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노르닐 (1)
그러나 프레이는 직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밀레드의 정보대로라면 현재 넴파탈에 있는 데미갓은 세 명이다. 그러나 데미갓 셋이 있는 것치고는 신력이 너무 시원찮다.
‘밀레드가 잘못된 정보를 말한 건가?’
아니면 어떤 다른 사정이 있는 걸까. 아무튼 방심할 수는 없다.
“저 도시엔 데미갓이 다수 있다.”
드로의 말에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닉스를 데리고 도망치는 건 힘들어졌다. 그러나 오히려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데미갓 셋을 토벌할 수만 있다면 실키드에 있는 놈들의 전력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다. 추후에 있을 아그니 토벌전도 훨씬 쉬운 양상이 될 테고.
게다가 지금 프레이는 든든한 조력자까지 있지 않은가.
그때 드로가 말했다.
“넴파탈엔 너 혼자 가라.”
믿었던 조력자의 냉정한 말에 곧바로 의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왜?”
“다른 손님들이 오는군.”
“다른 손님이라면…….”
“데미갓.”
그 말에 프레이는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데미갓이 더 있다고?”
아그니, 밀레드, 드로가 토벌한 데미갓 하나.
거기에 닉스를 추격하고 있는 데미갓 셋.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여섯이다.
애초에 많아도 셋이나 넷 정도의 숫자를 생각했던 프레이의 예상을 두 배는 넘어선 수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더 있다?’
대체 이 사막엔 몇이나 되는 데미갓이 있단 말인가?
“가깝나?”
“30분이면 이 도시에 당도하겠군.”
“몇이나 되지?”
“최소 둘. 어쩌면 그 이상. 음. 자세한 수는 모르겠다.”
데미갓 둘. 프레이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러나 곧 의문이 들었다.
프레이는 밀레드의 결정을 흡수함으로써 신력의 움직임에 대해 훨씬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넴파탈에 접근하는 데미갓의 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드로가 나 이상으로 신력에 민감하다?’
그 사실에 의아함이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혼자 상대하기 힘들 거다. 아니면 자신이 있는 건가?”
“데미갓을 상대로 필승을 장담할 수는 없지.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갓은 각 개체마다 너무나도 독립된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 설명을 드로에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프레이다. 이제부터 그가 치를 전투에서 데미갓 하나를 상처 없이 이긴 사실은 큰 긍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다.
하물며 상대할 데미갓의 능력도 모르는 상태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라면, 마주한 데미갓의 역량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도.
“좀 있다 만나지.”
드로는 그 말을 끝으로 넴파탈의 반대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프레이가 붙잡을 새도 없었다. 아니. 붙잡았다고 해도 자신의 말을 들었을까.
프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지 않았지만, 잠시 후에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즉 최악의 상황에 자기 몸을 내뺄 자신은 있다는 뜻이다.
프레이는 시선을 돌려 다시 넴파탈을 보았다.
‘데미갓 셋.’
그 단어가 주는 무게에 새삼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문득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에 시선이 간다.
슈하이저, 아니. 아나스타샤가 준 마도구.
타이밍 좋게 그녀가 등장한다면 그 이상 가는 원군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리 형편 좋은 전개를 기대할 수는 없지.
프레이는 상념을 멈추고 넴파탈을 향해 달려갔다. 최악의 상황은 닉스가 이미 잡혀갔거나,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황이다.
‘늦지 않기를.’
도시를 헤집는다. 시커먼 연기가 불쾌하게 달라붙었다. 사막 특유의 건조한 냄새가 거의 나지 않을 정도였다.
거리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전사들만이 아니다. 민간인들 또한 말려들었다. 죽고 나서 제법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시체의 얼굴엔 공포와 두려움만이 보였다.
프레이는 참혹한 광경에 이를 악물고 말았다.
이토록 거리를 내달리는데도 살아 있는 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도시민 절반 이상이 이미 죽었다는 뜻이었다.
‘개자식들.’
프레이는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
지금 넴파탈은 데미갓에게 지배당한 자들이 얼마나 참혹한 꼴을 당할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이게 굴복을 택한 자들의 미래다. 그들은 자신들 이외의 생명체에겐 관심 없다. 닉스 하나를 찾기 위해 수천 명이나 되는 인명을 학살했지만 아무런 감정도 느끼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후로도 그럴 것이다. 굴복하고, 고개를 조아린다고 해서 다른 이들보다 우대받는 게 아니다. 그들은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굴복한 자들을 죽일 것이다. 아무런 가책도, 망설임도 없이.
화르륵!
그 순간 상공에 거대한 화염이 날개를 펼쳤다.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적염이 하늘을 수놓았다.
프레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다음 순간 프레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붉은 머리의 여자가 피를 흩뿌리며 추락하는 광경을 본 것이다. 그리고 떨어지는 그녀를 누군가 추적하고 있다.
머리보다 빠르게 몸이 움직였다. 프레이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닉스는 실로 오랜만에 스스로의 의지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사실에 감회에 잠길 틈조차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토르쿤타에게 육체의 제어권을 준 건 아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위치를 특정당한 이상, 조금이라도 이 육체를 잘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이 제어권을 갖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고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제법 매서운 불꽃이군.”
“…….”
“응? 말을 할 줄 몰라? 불사조면 영물이잖아. 지성이 없는 건 아닐 텐데.”
데미갓, 베르단디의 말에 처음으로 닉스가 대답했다.
“도시 사람들은 관계가 없었어.”
“응?”
“이곳 사람들을 왜 죽인 거지?”
그 말에 베르단디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쑥대밭이 된 넴파탈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이 인간들은 그냥 운이 없었던 거야.”
“뭐?”
“우리가 권능을 행사했고, 그 자리에 재수 없게 인간의 터전이 있었다. 그것뿐이지.”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쿡쿡 웃었다.
“애초에 네가 여기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이 꼴이 나진 않았어. 어떻게 보면 네 잘못도 있겠는걸.”
궤변이었으나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닉스가 진작 아그니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걸 받아들였다면 이런 희생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불사조면서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거냐? 응? 관계없는 인간들 수천 명이 죽는 게 무슨 대수라고.”
“관계없지 않아.”
닉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 인간이었고, 그녀가 지키고 싶은 사람도 인간이다.
그 말에 베르단디 옆에 서 있던 스쿨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 나는군.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아그니의 어포슬만 아니었어도 이미 백 번은 죽었어.”
“…….”
닉스가 대답하지 않자 스쿨드가 이를 갈았다.
“최대한 상처 없이 데려가려 했는데 관두지. 그냥 반쯤 죽이고 데려가겠다!”
그 말과 함께 스쿨드의 신형이 사라졌다. 닉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드, 그리고 아포칼립스들. 그들을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자신을 추적하는 세 명의 데미갓은, 다른 데미갓들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다른 데미갓’에 비하면 약하다는 것이다.
지금 닉스의 힘으로는 저들 중 하나를 제대로 상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약하기 때문에.’
모든 걸 잃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강했다면,
눈앞에 있는 스쿨드보다, 실키드 저편에 군림하고 있는 아그니보다, 모든 데미갓을 이끄는 로드보다 강했다면.
그럼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넴파탈의 무고한 시민들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진작 그분과 재회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팟.
사방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푸화악!
닉스는 자신의 염화炎火를 사방으로 분출했다. 그녀의 몸에서 뻗어 나온 불꽃이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다.
“흠.”
스쿨드는 거리를 벌렸다. 도망친 게 아니다. 단순히 물러난 거다. 그럴 수밖에. 알아서 힘을 빼 준다는데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검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불사조의 화염, 거기에 아그니의 권능을 섞었군. 제법 화끈하구나. 억지로 들어갔다간 피부가 그슬리겠어.”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하지만 부족한 화력을 생명력을 태우는 걸로 충당하고 있군. 계속했다간 네 몸이 버티지 못할 텐데?”
정곡이다. 하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스쿨드의 말처럼, 이 화염이 아니면 그녀에게 제대로 된 데미지를 줄 수 없으니까.
그때 스쿨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앗! 언니!”
언니? 베르단디는 그녀의 옆에 있는데.
푹, 등에서 싸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자 자신의 복부를 뚫은 창이 보였다. 끈적하게 달라붙은 내장 조각의 모습이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
타는 것 같은 고통은 뒤늦게 찾아왔다.
‘대체, 언제…….’
의문에 대답하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시간 끄는 것도 질려서. 설마 네가 강해서 여태 잡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우르드. 여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지막 추격자가 어느새 닉스의 뒤를 잡은 것이다. 닉스는 그녀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했다. 모든 신경을 베르단디와 스쿨드에게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컥.
닉스가 울컥 피를 토해 냈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낙하했다.
“언니도 참! 나한테 맡기라고 했잖아.”
“더 이상 지체하면 아그니가 화를 낼 것 같거든.”
“오호호. 그만 싸우고 빨리 회수해서 돌아가자.”
“어, 그럼 이 도시는 어쩔까?”
“그냥 없애자. 어차피 거의 다 부숴 놔서 얼마 안 걸릴 거야.”
데미갓의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닉스는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구나.’
더 이상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닉스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염화를 사용해서,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소진시킨다. 그로 인해 폭발적인 적염이 일대를 뒤덮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저들 중 하나는 데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안, 토르쿤타.’
닉스는 의식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는 토르쿤타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그리고 회색 머리카락의 청년을 떠올렸다.
그래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자신이 죽으면 아그니는 동면에 빠진다. 그라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흥.”
그 모습을 보며 우르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창을 치켜들었다.
투창. 단순한 기술이지만, 이걸로 닉스는 정신을 잃을 것이다. 몸이 두 동강 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불사조. 쉽게 죽지는 않을 테지.
“음?”
변화는 갑자기 일어났다.
우르드가 창을 천천히 떨구었다.
베르단디와 스쿨드는 잡담을 멈추었다.
그리고 닉스는 온기를 느꼈다.
‘-아.’
추락이 멈췄다. 고통은 없었다. 누군가 떨어지던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따뜻하다. 언젠가, 단 한 번 느꼈던 온기가 느껴졌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닉스는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온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것만 같다.
“재회를 약속했지 않느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실제로 닉스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꼭 다시 듣고 싶었던 목소리, 꼭 다시 느끼고 싶었던 온기가 동시에 느껴진다.
그녀는 목이 메여 입을 열 수 없었다.
“…왜 오셨습니까.”
쇳소리가 섞인 울음이 터져 나왔다.
결국 닉스는 그런 말밖에 뱉지 못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시 봐서 기쁘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재회의 기쁨보다 그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상대에게도 가감 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저는 당신이 오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여기는…….”
“사지死地라고 말하고 싶으냐?”
“알고 계시면서…….”
“너도 사지로 뛰어들었지.”
닉스가 숨을 들이켰다. 토르쿤타와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너 또한 스스로의 죽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멈추지 않았지? 무슨 생각으로 토르쿤타에게 쇄도한 거냐?”
그때, 내가 했던 생각.
구해야 된다. 어떻게 해서든 구해야 된다.
설령 내 목숨을 바치더라도-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닉스의 생각, 프레이의 목소리가 겹쳤다.
프레이는 빙긋 웃었다.
“괜찮다. 직접 보니 알겠구나.”
하늘에 있는 데미갓들을 보았다. 그들의 면면을 뜯어보았다.
프레이의 시선을 받자 하늘에 있던 세 자매는 몸을 움찔 떨었다. 앞서 언급했듯 지금의 프레이는 마주한 데미갓의 역량을 알 수 있다.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 이길 수 없는 상대인지. 두 눈으로 직접 보면 더욱 뚜렷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방금 결론이 나왔다.
“내가 저들보다 강하다.”
프레이는 허언을 입에 담지 않는다. 상대가 데미갓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서, 프레이는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