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세력을 형성하다 (1)
프레이는 이 이상 헥터에게 휩쓸리면 얘기가 진행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은발의 골렘을 한번 살펴보았다.
겉모습은 인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피부도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워 보였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역시 허리까지 길러져 있는 은발이었다. 리키의 것보다는 조금 어두운 편이나, 밤하늘의 별처럼 은은한 빛을 띠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 눈동자 색은 모르겠다. 나이는 열여섯 정도. 다른 골렘들도 모두 이 나잇대라는 걸 감안하면, 헥터의 취향이 진하게 묻어난 외견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프레이의 예상과는 수백 광년은 뒤떨어진 모습이었다.
덩치는 최소 10미터, 전신은 오리하르콘으로 번쩍번쩍, 주먹질 한 방에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대對데미갓용 병기를 상상했는데, 실제로 보게 된 건 나뭇가지 하나 부러뜨리는 것도 벅차 보이는 소녀라니.
…물론 골렘의 외견이란 게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는 알고 있지만, 이런 연약한 몸으로 100만 ME의 출력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헥터도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 생각하는데 카이로가 턱을 쓸며 눈을 빛냈다.
“호오. 외견은 좀 그렇지만, 이거 엄청나군요.”
“아시겠습니까?”
“혹시 골격은 ‘디그나이트’를 사용한 겁니까?”
“직접 만든 특제지요. 신경계는 미스릴을 썼고요.”
“합금인 것처럼 보이는데…….”
“물론입니다. 순수한 미스릴은 희귀도나 금전적인 면을 떠나 효율 면에서도 뒤떨어지니까요.”
“쉬운 공정은 아니었을 텐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솔직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디그나이트라는 금속도 처음 들었다. 그리고 미스릴에 다른 금속을 더하다니? 금속에 대해 문외한인 프레이도 그게 무척이나 위험하고 까다로운 공정이란 건 이해하고 있다.
“말씀대로 외견은 완벽합니다. 속만 채워 넣으면 당장이라도 작동하겠군요. 우리 둘, 거기에 디아블로까지 힘을 보탠다면 한 달이면 완제품이 될 겁니다.”
“하하. 당신들이 거들어 준다면 한 달도 길죠.”
헥터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이후로도 그들은 골렘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해서 계속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프레이는 그들이 보다 뛰어난 작품을 만들기 바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나스타샤의 핵을 보여 주었다.
“오오……!!”
“이, 이건 정말…….”
헥터는 물론, 카이로의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감히 손을 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이상한 손짓을 하며 핵을 바라보았다. 언뜻 황홀해 보이기까지 한 반응이다.
“만져도 됩니다.”
“저, 정말요?”
“이걸 제대로 파악해야 더 적합한 골렘을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지당하신 말씀!”
헥터가 침을 튀기며 말한 다음 잽싸게 핵을 살펴봤다. 그는 눈을 빛내면서 끊임없이 감탄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군. 정말 대단한 물건이야. 빛의 시대의 유산… 당신은 이걸 누가 만든지 알고 있습니까?”
“슈하이저 스트로우.”
“대현자 슈하이저! 과, 과연.”
헥터가 낮게 중얼거렸다.
“역사는 그를 전무후무한 연금술사라고 부르더군요.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부족한 칭호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정말 연금술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불세출의 천재임이 분명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칭찬받으니 프레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헥터는 가공할 만한 지식을 소유한 드래곤이지 않은가.
“음? 그런데 이 안에 새겨져 있는 글자는 무엇이오?”
“아나스타샤. 아마도 골렘의 이름이 아닐까 하는데.”
“흐음……?”
카이로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 태도가 신경이 쓰여 프레이가 물었다.
“무언가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나?”
잠시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기우겠지. 어차피 골렘이니까.”
* * *
잠시 후 디아블로가 돌아왔다. 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지난 백여 년을 통틀어 가장 피곤했던 사흘이었군.]
“고생했소, 디아블로. 결계는?”
[모두 해주解呪했다. 곧바로 나가면 될 거다.]
“드디어 이 답답한 공간에서 떠날 때가 되었군.”
헥터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챙길 건 달리 없소?”
“내 사랑스러운 골렘들만 모두 챙겨 주면 됩니다.”
한둘도 아니고 거의 백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거기에 공방에 있는 물약이나 금속 등을 챙기려면 평범한 워프로는 안 된다.
“대규모 워프 마법을 써야겠군.”
카이로의 말에 프레이도 동의했다. 카이로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범위는 이 방으로 하겠습니다. 헥터, 가지고 갈 것들을 모두 가져오십시오.”
“잠시만요.”
헥터는 골렘들을 이용해 물품들을 날랐다. 십여 분이 흐른 뒤, 그는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후! 다 됐습니다.”
“…그럼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카이로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워프.”
슉.
그들은 순식간에 파라곤의 아지트로 귀환할 수 있었다. 프레이는 워프가 남긴 마나의 잔향을 해석했다. 그제야 이 공간이 어느 곳에 위치했는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는 지하군. 그것도 지상에서 수백 미터는 떨어진.”
“그렇소.”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데미갓조차 추적하기 여의치 않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직접 워프에 몸을 실은 프레이조차 이곳이 지하 공간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이로가 헥터를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넓은 곳이니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을 겁니다. 오늘은 쉬고, 본격적인 제작은 내일부터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지요.”
헥터는 지금 당장 시작해도 상관이 없었으나, 디아블로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카이로의 시선이 프레이에게 향했다.
“당신은 이제 어쩔 생각이오? 들었다시피 골렘을 완제하는데 약 한 달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프레이가 말했다.
“들를 곳이 있다.”
“들를 곳이라면?”
“레이널스 대밀림.”
그러자 카이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긴 엘프의 땅이 아니오?”
“맞아.”
“외부자들을 배척하는 폐쇄적인 땅이라고 들었는데, 무슨 볼일로 그런 곳까지 가는 거지?”
“하이엘프의 여왕이 리키의 어포슬이었지. 그녀에게 리키의 죽음을 알려 줘야 돼.”
“으음…….”
뜻밖의 사실에 카이로가 미간을 좁혔다.
프레이는 그에게서 시선을 뗀 채 스노우를 떠올렸다. 사실 알려 줄 필요도 없이 그녀는 리키의 죽음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포슬과 데미갓은 무척이나 긴밀하게 이어져 있으니까.
그렇지만 리키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스노우도 알 권리가 있었다.
“아무튼 돌아오려면 이곳의 좌표값을 알아야겠군. 가르쳐 주겠소.”
“나는 아직 파라곤에 들어온 게 아닌데.”
호의는 고맙지만 선은 명확하게 그어야 된다. 그러나 프레이의 단호한 목소리에도 카이로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한배를 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괜찮으니까 외워 두시오.”
프레이는 카이로가 말해 주는 파라곤 아지트의 좌표값을 외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도 내심 카이로의 신뢰가 반가웠다.
그의 말대로다. 카이로와 프레이는 한배를 타게 되었다.
* * *
프레이는 워프를 사용해 레이널스 대밀림으로 이동했다. 하이엘프의 마을, 리룬드가 아닌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였다.
근처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는다. 대밀림 전체가 흐루히랄과 이어져 있으니, 그의 침입은 이미 들통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흐루히랄의 눈에 띄었다는 것은 조만간 스노우도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프레이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스노우가 나타났다. 그녀는 모습을 감추는 ‘젠키의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신비한 백색의 머리카락도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특유의 고귀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스노우.”
“그대가 올 거라 생각했었다.”
스노우는 그리 말하고 가면을 벗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드러난 얼굴은 여전히 인세를 벗어난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얼굴이었다. 프레이는 그제야 스노우의 목소리가 저번보다 훨씬 무거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키는 죽은 것이 맞느냐?”
스노우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프레이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가 죽였지?”
“로드.”
침묵. 스노우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프레이는 그녀가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스노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프레이의 옆에 있는 바위에 앉은 뒤 입을 열었다.
“본녀의 출신지에 대해 얘기했던가?”
“북부에 있는 설원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 아이스 엘프는 모두 그곳에서 살았다. 하지만 본녀의 동족은 데미갓에게 몰살당했지. 나중에 리키에게 들었지만, 그건 레이린이라는 데미갓의 소행이었다.”
아이스 엘프가 데미갓에게 죽었다는 얘기는 일전에 들었다. 그러나 그 소행의 주인이 레이린인 건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죽기 직전 본녀를 살려 준 것이 리키였다. 후후. 아직도 기억나는군. 피웅덩이, 그리고 몰아치는 눈보라에 서서히 죽어 갈 때, 손을 내미는 리키의 모습은 마치 신의 사도처럼 보였다.”
스노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에 있는 응어리를 풀듯, 아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혜를 입었다는 거지. 리키가 아니었으면 본녀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테니까. 복수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벌레처럼.”
“…….”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노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왔던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기다렸다. 아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닐까.
한 시간이 정도가 흐르고 스노우가 돌아왔다. 홀가분한 얼굴이었고, 방금 전까지 보였던 무거움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개운해 보이기까지 했다.
“후후! 방금 여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왔다.”
“뭐?”
“아. 진작 이럴 걸 그랬구나. 아주 산뜻해.”
여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니? 프레이는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렇게 쉽게 물러날 수 있는 자리가 아닐 텐데…….”
“음. 그래서 한 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장로들의 잔소리가 끝날 기미가 안 보여 그냥 도망치기는 했다만.”
“…….”
“걱정 마라! 아예 물러난 건 아니고 임시 퇴직이라고 할까. 볼일이 끝날 때까지 대리도 세우고 왔으니 문제될 건 없다.”
문제될 게 많아 보인다. 프레이는 의문을 꾹 참은 채 물었다.
“볼일?”
“그래, 프레이.”
스노우가 씩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오늘부터 본녀도 데미갓 토벌에 전력을 다하겠노라. 그러니 잘 부탁한다.”
“아니. 그걸 왜 나한테…….”
“그대 옆에 있어야 본녀의 목적을 가장 빨리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프레이는 순간적으로 반발하려다 입을 닫았다.
‘…조금 피곤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스노우의 전투력은 대단한 수준이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이반과 동급, 어쩌면 그 이상. 그녀는 본 드래곤을 죽일 때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피곤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 인재를 얻을 수 있는 대가라면 오히려 싼 축인 것이다.
프레이는 순식간에 계산을 마치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
“후후. 폐가 되진 않을 것이니라.”
일단 저 말투는 어떻게 교정을 해야겠고.
프레이는 스노우와 간단히 악수를 나누며, 다음 목적지를 떠올렸다.
‘트로우맨 링즈.’
지금 서클이 어떤 상황인지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