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아나스타샤 (3)
아나스타샤는 넋이 나간 듯,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귀한 광경이 펼쳐졌다. 헥터가 송구스러운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이다. 여태껏 지극히 마이페이스적인 면모만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맥을 못 추는 반응이 되려 신선하다.
“죄, 죄송합니다.”
“…….”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진짜로.”
“…….”
“저, 저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로도 울적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내 잘못도 있소.”
“음?”
“아나스타샤는 원래 남성의 이름이오.”
프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나? 어감은 부드러운 게 꼭 여자 이름 같은데.”
“고대 동부 지방에선 남자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했다오. 대현자의 출신지도 그쪽이지. 난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골렘에는 성별이 없는 게 일반적이라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그리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설마 슈하이저의 혼이 잠들어 있을 줄은…….”
“…혼은 없어.”
아나스타샤가 대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으나, 반쯤 체념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그게 무슨?”
“나한테 슈하이저의 혼은 없다고.”
방금 전보다 훨씬 또렷한 목소리다. 프레이의 표정이 바뀌었다.
카이로도 의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전에 당신은 자신이 슈하이저 스트로우라고 말하지 않았소?”
“그래.”
“그런데 혼이 없다니?”
“당연한 일이지. 혼을 옮기는 건 연금술의 분야가 아니잖아.”
[계약자.]
디아블로가 안광을 일렁이며 말했다.
[계약자의 분야지.]
“그래. 저 리치는 영리하군.”
[…….]
“물론 대부분의 계약자는 꿈도 못 꿀 정도로 고등 기술이지. 내가 아는 계약자 중에서도 그 정도 능력이 되는 건 한 명뿐이었는데…….”
잠시 침묵하던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녀랑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서. 부탁할 엄두가 안 나더군.”
프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대현자와 검은 마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었나 보군.”
“그런 거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건가? 부끄러운 일인데.”
아나스타샤가 쓰게 웃었다.
“게다가 혼을 핵에 옮기면 본래 내 육체는 죽어 버리니까.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에 그냥 기억과 인격을 복사해서 핵에 집어넣은 거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기억과 인격을 복사하다니? 프레이는 연금술에 대해선 무지하지만, 그 작업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에 대해선 주변 인물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게… 가능한 거요?”
카이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신반의했지만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걸 보니 도박은 성공한 것 같군. 그대들의 연금술에도 찬사를 보내지. 내 핵을 소화할 정도의 육체를 만드는 게 힘든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리고 자신의 몸을 둘러보다가 다시 울적한 얼굴이 된다.
“이런 꼴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인간형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계산 외야…….”
“크흠. 흠.”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확실히 그런 점은 슈하이저다웠다.
“그러고 보니 그대들의 이름도 묻지 않았군.”
“아. 시, 실례했소. 만나 뵙게 영광이오. 본인은 카이로 위르세만이라고 하오.”
“…위르세만?”
“알고 있소?”
“으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프레이는 위화감을 느꼈다.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카이로는 위르세만이라는 성이 슈하이저의 진짜 성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지금도 조상을 보았다는 자각은 없는 것 같고.’
그럼 단순히 위르세만이란 성이 겹친 건가?
그것도 아니면…….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아나스타샤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핵을 찾은 사람은 누구지?”
그 말에 좌중의 시선이 프레이에게 향했다.
아나스타샤 또한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프레이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본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놓치지 않을 거라 말하는 것처럼.
“…….”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알고 있다.
아나스타샤의 핵이 있었던 장소는 슈하이저의 던전 마지막 방이다. 그리고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해선 슈하이저가 남긴 환영이 묻는 마지막 질문에 대답해야 된다.
슈하이저의 진짜 이름.
그걸 알고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거다. 그의 오랜 후예인 카이로도 모르는 걸 보면, 어쩌면 정말로 프레이 이외엔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잠깐 그와 둘이서 얘기하고 싶다.”
“그건…….”
카이로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프레이는 조용히 눈짓했다.
그는 침음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헥터와 디아블로도 자리에서 나갔다.
탁.
문이 닫혔다.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아마 대륙 역사를 통틀어도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의 친우와 4,000년 만에 재회했지만 그때와 다른 이름,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니.
프레이와 아나스타샤는 한동안 서로를 마주보았다.
루카스와, 슈하이저가 아니다. 프레이와 아나스타샤였다.
프레이는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자각했다.
“이름은?”
“프레이 블레이크.”
“…….”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무언가 할 말이 많아보였다. 그러나 프레이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했다.
“예전과 같은 이름을 쓸 수는 없지. 너도 당분간은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을 쓰는 게 좋을 거야.”
“뭐……?”
“현대에서 우리들의 소문은 생각 이상으로 부풀려진 것 같으니까.”
“…너.”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또륵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돌아온 거냐……?”
“4,000년이나 걸렸다.”
그 순간 아나스타샤가 한 달음에 달려와 프레이를 덜컥 안았다.
프레이는 마주 포옹해 주었다. 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분명 친구를 안는 건데, 뭐란 말인가. 이 말랑한 느낌은.
“너 이 자식, 늦어도 너무 늦었어.”
“빠져나온 것만 해도 대단한 건데. 너였으면 4,000년 더 걸렸을걸.”
“그게 할 말이냐? 윽. 제길. 제대로 안기도 힘드네. 대체 뭐야. 이 몸뚱이는? 너, 이런 꼬맹이가 취향이었냐? 그 수많은 대시를 받아넘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 이거였어?”
“불가항력이었어. 그런데 꼭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시커먼 남정네랑 포옹하는 것보단 나은 느낌이야.”
그러자 아나스타샤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농담이 나오냐?”
“크크.”
프레이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렇게 기분 좋게 웃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 * *
짧은 회포를 풀었다.
낯선 기분이었다.
둘 모두 과거와는 다른 모습,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로가 둘도 없는 친구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얘기를 나눌수록 확신이 들었다. 이 녀석은 자신의 친구라는 확신이.
둘은 조용한 목소리로 끝없이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침묵했다.
할 얘기가 떨어진 게 아니다. 무려 4,000년 만의 재회다. 한 달을 떠들어도 부족할 정도다.
그래서 자중했다. 얘기가 끝이 없을 테니까.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 갈 화제가 있었다.
“흐루히랄을 통해 대지의 기억을 보았다. 이리스가 너를 죽이는 것을.”
“…역시. 나는 이리스에게 죽은 건가.”
그 말에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역시?”
“내 기억은 ‘내’가 이리스를 만나러 가기 전까지니까.”
“…그런가.”
말투를 보니 이리스에게 죽임당할 것을 조금은 예상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수상하긴 해.”
“뭐가?”
“이리스가 우리를 배신한 것 말이다.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 하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어. 너도 알잖아.”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침묵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너를 죽이고, 카사진과 루시드를 이간질했어. 어떤 속사정이 있다고 해도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더 이상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닌 것 같군.”
아나스타샤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리스에게 직접 죽은 기억이 없으니 실감이 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런데 너는 나를 슈하이저로 생각해 주는 거냐?”
“무슨 뜻이지?”
“말했잖아. 나는 그의 인격과 기억을 복사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냉정히 말하면 슈하이저 본인이라고는 할 수 없단 말이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프레이는 그녀가 가진 고민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은 무척이나 특수하니까.
그래서 오히려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건 네가 고찰할 문제지.”
“어?”
“난 그것 말고도 생각할 문제가 산더미다. 머리는 너 혼자서 굴려라. 애초에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까.
프레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자 아나스타샤가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그걸로 된 거냐?”
“답을 얻으면 말해라. 네가 슈하이저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지. 내 고민은 그때부터니까.”
“…하하.”
아나스타샤가 얼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래. 넌 그런 놈이었지.”
“그것보다 네가 알아야 될 얘기가 많다. 최대한 짧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경청하지.”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지금 대륙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프레이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오늘도 훌륭했다, 대전사.”
오크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이반은 팔뚝에 대충 붕대를 감으며 투덜거렸다.
“대전사 아니라니까.”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포기해라. 너는 전사 중의 전사이며, 무리를 이끌 카리스마까지 갖추고 있다. 네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진작 전멸했을 거다. 괴물들에게.”
괴물이라.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하면 데미갓의 크리쳐다.
놈들은 강하고, 빠르고, 단단했다. 실키드의 웬만한 베테랑 전사도 쩔쩔맬 정도로 위험한 녀석들이었다.
크리쳐가 모습을 드러낸 건 탈하둔의 멸망이 기점이었다. 그 이후 실키드 전역에 출현한 녀석들은 곧 사방으로 뻗어나가 무차별적인 학살을 시작했다.
한 마리도 벅찬 괴물이 개미떼처럼 몰려다니니 그 어떤 도시도 크리쳐의 마수에서 안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이반은 실키드를 떠돌며 카사진의 무구를 찾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일단의 무리가 크리쳐에게 습격받는 걸 보았다. 아예 못 본 척할 수는 없어서 일단은 구해 줬는데, 그때 이후로 녀석들은 그를 ‘대전사’라고 부르더니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많이도 불어났군.’
처음엔 스무 명 안팎이었는데 지금은 벌써 백여 명에 이르는 대인원이 되었다. 식량을 구하는 것도 까다로웠지만, 가장 귀찮은 건 입소문이었다.
탈하둔이 자랑하는 핵심세력인 전사장들은 탈하둔의 멸망과 함께 대부분이 죽었다. 다행히 대족장을 비롯한 몇몇 전사장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그렇게 절망하던 실키드의 국민들에게 이반의 소문은 구세주의 현신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실키드 전역을 떠돌며, 강한 전사들을 모으고 있는 영웅! 그의 주먹은 마도무왕 카사진이 재림한 듯하다!
처음엔 빈약했던 소문이었지만 점차 살이 붙더니 이윽고 날개까지 돋아나 훨훨 날아갔다.
그렇게 되기까지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들은 이반을 ‘대전사’라고 불렀다.
물론 이반은 그 칭호를 현재진행형으로 질색하고 있었다.
‘썩을. 될 대로 되라.’
이반은 혀를 차며 생각했다.
그때 천막을 걷으며 켄타우로스 한 명이 들어왔다.
“대전사, 누가 당신을 찾아왔다.”
“뭔데. 또 소문 듣고 찾아온 전사 놈들이냐?”
“그건 아닌 것 같다. 찾아온 자는 전사로 보이지 않았다.”
귀찮은 느낌이 물씬 나는구만.
이반은 한숨을 쉬며 손을 휘적였다.
“일단 들어오라고 해.”
“알겠다.”
곧 천막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 어둡던 천막이 확 밝아지는 것 같았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화염을 빚은 듯한 머리카락은, 천막 내부를 은은히 밝히는 촛불보다 훨씬 강렬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전사는 아니군.’
비록 여성의 몸이라도 단련한 자라면 곧바로 티가 난다. 그의 스승만 해도 겉보기엔 영락없는 꼬맹이지만, 그 연약한 겉모습 밑엔 응축된 근육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여자는 전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너는 누구냐?”
“…토르쿤타라고 한다.”
별 이상한 이름을 다 들어 보는군.
“그래, 토르쿤타. 무슨 일로 왔지?”
“부탁할 게 있다.”
“뭔데?”
적발의 여자, 토르쿤타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죽여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