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증명 (3)
“엄살은 집어치워라.”
“뭐……?”
“지금 보인 게 네 힘의 전부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
프레이가 아무리 강해졌어도 데미갓을 상대로 이토록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쥘 수는 없다. 밀레드는 아직 힘을 감추고 있다.
아니, 감추었다기보다는 본신을 드러내는 걸 꺼리고 있다.
딱히 놀랄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데미갓이 그렇다. 필멸자를 상대로 전력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굴욕으로 여긴다.
밀레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사라지고 격렬한 분노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래. 로드 말대로군. 네놈들을 더 이상 만만하게 봐선 안 되겠어.”
“로드가 뭐라고 말했나?”
“너희들을 적대자로 인정하라더군.”
밀레드가 이를 으득 갈며 내뱉었다.
[나는 인간을 비롯한 이종족들을 우리의 ‘적대자’로 인정하고, 이제부터 전력으로 그들과 맞서겠다.]
로드의 충격적인 선언은 머지않아 모든 데미갓에게 닿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들이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밀레드 또한 그랬다.
적대자라니? 인간 따위가? 드래곤이 대륙에서 모습을 감춘 이후, 데미갓과 자웅을 겨룰 만한 존재가 한 번이라도 있었나?
아니. 없었다. 밀레드는 단언할 수 있었다.
십만 명에 하나, 혹은 백만 명에 하나의 재능을 가진 인간이 완전한 개화를 이뤄 내도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벌레가 허물을 벗었다고 위협을 느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이젠 납득이 갔다. 만약 이 남자 정도의 인간이 수십 명 정도 있다면, 데미갓은 위협을 느껴야 한다.
“네놈을 나의 적대자로 인정하겠다.”
팟.
밀레드의 신형이 사라졌다.
프레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공간이동.’
도망친 건 아니다. 녀석의 이동 범위는 여타 시공간이동을 사용할 수 있는 아포칼립스들보다 훨씬 짧을 테니까.
단순히 거리를 벌린 것이다. 태세를 정비할 셈인가?
‘그렇다면 추적.’
프레이가 워프를 사용하려던 순간이다.
후방에서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건 이미 지척까지 접근해 있었다.
‘빠르…….’
프레이는 억지로 몸을 비틀며 느꼈다. 이건 완전히 못 피한다.
우드득.
여태까지와 다르다. 배리어가 유리창처럼 박살 나며 왼팔에 화끈한 고통이 느껴졌다. 제대로 맞은 건 아니다. 스쳤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만으로 팔 전체가 기괴하게 꺾이며,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프레이는 왼팔을 부여잡았다. 팔이 날아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리 생각해야 되나?
‘속도와 위력 모두 올라갔다. 여태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분명 거리가 멀어졌는데 속도와 위력은 오히려 오르다니. 가속도라도 붙은 건가? 확신할 수는 없다.
아니. 확신하지 마라.
상대는 데미갓이다. 어떤 기괴한 수법을 써도 이상할 건 없다. 프레이는 더욱 마음을 차갑게 만들었다.
‘뒤에서 날아왔지만.’
지금도 그곳에 밀레드가 있을 거라 단정 지을 순 없다. 놈은 시공간이동을 사용할 수 있다. 프레이의 주변을 사방팔방 누비는 것쯤 일도 아닐 것이다.
프레이는 오른 주먹을 꾹 쥐었다.
‘아마도 이게 밀레드의 진짜 전투 방식이겠지.’
초장거리에서 행해지는 일격필살의 저격.
여태껏 사용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이건 정면 승부와는 거리가 멀다. 반항하는 자를 압도적인 힘으로 짓밟는 걸 즐기는 데미갓에겐 굴욕적인 전투 수단일 것이다.
사냥꾼의 방식. 평소 하찮게 여기는 필멸자에게 사용하기엔 과분하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밀레드의 자존심은 걸레짝이 되었을 것이다.
‘어떡한다.’
밀레드의 위치를 찾아야 된다. 하지만 실키드 전역을 뒤덮은 신력 때문에 추적이 원활하지 않다.
어딜 가든 놈들의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떻게 밀레드의 위치를 특정하겠는가.
‘…지하 계단 때처럼 가까이 접근하면 몰라도.’
그 순간 프레이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어떻게 밀레드의 존재를 느꼈던 거지?
프레이는 지하 계단에 서있을 때, 문 너머에 데미갓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곳을 뒤덮은 농밀한 신력으로 그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깊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한 감별이 4,000년 전에는 불가능했다. 제아무리 가깝게 접근해도 알 수 없었다.
현재와 과거. 가장 달라진 건 무엇인가?
‘신력.’
그래. 지금의 프레이는 신력을 사용할 수 있다. 마나와 상극되는 그 힘이 어떤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다.
신력은 폭발적인 성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용할수록 감당이 되지 않을 속도로 위력이 증대했다. 그러나 프레이는 리키가 죽은 이후에 인드라의 뇌전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자각하고 있다. 꺼려졌던 것이다. 마도를 걷는 자신이 그와 상반된 힘을 다룬다는 사실이. 증오해 마지않는 적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이.
9성을 이룬 다음엔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이 싸움에선 마법만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그리 만만한 마음가짐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적이란 걸 왼팔의 고통이 말해 주고 있었다.
츠즈즛.
프레이의 몸에서 뇌전이 꿈틀거렸다.
밀레드를 추살할 단서는 그의 몸속에 있었다.
* * *
밀레드는 밀려오는 치욕의 파도에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굴욕적이다……!’
로드의 선언이 없었다면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 따위에게 전력을 다하진 않았을 것이다. 데미갓의 우두머리인 그가 먼저 인간을 적대자로 인정했다. 때문에 저항감은 들었으나 이 싸움 방식을 채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자존심에 금이 가지 않은 건 아니다.
굴욕은 곧 살심이 되었다. 밀레드의 눈에 흉흉한 살기가 흘러넘쳤다.
‘저놈만, 저놈만 죽이면 된다.’
그럼 대륙에서 자신의 굴욕을 기억하는 이는 모두 사라진다. 물론 쉽게 죽일 생각은 없다. 이쪽의 전력을 끌어낸 만큼, 되도록 처참하게.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정도로 잔인하게 도륙 내리라.
그리하여 감히 신을 내려다본 걸 철저히 후회하게 만들 것이다!
끼릭.
밀레드가 다시 한 번 시위를 당겼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화살은 크게 세 종류다.
하나는 신력으로 뭉친 에너지 탄. 형상이 없기 때문에 어중이떠중이를 상대하기 가장 제격이다.
그러나 프레이를 상대하기 적합하지 않다. 놈이 가진 냉정함, 명경지수.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차가움은 비정상적일 정도다.
방금도 그렇다. 팔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전조도 없이 느꼈는데도 눈썹 한 번 꿈틀거린 게 전부다.
다른 하나는 화살이다. 물론 평범한 화살은 아니다. 이건 ‘드라이트리’라는 특수한 목재로 만든 화살로, 신력을 가장 잘 받아들이는 재료 중 하나다. 밀레드가 이 화살을 사용하면 겹겹이 쌓인 성벽을 가루로 만드는 것도 일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것 또한 드라이트리로 만든 목재였으나, 앞의 것보다 길었다. 거기에 화살에 특수한 문양文樣을 새겨 놨다. 밀레드가 직접 그린 것이다. 이 문양 덕분에 장거리에서 쏠수록 위력과 속도가 가파르게 상승한다.
‘놈과 나의 거리는 약 10km.’
지금 밀레드가 쏘는 화살은 산의 형상조차 무너뜨릴 수 있으며, 속도 또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눈치챘을 땐 이미 화살에 닿은 직후일 것이다.
콰과과과!
다시 한 번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모래대지조차 자신의 몸이 할퀴어진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이변을 느낀 건 다음 시위를 당기려는 순간이었다.
‘……?’
갑자기 프레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놈의 마나가 자취를 감췄다.
밀레드는 시위를 당긴 채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여태껏 손에 잡힐 듯 뚜렷하던 마나의 잔향이 사라졌다.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었고, 그게 전부도 아니었다.
쿠르릉!
갑자기 천둥이 쳤다. 밀레드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조차 아니다. 밤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시린 달빛만이 고요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꽈르릉!
다시 한 번 내리친다. 이번엔 아까부터 훨씬 크고, 사나웠다.
밀레드의 시야 끝에 검은색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 순간 그는 말문을 잊었다.
“…인드라?”
이건 인드라의 뇌전인데? 찰나의 머뭇거림이 빈틈을 만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밀레드는 목전까지 들이닥친 검붉은 빛을 보았다.
‘앱솔루트!’
몸을 비틀어 억지로 피하려고 했으나, 광선은 결국 오른팔을 스쳤다. 화끈거리는 고통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쪽이냐……!”
밀레드가 안력을 돋으며 빛이 날아온 곳을 보았다. 희미하게 존재감을 드러낸 마나가 다시 한 번 훅 사라졌다. 대신 천둥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를 악무는 순간, 반대 방향에서 다시 한 번 광선이 날아왔다. 이번엔 피하지 못했다. 왼쪽 허벅지가 그대로 꿰뚫렸다.
“끄윽……!”
순간적으로 주저앉을 뻔했다. 이딴 바람구멍, 원래라면 1초 만에 재생시킬 수 있다. 하지만 녀석이 사용하는 힘은 앱솔루트다. 공간을 찢어발기는 이 힘은 밀레드의 세포가 서로 결합하는 걸 막고 있다.
치유력 감소. 뿐만 아니다. 거리를 벌리기 전에도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그로 인해 전신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고통.
밀레드가, 아니. 데미갓이라면 일찍이 겪을 일이 별로 없는 감각이다. 평소라면 지금보단 원활하게 대처했겠으나, 밀레드는 현재진행형으로 냉정함을 잃고 있다.
게다가 지금 놈이 선보이는 방식은 방금 전까지 밀레드가 선보인 싸움이었다. 모습을 숨긴 채, 장거리에서 행해지는 위협적인 저격. 자신을 엿 먹이기 위해 같은 방식을 취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도무지 냉정할 수가 없었다.
파앗.
시공간이동을 사용했다. 이곳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공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직후에 밀레드가 숨을 들이켰다. 눈앞에 검붉은 빛이 보였다.
“……!!”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운이 좋았다.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도는 들지 않는다. 오히려 치밀어 오른 분노 때문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어떻게 내 위치를 찾는 거지?’
모르겠다.
갑자기 모습을 감추더니, 인드라의 뇌전을 사용하고, 이제는 자신의 위치까지 정확히 특정한다.
신력을 다룰 수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
그 순간 밀레드는 냉수가 확 끼얹어진 느낌이 들었다.
신력을 다룰 수 있는 인간?
“프레이 블레이크?”
레이린의 실험체로, 마나와 신력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남자다. 심지어 얼굴에 뒤집어쓴 가면은 어포슬들의 정체를 숨겨 주기 위해 헥터가 만든 것이 아닌가!
헥터가 행방불명됐다는 소문은 들었다. 놈이 있던 잡화점에는 로드가 만든 결계가 파훼되어 있었다. 그걸 파훼할 존재는 마법사 중에서도 정점에 이른 9성밖에 없다. 뻔하다. 헥터를 데려간 것도 이 남자가 소행이었던 것이다.
‘아그니에게 알려야-’
밀레드는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다. 갑자기 암전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사고가 뚝 끊겨 버렸다.
츠즛.
앱솔루트 라인이 밀레드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가 완전히 관통당할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밀레드의 몸뚱이가 차가운 사막에 털썩 쓰러졌다.
“…….”
프레이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데미갓을 단신으로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
원래라면 참을 수 없는 전율이 등골을 타고 질주했을 것이다. 과거 9성을 이루었을 때처럼, 혹은 그 이상의 성취감이 가슴을 채웠을 것이다.
그 정도의 업적이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통틀어도 홀로 데미갓을 죽인 자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일 테니까.
그러나 지금 프레이의 머릿속을 채운 건 의문이었다.
프레이는 앱솔루트를 사용한 직후 곧바로 신력을 사용했다. 옛날에 들었던 리키의 조언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마법을 사용하면 잔향이 남고, 로드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신력을 연달아 사용해 흔적을 지워야 된다.
그때는 2개월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 마나의 잔향을 없앴지만, 지금은 그 정도 여유가 없었다. 그냥 덧씌운다는 느낌으로 신력을 사용했다.
제대로 먹힐지 반신반의했으나 효과는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다. 장거리에서 프레이의 위치를 특정하여 저격하던 밀레드가 오히려 같은 방법으로 프레이에게 사냥당했고, 싱거운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프레이의 위치를 알지 못했다. 아마 헥터가 만든 가면의 덕도 있었을 것이다.
프레이는 불신이 담긴 눈빛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마지막에 사용한 앱솔루트 라인.’
잘못 본 게 아니다.
그 검붉은 빛엔, 인드라의 뇌전이 묻어나 있었다.
같이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마치 자석처럼, 순간적으로 신력과 마나가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그래. 자석.’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상극에 위치한 힘이 서로 이끌렸다는 힘이 특히 그랬다.
게다가 위력은 또 어떤가. 기존의 앱솔루트를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신력이 더해져서? 밀레드는 머리에 구멍이 나는 순간까지 앱솔루트 라인을 깨닫지 못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앱솔루트 라인을 쓰고, 인드라의 뇌전을 쓴다. 그 두 가지 작업을 반복하던 순간 어느새 몸속에 있던 마나와 신력이 부드럽게 융화되었다.
자신의 육체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믿기지 않았다. 그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마나와 신력.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두 힘이 합쳐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