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실키드 (6)
우선은 정보를 더 모아야 한다.
이번 싸움의 핵심은 역시 정보였다.
실키드에 몇이나 되는 데미갓이 있는지, 그들이 사용하는 권능은 무엇인지, 아그니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있는지, 닉스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지.
알아야 될 것들은 많았지만, 하나같이 쉽게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무슨 권능을 쓰는지만 알아도 큰 도움이 될 텐데.’
약점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과거 리키는 히드라의 약점이 불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한 마디 덕분에 프레이는 8성의 마법으로 데미갓을 죽일 수 있었다.
리키가 거의 죽여 놓은 걸 숨통만 끊은 거긴 하지만, 데미갓 하나를 끝장낼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호전사라고 했었나?’
실질적인 도시의 지배자적인 존재.
우르하는 그게 영주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말했다. 그자라면 데미갓에 대해 다른 이들보단 자세히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알-타르하가 굴복한 것도 수호전사의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 르네아도 사르만의 결정으로 굴복할 뻔하지 않았는가?
판단을 마친 프레이는 알-타르하에 있는 술집으로 갔다. 이 도시는 무법지대가 되었지만 아직 완전한 끝으로 치달은 건 아니다. 정상적으로 영업하는 술집 또한 몇 군데 있는 것 같았다. 이 아슬아슬한 질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방금처럼 위병 하나를 잡아 정보를 뽑아내는 것도 괜찮지만 전체적인 윤곽이나 흐름을 보려면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술집은 정보를 모으기 가장 용이한 장소다.
끼익.
허름한 문을 열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한낮인데도 술집은 북적했다. 다만 특유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없고, 조용히 술잔을 기울거나 낮은 소곤거림만 들렸다.
문이 열리자 잠시 프레이 쪽으로 시선이 향했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곧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프레이의 변장이 잘 먹혀들었다는 증거였다.
프레이는 적당한 자리에 앉아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킨 채 다른 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르네아 얘기는 들었어?”
“사막이 얼어붙었다는 헛소문? 너, 설마 그걸 믿는 거냐?”
“헛소문이 아니라는데. 루켈 녀석이 두 눈으로 봤다더라고.”
“흥. 이 동네에서 신기루 좀 본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건 그래.”
르네아에서 프레이가 벌인 일은 제법 넓게 퍼진 모양이다. 알-타르하에 있는 전사들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정도면 데미갓의 귀에도 확실히 들어갔겠어.’
다만 실제로 믿는 이는 몇 없어 보였다.
사막의 대지가 얼어붙었다. 단순히 단어의 나열만으로도 불신감이 들었다. 아마 실키드에 오래 살았던 전사일수록 저 소문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데미갓은 더 경계할 거고.’
신기루로 눈을 속일 수는 있어도, 크리쳐를 전멸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9성에 이른 마법사라면 사막을 얼리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단 걸 알고 있을 테니까.
“그것보다 우린 이제 어떡하면 좋냐?”
“이미 한배를 탔는데 어쩌긴 뭘 어째. 죽든 살든 앞으로는 밀레드를 따라야지.”
“난 그놈 마음에 안 들어. 수호전사는 포르토 님인데 왜 놈이 대장 행세를 하는 거지?”
“별수 있나. 탈하둔을 불태운 괴물이 그놈을 마음에 들어 하잖아.”
프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수호전사인 포르토가 아닌, 밀레드라는 자가 이 도시를 쥐락펴락하는 건가? 게다가 아그니의 마음에 들었다는 건 중요한 정보다.
아그니의 어포슬은 아닐 것이다. 닉스가 있으니까.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끄나풀.
혹은.
‘다른 데미갓의 어포슬.’
그런 가능성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프레이는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무작정 결론짓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그냥 우리도 이반한테 붙을까?”
“그 대전사라는 놈? 관둬라. 제아무리 강해도 인간일 뿐이라고.”
“우린 줄을 잘 섰어. 난 탈하둔이 지도에서 사라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봤다고. 놈들과 싸우는 건 자살행위야. 난…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
실키드.
전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모양이지만, 이곳에 있는 자들 모두가 긍지 높고 명예로운 전사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적어도 이 술집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걸 선택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선택에 확신을 하지 못한 채 불안에 떨고 있다. 그리고 그 불안을 잊기 위해 술을 찾는 것이다.
자존심을 버린 채 목숨을 부지하는 것. 탓할 생각은 없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니까. 하지만 역겨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프레이는 요깃거리로 배를 채우며 삼십 분 정도 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얻어 낸 정보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알-타르하도 처음부터 굴복하려던 건 아니다.
나름대로 부대를 형성해 투쟁했지만, 싸움조차 성립되지 못한 채 전멸한 듯하다.
그리고 나타난 밀레드란 남자가 수호전사인 포르토와 함께 알-타르하를 이끌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이 정도인가.’
계속 죽치고 앉아 있어도 더 건질 건 없을 것이다. 프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 중간에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
정보대로라면 저 성에 밀레드가 있다.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밀레드다.’
프레이는 그에 대해서 떠올렸다.
남성, 30대 초반, 사막에선 보기 힘든 흰색 피부를 가졌다고 하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성으로 향하려는데, 무언가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이 보였다. 프레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
시체였다.
사지가 잘린 시체들이 뾰족한 창에 꽂인 채 광장에 보란 듯이 전시되어 있었다. 제법 방치되었는지 시체엔 썩은 내가 진동하고 구더기가 들끓었다. 구토가 나올 만큼 역겨운 광경이다.
앞에 꽂힌 팻말엔 한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숙청]
프레이는 혀를 찼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구경꾼들 중, 그나마 인상이 좋은 자들에게 가서 말했다.
“저들은 누굽니까?”
“응? 넌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됐냐?”
털북숭이 남자가 살짝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프레이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어제 골로드에서 왔습니다.”
“아. 그런가.”
골로드는 데미갓에게 멸망당한 도시 중 하나다. 그때 도시를 떠나 있었거나, 간신히 목숨만 건진 자들. 그런 자들은 대부분 가장 가까이 있는 이 도시, 알-타르하로 향했다… 라는 얘기를 방금 술집에서 들었다.
남자의 얼굴에 있던 의심이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밀레드에게 반항했던 자들이다.”
“반항이라면?”
“그가 토벌대를 형성하는 데 반발했다가 저 꼴이 난 거지. 쯧쯔. 가만히 있었으면 목숨은 건졌을 텐데.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누구를 잡기 위한 토벌대입니까?”
“대전사 이반. 너도 들어는 봤겠지? 최근 실키드 사막을 떠돌며 세력을 모으고 남자. 지금 실키드를 삼킨 괴물은 놈들이 눈엣가시인 듯해.”
“…….”
프레이는 말문을 잊고 말았다.
이 남자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실키드를 구하기 위해 세력을 모으는 이반을 잡기 위해 토벌대를 형성하려 했고, 그것에 반발하던 자들을 무참히 처형했다고.
‘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건 도를 넘었다. 자존심만이 아닌,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관을 팔아넘긴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프레이의 가슴에 있던 저울추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작게 심호흡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토벌대 따위로 이반의 세력을 와해시킬 수는 없을 텐데.’
밀키드도 그건 인지하고 있을 거다.
그럼 놈이 노리는 건 뭘까?
토벌대가 전멸할지라도 이반의 세력이 손실을 입히고 싶어 하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반란 분자들을 처형하기 위해서?
‘아니.’
이건 모두 부가적인 이득이다.
밀레드가 노리고 있는 건… 아마 내전內戰이 아닐까.
프레이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양자의 적대감을 형성시켜서, 최종적으로는 같은 나라 사람끼리 칼끝을 향하게 만들 생각이다.
1단계는 성공했다. 실키드는 이미 두 세력으로 나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2단계. 두 세력 간의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드는 것. 서로를 철천지원수로 여길 만큼.
‘좋지 않아.’
이 음험한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실키드는 겉이 아닌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간다. 데미갓은 털끝만큼의 손해도 입지 않은 채 강국의 반열에 드는 한 나라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다. 단순히 국토를 잃는 게 아니다.
실키드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던 정체성마저 사라진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멸망보다 훨씬 끔찍한 최후였다.
‘이건 데미갓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계획인데.’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런 계획을 짤 수가 없다.
프레이는 성을 바라보았다.
밀레드. 그를 만나고,
경우에 따라선 죽여야 될 것이다.
* * *
[요즘 부쩍 바빠 보이는군.]
이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로드가 기척도 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리스 또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움직이는 데 자신이 있었으나, 로드는 격이 다르다. 그건 그의 어포슬이 되어 공간을 다루는 권능을 나누어 받은 지금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어딜 갔다 왔나?]
“실키드.”
[그곳은 왜?]
추궁하는 말투다.
이리스는 흔히 있는 일이라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그니가 열 명이나 되는 데미갓을 불렀던데요. 조금 과한 대처가 아닌가 싶어서 한번 보고 왔죠. 무언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니.”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리키의 배신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그 일 이후 로드의 면전에서 리키를 언급하는 건 같은 데미갓조차 쉽게 입에 담지 못했다. 로드의 역린을 자극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드는 의외로 담담히 말했다.
[그런가.]
“…….”
[나는 오늘 카스트카우 제국에 갈 생각이다.]
“그곳을 지울 생각인가요?”
[그건 그들의 선택에 달렸지.]
나른한 목소리였다. 이리스는 감흥 없는 얼굴로 말했다.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요? 그럼 그만 가도…….”
[네가 살린 그 남자. 프레이 블레이크라고 했던가.]
“…….”
그 말에 처음으로 이리스의 평정심이 깨졌다.
로드 또한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 것이다. 마치 이리스의 반응을 즐기는 것처럼.
[네가 그 남자를 살린 이유에 대해선 묻지 않겠다. 그런 조건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음에 만났을 때, 나는 그를 죽일 것이다. 일전에 선언한 것처럼, 아주 고통스럽게. 그때 죽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겠다.]
이리스는 로드의 의중을 알아챘다.
이건 경고였다. 아마 다음에도 로드를 막는다면, 이리스도 무사하진 못하리라.
훅.
로드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마 말했던 대로 카스트카우로 떠난 거겠지.
“…….”
홀로 남은 이리스는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으나, 필사적으로 버텨 냈다. 그녀는 벽에 툭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쉬고 싶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까.
그러나 곧 고개를 젓는다.
휴식은 그녀에게 있어 사치다.
4,000년 전부터 그랬다.
* * *
남자는 눈을 떴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여기는…….”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풀 한 포기조차 쉽게 찾을 수 없는 황폐한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삭막한 풍경이었으나, 남자는 알 수 없는 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움.’
또한 기쁘고, 동시에 슬펐다. 통일되지 않은 감정이 저들끼리 섞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거지.
남자는 머리가 아팠다. 그것보다 자신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겠다.
이 사막은 불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