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같은 시각 (2)
종족을 불문하고, 작금의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집단이 어딘지에 대해 묻는다면 너나없이 같은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카스트카우 제국.
마도제국으로 명성 높은 곳이지만, 뛰어난 기사나 연금술사도 줄기차게 배출되는 나라다. 대륙에서 제국이라고 불리는 단 두 개의 나라 중 하나기도 했다.
제국 황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황좌에 앉은 중년 남자.
이 남자가 바로 제국의 황제인 발리아 디아크 카스트카우다.
그러나 발리아는 황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지오탄불과 실키드에 대한 얘기를 들은 후, 발리아는 하루도 편히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데미갓. 대륙의 어둠에서 군림하던 초월자들이 드디어 마각을 드러낸 것이다. 카스트카우 제국의 황제들은 대대로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힘을 빌린 적도, 힘을 빌려준 적도 있다. 데미갓은 황실에게 있어 훌륭한 거래 상대였다. 그들이 가진 무소불위의 힘은 카스트카우의 국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을 완벽하게 해결해 주었다.
‘맞서 싸워선 안 된다.’
데미갓에게 대적하는 건 자살행위다. 수백의 마법사와 수천의 기사, 수만의 병사가 있어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줄은 몰랐군.]
발리아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황실엔 제국의 뛰어난 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쳐 둔 결계가 있다. 설령 8성의 대마법사라도 이곳을 함부로 침입할 수는 없고, 전설속의 9성이라고 해도 결계를 완벽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색 광휘를 두른 저 초월자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모양이다.
그는 아무런 소란도, 기척도 남기지 않은 채 원래부터 있었다는 듯 그곳에 오연히 서있었다.
“…로드.”
로드는 황좌를 올려다보았다. 이목구비가 하나도 없는 그 얼굴을 보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멈출 것 같았던 심장이 거세게 맥동했다.
[내려와라.]
“무, 무슨 소리요?”
발리아의 물음에도 로드의 어조는 평이했다.
[황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어라. 예의를 갖추고 우리에게 복종해라. 그리하면 살려 주겠다.]
그 말에 발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무릎을 꿇고, 복속해라. 로드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닥치리라 생각했던 일이었으니까.
“…받아들일 수 없소.”
발리아 황제는 거절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황제인 그가 무릎을 꿇는다는 건, 카스트카우 제국이 완전히 데미갓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는 걸 의미했다.
어차피 로드를 막을 수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힘으로 강제로 굴복하는 것과 자의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게다가 카스트카우에겐 제국의 자존심이 있었다. 비록 지오탄불은 멸망했지만 실키드는 아직까지 투쟁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제국이 먼저 백기를 들 수는 없다. 자신들이 항복한다면 다른 국가들도 그에 편승할 가능성이 있다.
제국의 선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발리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때문에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갑자기 왜 이리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오? 여태까지처럼 계속 공생 관계를 이어가면 대륙도 평화로울…….”
발리아는 말을 멈추었다. 돌연 로드가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뭐가 웃기시오?”
[공생은 서로가 이익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관계를 표현하기 적합하지 않군.]
“제국은, 단 한 번도 당신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소.”
[그래서 이 나라가 아직까지 멸망하지 않았지.]
그 한 마디에 발리아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다른 이가 말했다면 코웃음도 치지 않았겠지만, 실제로 로드에게 나라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로드가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 순간 발리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으으…….”
“폐, 폐하.”
“흑, 흐윽.”
돌연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황제의 친족들이었다.
로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순간적으로 가슴에서 치밀어 오른 분노가 공포를 덮어 버렸다. 발리아가 포효하듯 외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쉿.]
그 분노조차 로드의 한 마디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로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머리가 차게 식고,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모두 찾아오느라 수고를 좀 했다. 너희들에게 한 가지 부러운 게 있다면 가만히 있어도 종족이 점점 늘어난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에겐 개체를 늘릴 수단이 없으니까.]
로드는 잠시 침묵했다. 그 순간 장내의 기류가 바뀌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족들 하나하나를 각별하게 생각했다.]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자들은 순간적으로 주저앉을 뻔했다. 몇몇 이들은 갑자기 느껴지는 거센 압박감에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켁켁거렸다.
[요 몇 년 사이 동족들이 연이여 영멸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열 명에 가까운 동족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단 말이다. 과거를 거슬러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지.]
“제, 제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당신들과 서클의 싸움엔 그 어떤 개입도…….”
[안 했지. 너희들이 수백 년간 중립을 유지했다는 것쯤 알고 있다. 오늘 내가 온 건 그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그, 그게 무슨.”
[아직 모르겠나? 너희들이 중립을 고수하는 자세에 변화를 주기 위해 여기 왔다는 것을.]
발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중립에 변화. 그게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지금 로드는 발리아에게 충성을 바칠 걸 요구하고 있다.
발리아 개인이 아닌 황실 전체. 나아가 카스트카우 제국의 충성을.
“나를 죽여도 그럴 수는 없소.”
발리아가 부릅뜬 눈으로 로드를 보았다.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은 것만으로 박수갈채를 받아 마땅할 일이었다.
그러나 로드는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게 나올 것 같더군.]
로드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
발리아 황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았고, 얼굴에 끈적한 감촉까지 느껴졌지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의 머리가 받아들이길 거부한 것일지도 모른다.
발리아는 멍청히 눈을 깜박였고, 그게 신호인 것처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 꺄아악!”
“이, 이럴 수가……. 제니아가!”
그의 두 번째 딸. 제2황녀인 제니아가, 터졌다.
문자 그대로였다. 갑자기 그녀의 몸이 폭발했다. 혈육이 사방으로 튀었고, 핏물이 금실이 수놓아진 붉은 카펫을 적셨다. 그 끔찍한 참상에 몇몇 이들은 헛구역질했다.
“아, 아아…….”
그제야 발리아는 로드가 자신들의 가족을 데리고 온 이유를 깨달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광경을 보고 로드가 의아해했다.
[그토록 슬프냐? 신기하군. 고작해야 수십 년의 인연이 아닌가.]
“아, 아아……. 어찌 이리 끔찍한 짓을…….”
[끔찍한 짓? 재밌군. 이게 끔찍한 짓이라…….]
조용히 읊조리던 로드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여전히 없다.
그러나 황제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럼 너희들이 한 짓은?]
“…무, 무슨 소리를.”
[고작 그게 끔찍한 짓이라면, 수천, 수만 년을 함께한 내 동족들을 죽인 네놈들은 대체 뭐냔 말이다.]
로드의 목소리에 점점 분노가 실렸다. 그의 입이 드러나며, 거칠게 이를 갈았다.
[지금 내 심정이 어떨지, 네놈은 짐작조차 하지 못할 테지.]
“커, 커헉…….”
눈물을 흘리지도 못했다. 로드가 살기를 폭사시키자 발리아는 숨을 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리고 한계 직전에, 로드는 살기를 거두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는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손가락을 들어 나머지 친족들을 가리켰다.
[자. 제국의 황제여, 다시 한 번 선택지를 줄 테니, 이번에는 신중히 대답해라. 어쩌겠나?]
* * *
프레이는 자신의 왼팔을 지혈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게 영 거슬렸다.
우웅.
마나를 통해 간단한 지혈을 마친 뒤, 완전히 꺾인 뼈를 억지로 비틀어 원래 모양으로 맞추었다.
우드득.
“…….”
정신이 번쩍 들 만한 고통이 동반되었다. 맨정신으로 할 만한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가만히 놔뒀다가 아예 뼈가 잘못 굳으면 몇 배는 귀찮아진다.
그 다음 아공간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냈다. 혹시 몰라 상비해 둔 포션이지만, 이런 중상을 치료할 효력은 없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까 싶어 반은 상처에 뿌리고, 나머지 반은 마셨다.
통증이 조금 줄어든 것 같다. 프레이는 자신의 팔을 보았다. 팔뚝 부분이 덜렁거리는 모습이 흉측하다. 조금만 상처가 깊었어도 아예 왼팔을 잃었을 것이다.
‘데미갓 하나를 토벌한 대가로는 무척이나 싼 편이지.’
냉정히 말해서 왼팔을 아예 잃었어도 남는 장사였을 것이다. 애초에 마법사인 프레이에게 있어 외팔이 되는 건 그리 큰 손해가 아니니까.
프레이는 힐끗 밀레드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결정을 회수하기 위해서다.
그의 시체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 있었다. 리키가 죽었을 때와 흡사하다. 그 속에 묻혀 있는 결정을 꺼냈다.
밀레드의 결정은 모래 빛을 띠고 있었다. 프레이는 아직도 데미갓의 결정을 어떻게 해야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지 모른다.
‘슈하이저, 아니면 엘리아한테 물어볼까.’
리키의 결정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도 언젠가는 써야 된다.
콱.
“음?”
프레이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결정이 손바닥에 박혀들었다. 프레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움직인 건 결정이다. 마치 살갗을 파고드는 벌레처럼, 프레이의 손바닥에 몸을 우겨넣은 것이다.
“……!”
그리고 결정으로부터 신력이 밀려왔다. 프레이는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했다.
신력끼리 이끌렸다. 밀레드의 결정이 프레이의 몸속에 있는 신력과 합쳐지려는 것이다.
쿠르르.
프레이는 온전히 서 있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우악스럽게 밀려오는 신력은 프레이의 정신을 그대로 쓸어버리려는 듯, 거침없이 밀려왔다.
‘대체 무슨…….’
지난번에 결정을 만졌을 때는 아무 이상도 없었는데, 왜 지금에 와서?
그때와 지금 뭐가 달라졌지?
짚이는 건 하나다.
‘마나와 신력의 융화……?’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점점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밀레드와의 혈투에서 앱솔루트를 너무 많이 사용했다. 정신력의 소모가 극심한 상황이라 의식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위험하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실키드는 적지고, 이 장소는 특히나 안전하지 않다. 무방비 상태로 쓰러져 있는 건 자신을 죽이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프레이는 폭주하는 신력을 필사적으로 다스렸다. 워프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마나는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날뛰는 신력을 억지로 진정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의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을 때, 신력은 어느 정도 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정신력이 한계였다.
“큭…….”
짧은 침음과 함께 프레이의 무릎이 허물어졌다.
희미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려 발버둥 쳤지만 역부족이다.
풀썩.
프레이는 결국 정신을 잃고 모래바닥에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휘이잉.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프레이가 기절한 장소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의 시선에 기절한 프레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
남자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고심하는 듯한 기색이엇다.
한참이나 서 있던 남자가 프레이에게 다가갔다.
그런 다음 그대로 둘러메더니,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