘을 같이 품겠다. 욕심이 많군.”
“알고 있던 사실이잖아.”
“훗. 그렇지.”
리키가 웃었다. 이 심상 세계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 말을 기다렸다.”
그래. 이 남자는 리키였다. 잔류 사념이지만 리키가 맞다. 그러니 자신을 구해 주었던 거겠지.
리키가 인간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 그는 프레이가 제3의 길을 고를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그를 실망시킬 뻔했다. 그리고 리키를 실망시키는 건 루시드를 욕보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단순히 두 가지 힘을 품고 싶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죽기 직전의 찰나는 영겁과도 같다.”
프레이는 리키가 했던 말을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상 세계. 아무 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 무저갱과는 다르군. 그곳엔 시커먼 암흑만이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곳에 얼마나 머물 수 있지?”
“네 정신력에 달렸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에 준할지도 모른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정신이 붕괴하겠지만 너한테는…….”
“할 만한 정도군.”
아마 인간 중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프레이밖에 없을 것이다.
리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너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지.”
프레이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보다는 상황이 낫다. 마나가 조금은 방출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좀 더 원활해질 것이다.
“인드라와 밀레드의 사념은 완전히 소멸한 게 아니라고 했지?”
“그래.”
“인드라를 다시 부를 수도 있나?”
프레이의 생각을 읽은 리키가 눈을 빛냈다.
“그들을 수련 상대로 삼을 셈이군. 좋은 생각이야. 처음에는 하나랑 싸우다가, 익숙해지면 수를 늘린다. 그들 둘을 상대로 이길 정도가 되면 바깥에 있는 상황도 충분히 타파할 수 있을 테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뭐?”
프레이가 리키를 보았다.
“너도 이기고 싶다.”
리키는 잠시 말문을 잊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픽 웃으며 말했다.
“어려울 거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다? 아니. 지금 당장으로썬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도 해야 된다. 잔류 사념으로 존재하는 리키는 아마 본체보다 약할 것이다. 그런 리키를 꺾지 못한다면 로드를 이긴다는 생각 따위 품지도 말아야 된다.
리키 또한 숙원을 이루기 위해선 넘어야 될 산 중에 하나였다.
‘수백 년.’
프레이는 시간에 대해선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목적을 이루는 게 우선이고,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세웠는지도 알고 있다.
당장 인드라나 밀레드, 리키를 이기는 것보다 결정을 흡수하면서도 마나를 버리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게 더욱 요원할 것이다.
하지만 이룰 것이다. 단언해도 좋다. 프레이가 제풀에 지쳐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을 나갈 때는, 모든 걸 손에 넣은 이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