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긴급 회의 (1)
갑자기 집이 생겨났다.
프레이는 묘한 얼굴로 2층짜리 집을 바라보았다.
블레이크 가문에 비한다면 초라할 정도의 사이즈지만, 프레이 혼자 쓰기엔 과할 정도로 크다.
“아너 지젤란, 그러니까 이 집이 뭐라고?”
“라운더 프레이께서 앞으로 쓰시게 될 자택입니다.”
“못 보던 집인데…….”
“그야 완공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으니 당연하지요.”
지젤란이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프레이는 고개를 돌려 그를 살펴보았다.
트로우맨 링즈에 있는 세 명의 포스 아너 중 하나이자, 현재는 마검사의 길을 걷고 있는 지젤란. 허리춤에 매여 있는 ‘쿤그닐의 단검’이 유난히 돋보인다.
프레이의 시선을 눈치챈 지젤란이 단검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라운더 프레이께서 주신 단검은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친선전도 완승을 거두었다고 들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만으로 가능할 리가 없지.”
프레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애초에 마검사란 직종부터가 다른 직업보다 몇 배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기에 지젤란의 나이까지 고려하면 문자 그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해 왔음이 분명하다.
프레이는 지젤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대 같은 존재야말로 우리 서클의 보물이라 할 수 있겠지. 앞으로도 트로우맨 링즈를 위해 분발해다오.”
“……! 무, 물론입니다.”
지젤란은 갑자기 울컥하며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나이가 들다보니 예전보단 감성적이게 된 것 같다. 그야말로 늙은이의 주책이다. 지젤란은 헛기침을 하며 심정을 가다듬었다.
방금 프레이의 몇 마디 말로 충분하고도 남을 보상이 되었다. 지난 몇 개월간 겪은 피나는 노력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레이는 다시 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 혼자 쓰기엔 너무 커. 그냥 방 하나만 빌려주면 되는데.”
이건 진심이다.
딱히 공방이 필요하거나 집의 크기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프레이로선 명상이 가능할 정도의 방에, 약간 사치를 부리면 푹신한 침대만 있으면 만사형통인 것이다.
그러나 지젤란의 태도는 단호했다.
“안 됩니다. 서클 라운더가 평서클원의 집에 머물다니? 다른 서클이 안다면 비웃음 받는 걸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이건 트로우맨 링즈의 위상과도 연결된 일이니, 부디 서클 라운더로서의 품위를 유지해 주십시오.”
“…알겠어.”
저렇게까지 말하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지젤란이 묘한 얼굴로 말했다.
“혼자 쓰시는 것도 아닙니다.”
“……?”
그의 말을 이해한 건 자택에 들어간 순간이었다.
“오. 왔구나.”
거실에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건 스노우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옷도 실내에서나 입을 법한 얇은 차림새였다. 문자 그대로 ‘제집처럼 편하게’ 있는 모습에 위화감이 든다.
“본녀는 1층 오른쪽 세 번째 있는 방에 머물고 있다. 들어오기 전엔 반드시 노크하도록.”
“네가 왜 여기에…….”
“저희는 마스터의 손님이니까요.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 말한 건 스노우가 아닌 샤를이었다. 왠지 모르게 뚱한 얼굴로 스노우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무례한 여자는 대체 정체가 뭡니까?”
“말조심해라. 본녀는 엘프의 여왕이니라~”
스노우의 말에 샤를이 냉소를 지었다.
“아. 그러셔? 난 뱀파이어 퀸이다.”
“오호. 그건 몰랐구나. 그럼 같은 여왕끼리 친하게 지내는 게 어떠한가?”
“흥!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싸우지 마. 골 아프니까.
안 그래도 고민해야 될 일이 산더미다. 프레이는 여기 더 있으면 없던 두통이 생겨날 것 같아 위층으로 올라가려다,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샤를과 스노우. 둘 다 저렇게 보여도 백 년은 훌쩍 넘게 살아온 일족의 수장들이다. 같이 고민하다 보면, 혼자 머리 싸매는 것보다 괜찮은 계획이 나오지 않을까.
“상담이 있는데, 괜찮을까?”
“마침 한가하던 참이다. 얘기해 보거라.”
“저도 괜찮습니다.”
샤를은 스노우를 한 번 째려봤다. 보아하니 이 여자는 프레이의 진짜 정체를 모르는 것 같다. 알면 이딴 태도를 취할 수 없겠지.
무려 4,000년 전의 대마도사인 루카스 트로우맨에게, 이런 거만한 태도를 취할 여자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검은 마녀라면 몰라도.
샤를은 그녀에 대한 불쾌감을 꾹꾹 누르며 프레이의 얘기를 경청했다.
프레이는 요점만을 간추려 현재 상황을 설명했고, 몇 가지 선택지를 언급했다. 얘기가 모두 끝난 다음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샤를과 스노우를 바라보았다.
“…이게 우리 상황이다. 여기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너희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샤를은 트로우맨 링즈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스노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지만 얘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따분해하는 게 느껴졌다.
“흐음. 따분한 일이도다.”
“…….”
“그대 알아서 행동하거라. 웬만한 일은 본녀도 도움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는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낮잠이라도 자러 가 볼까.”
샤를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스노우를 보며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여자가 여왕이라니. 엘프족의 명운도 여기까지군요.”
“…….”
뱀파이어와 엘프가 원래 사이가 나빴었나? …확실히 우호적인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프레이는 웬만해선 스노우와 샤를을 대면시키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말씀하신 건에 대해선… 음. 우선은 추이를 지켜보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의 의견에 동의한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모인 구성원만으로 트로우맨 링즈의 부활을 보여 주는 데 무리는 없다.
스노우와 샤를, 노라. 지금 시점에서 협력을 약속받은 이 셋만 해도 엄청난 위용을 과시할 수 있으니까.
개개인의 면면을 뜯어봐도 최소 삼강의 서클 라운더 이상의 강자로 봐야 된다. 실제로 샤를은 피스파인더 암릿의 서클 라운더가 맞고.
“사실 단순히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긴 해요. 단순히 경고를 하는 선에서 끝낼 생각이라면, 내일이라도 저와 함께 스트로우 네클레스의 아지트 중 한 곳으로 가면 끝이니까요.”
이 말도 맞다.
무슨 깊은 얘기를 나눌 필요도 없다. 방문한 목적 같은 건 대충 생각한 다음, 그냥 차만 대접받고 와도 트로우맨 링즈를 대하는 태도는 180도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거면 될까?
트로우맨 링즈가 강해지고, 다른 서클이 그걸 인정한다. 더 이상 견제받지 않는다. 시비도 걸지 않는다. 삼강 모두 트로우맨 링즈가 재건됐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언뜻 들으면 매력적인 일이지만, 뭔가 다르다.
베니앙이, 지젤란이, 피안느가, 에이제그가.
트로우맨 링즈가 원하는 게 고작 이런 것일까?
“…….”
아니, 아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보상이 될 리가 없지 않나.
최근 들어 행방불명된 서클원만이 아니다.
오셀 아르젠토를 죽음으로 내몰고, 트로우맨 링즈를 몰락시켰다. 의도적으로 서클의 세력을 깎기 위해 간부를 비롯한 서클원 수백 명을 사지로 내모는 작전을 묵인했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기름기 가득한 뱃살을 더 찌우기 위해서.
역겹고, 추악한 종자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프레이 자신도 놀랄 만큼 싸늘한 목소리가 나왔다.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트로우맨 링즈의 몰락 과정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어떤 면에선 최근 서클 라운더가 된 프레이보다 더 깊게 파악하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스트로우 네클레스의 레질 아르젠토와 직접 대담하는 거지만, 아시다시피 삼강의 서클 마스터, 그리고 서클 라운더는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습니다.”
데미갓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의도적으로 족적을 지우고, 몸을 숨기는 데 각별히 신경 쓰기 때문에 같은 서클의 간부가 아니라면 찾을 방도가 없다고 들었다.
어려운 문제다. 프레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샤를은 잠시 고민에 잠긴 듯하다 말을 이었다.
“일반적으로 서클 마스터가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는 2년에 한 번 있는 정기 서클회의 때뿐입니다. 하지만 다음 회의까지는 아직 1년 가까이 남은 실정이죠.”
“1년.”
프레이는 눈을 감았다.
아무리 그래도 1년이나 지체할 수는 없다.
“확률은 낮지만, 저도 레질 위르세만의 행방을 찾아보겠습니다.”
“신세 많이 지는구나.”
“아니오.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진심으로요.”
샤를이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우선은 한 달 정도만 추이를 지켜보자.
프레이는 그동안 트로우맨 링즈의 재정비 및 정보 수집, 그리고 9성의 경지를 도모하는 데 시간을 쓰기로 했다.
게다가 한 달 뒤면 아나스타샤의 제작도 딱 끝났을 무렵이 아닌가.
‘좋게 생각하자.’
급하게 가다 고꾸라지는 것보다 낫다 게다가 그 전에 뜻밖의 기회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리 생각했지만, 실제로 일이 그렇게 원활히 풀릴 거라 예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삼 주 후, 서클의 주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전체 회의가 긴급 소집되었을 때 내심 당혹해했다.
그러나 회의의 안건을 듣는 순간, 스트로우 네클레스에 대한 생각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안건은 두 가지였다.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데미갓들에 대한 대처.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멸망한 도시국가 지오탄불의 수습.
* * *
프레이가 레티아를 죽인 직후의 일이다.
“으, 으윽…….”
레이린은 쏟아져 오는 잠을 억지로 참아 내며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었다.
상상도 못 했다. 설마 데미갓 셋으로도 부족하다니?
‘대체 아펩을 어떻게 죽인 거야?’
레티아와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하인츠와 싸우는 데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프레이가 아펩을 토벌했다. 뒤이어 도착한 데미갓 둘까지.
‘설령 놈이 9성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데미갓 셋을 죽일 수는 없어.’
아니. 지금 와서 지나간 일로 이를 간들 변하는 건 없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이미 틀렸다. 여기까지다. 곧 기약 없는 동면에 빠진다.
그렇다면 최소한 로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리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역할이다. 지금 그녀의 머리를 채운 건 사명감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꺼풀을 억지로 들었다. 그녀 정도의 격이 없었다면 이 흉악한 수마睡魔의 유혹을 버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로드.”
로드는 여전히 탁상지에서 나머지 데미갓의 치료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말했다.
[레이린.]
“내 어포슬이 당했어.”
[그런가.]
로드는 놀라지 않았다.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 침착한 얼굴이다. 레이린은 로드의 태도에 묘한 안심을 얻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아마도 서클의 도움을 받았겠지.”
그러나 레이린은 직접 말을 하면서도 의아함을 느꼈다.
정말 서클일까? 놈들의 기세는 예전답지 않다. 수백 년 전만 해도 필사의 각오를 다지고 덤벼든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지만, 요즘엔 데미갓과 맞서 싸우는 것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유지하는 데 바쁘다.
“윽…….”
레이린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제는 정말 한계다.
“…로드, 이걸…….”
레이린은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 로드의 앞에 두었다.
“일루니늄이야. 양은 얼마 안 되지만… 내가 갖고 있는 건 이게 전부. 나머지는… 놈들이 훔쳐갔어.”
[수고했다, 레이린. 이만 쉬어도 된다. 걱정할 건 없다.]
“하, 하하. 너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지.”
로드는 동족을 상대로 허언하지 않는다.
지난 수천 년간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털썩.
레이린이 바닥에 쓰러졌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
로드는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눈이 드러났다.
눈동자엔 짙은 슬픔과 통한이 담겨져 있었다.
[정말로 수고했다, 레이린. 이제 푹 쉬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