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파라곤 (3)
둘이서 할 얘기는 끝났기 때문에 샤를과 하인츠를 방으로 들였다. 오크 주술사 또한 같이 들어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엘라쿠트였다.
카이로가 샤를을 보며 빙긋 웃었다.
“샤를 롤랑, 오랜만이군.”
“…카이로 위르세만? 죽은 게 아니었나?”
전대 서클 마스터인 카이로와 현 서클 라운더인 샤를에게 안면이 있다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카이로가 서클에서 쫓겨나고 반세기나 흘렀지만, 뱀파이어인 샤를에겐 그리 긴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서클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하인츠는 카이로를 처음 보는 눈치였다.
“목숨은 부지했지.”
“그랬군. 파라곤이란 네가 만들고, 이끄는 단체였어.”
“창립한 건 맞지만, 이끈다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겠군. 파라곤의 소속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대등한 위치요. 흠.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티끌만큼의 존중은 더 받는 것 같소만.”
그 말에는 프레이도 약간 놀랬다. 그도 여태껏 파라곤의 수장이 카이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모두 동등하다.’
즉, 파라곤은 프레이의 생각보다도 훨씬 작은 단체일지도 모르겠다. 서클처럼 소속원이 많은 단체에 있을 법한 규칙은 아니니까.
“그래서 어떻소?”
“무엇이?”
“파라곤에 들어올 생각은 드셨소? 우리의 제안은 아직 유효하오. 당신 정도의 인재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샤를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마스터가 들어간다면.”
“흠. 아쉽지만 알탄의 성격상 우리와 함께하지는 않을 것 같소만.”
“알탄을 말하는 게 아니야.”
“음……?”
카이로는 샤를의 시선이 프레이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마스터란 게 당신을 말하는 것이었소?”
“…….”
프레이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지만, 카이로는 그게 무언의 수긍임을 깨달았다.
“…허허. 알탄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군. 뱀파이어 퀸을 굴종시키다니.”
뱀파이어 퀸. 그 말에 저절로 샤를에게 시선이 갔다. 그녀가 뱀파이어 중에서도 고귀한 출신 성분을 가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여왕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샤를이 눈을 내리깔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기백 년도 전에 버린 이름입니다.”ㄴ
“…….”
프레이도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흥미는 들었지만 굳이 캐물을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여왕이든 대공이든 큰 상관은 없으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볼일이 있다.
“샤를, 피스파인더 암릿의 서클 마스터와 만나야 된다.”
“알탄과 말입니까? 으음…….”
샤를이 눈가를 좁혔다.
“어려운가?”
“…그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남자입니다. 머릿속엔 악마나 마계, 계약에 관한 일들만 가득하죠.”
설령 샤를이 직접 불러내려고 해도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프레이가 말했다.
“아수라의 소환진을 알려 준다고 해.”
“…정말입니까?”
“그래.”
사실 소환진만 알려 주는 건 상대방 입장에서 그리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소환진을 알려 준다고 반드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계약 여부는 순전히 아수라의 기분에 달려있다.
그러나 샤를은 이 미끼를 알탄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네. 알겠습니다. …실례.”
샤를의 그림자에서 작은 박쥐가 한 마리 나오더니 프레이에게 날아갔다. 그리고는 프레이의 몸으로 쑥 들어갔다.
이건 단순한 연락책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프레이도 막지 않았다.
“알탄과의 얘기가 끝나면 방금 전의 사역마를 통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잘 부탁한다.”
“맡겨 주십시오.”
샤를이 고개를 숙였다.
프레이의 시선이 다음으로 향한 건 하인츠였다.
“하인츠, 너에게도 부탁할 게 있다.”
“뭐지?”
“블레이크 가문의 가주가 되어다오.”
“…그게 무슨.”
이 갑작스러운 말에는 아무리 냉정한 하인츠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너에겐 명분이 있다. 장남인 미샤엘이 살아 있는 게 조금 귀찮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가주직을 계승하는 데 제3황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을 테니 말이야.”
프레이가 피오레에게 말한 세 번째 부탁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이번 소란이 끝나면 실질적으로 블레이크 가문을 이끌던 레티아와 이사카, 둘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모든 게 예상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레티아는 죽었지만 이사카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니.
그러나 지금의 블레이크 가문에 주인이 없는 건 사실이다. 만약 이사카가 살아 있어도 지금 상황에서 가문에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원래라면 내가 그 자리를 이어받으려고 했지만 나보다는 네가 훨씬 적임이라고 생각한다.”
블레이크 가문을 이대로 멸문시키는 건 아까운 짓이다. 가문이 가진 영향력이나 재력, 권력, 그리고 이름값은 오랜 시간을 걸쳐 쌓아 올린 것이다. 단시간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닌 만큼 언젠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던 하인츠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양친을 용서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하인츠는 블레이크라는 가문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그렇다고 가문을 내팽개칠 수는 없다.
비록 데미갓의 실험장으로 탄생한 가문이라고 할지라도, 하인츠에게 있어선 자신의 가문이었다. 태어났고, 자란 장소. 가문을 부정한다고 해서 하인츠 블레이크라는 이름이 바뀌는 건 아니다.
이대로 놔둔다면 죄 없는 식솔들과 사용인, 소속 마법사, 분가에 속한 이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카이로, 당분간 하인츠가 파라곤에 머물러도 되겠나? 데미갓이 추후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물론 괜찮소.”
카이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인츠는 당분간 파라곤에 머물게 되었고, 샤를은 알탄을 찾으러 떠났다. 서클 마스터들은 데미갓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샤를은 그를 추적할 방도가 있는 듯하지만,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프레이는 휴식을 취하며 디아블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돌아온 건 이튿날이었다.
꼴이 만신창이다. 로브 자락은 걸레짝이 되어 있었고 흉흉한 안광도 흐릿했다. 새하얀 뼈에는 금이 가 있기도 했다.
파라곤의 저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데미갓 둘은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고했소, 디아블로. 피해는?”
[중상이 다섯, 경상이 둘. 그리고 시모네와 아히드가 죽었다.]
“…후우.”
카이로가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으며 슬픔을 털어내곤 말했다.
“그들의 의지는 우리가 이어 갈 것이며, 영혼은 항상 함께할 것이오. 데미갓이 대륙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디아블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데미갓의 토벌은 성공했다. 이건 전리품이다.]
“고생했소.”
디아블로가 건넨 건 데미갓의 결정이었다. 카이로는 그걸 챙겼다. 용무가 끝난 듯, 디아블로는 곧바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카이라고 급히 그를 제지했다.
“잠깐, 디아블로. 미안하지만 당신 도움이 한 번 더 필요하게 되었소.”
[뭐지?]
“헥터를 구출하는 것이오.”
[호오…….]
디아블로의 눈에 흥미가 피어났다.
[자세히 말해 봐라.]
카이로는 프레이에게 들은 얘기를 천천히 풀어 설명했다. 프레이는 한쪽 벽에 기댄 채 그들의 얘기를 들었다.
설명을 마친 카이로가 말했다.
“당신은 물론 도와주겠지?”
[물론이다. 헥터의 처지에는 항상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럼 언제 갈까?”
“지금.”
대답을 한 건 프레이였다. 빠를수록 좋다.
‘레이린이 동면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데미갓도 셋이나 죽었다. 이 소식은 머지않아 로드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이후에 놈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된다.
‘그렇다고 해도.’
재촉할 수는 없다. 프레이는 디아블로의 몸을 훑어보았다. 방금 전에 일전을 마친 디아블로를 당장 끌고 갈 수는 없다.
[…….]
프레이의 시선을 알아챈 디아블로가 잠시 고민하더니 방을 나서며 말했다.
[두 시간 후에 오겠다. 최소한 마나는 채워야 될 테니까]
디아블로는 그리 말하고 방을 나섰다. 카이로가 프레이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하는군. 두 시간 후에 출발하면 될 것 같소. 준비하고 이 방에서 다시 모입시다.”
“알겠다.”
프레이는 배정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현자의 스태프에 마법을 메모라이즈한 뒤, 곧바로 아수라를 소환했다.
쿠우우.
작게 소환된 아수라가 프레이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아펩이 어떻게 되었는지 듣고 싶어서.”
[…정말 별것 아닌 일로 부르는군.]
아수라가 귀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죽였다.]
“…고전했나?”
[아니. 귀찮은 정도였다.]
아펩이 보여 준 위용을 생각하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지만, 프레이는 아수라야말로 절대자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
“…마계에서라면 아포칼립스도 이길 수 있는 거 아닌가?”
프레이의 말에 아수라가 고개를 저었다.
[붙어 봐야 알겠지만, 이렇게 쉽게 이길 수는 없겠지. 그 아펩이란 놈은 마계의 땅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마계에는 낮도, 밤도 없으니까.]
“어둠의 권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거군.”
[그렇다. 그래도 제법 끈질기긴 했지만.]
아수라는 프레이를 보다가 말했다.
[그 흡혈귀한테도 말했지만, 이런 귀찮은 일은 이제 사양이다.]
역시 눈치는 빨라.
아수라의 단언에 프레이는 내심 아쉬워했다. 데미갓 하나를 별 부담 없이 처리할 수 있는 건 무척이나 매력적이어서, 기회가 되면 몇 번 더 부탁할까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할 말이 끝났다면 이만 가겠다.]
“…….”
아수라가 사라졌다.
두 시간이 흐르고, 프레이는 카이로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시간에 딱 맞춰 왔는데 디아블로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카이로는 프레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왔군. 그럼 간단히 작전을 설명해도 괜찮겠소?”
“그래.”
“당신 말대로라면 헥터는 지금 루아노블 왕국의 루페이에 있소.”
프레이와 디아블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는 않으니까 우선은 워프 마법으로 그곳까지 갑시다. 그리고 만약 그곳을 데미갓이 둘 이상 지키고 있다면
곧바로 도주할 것이오.”
카이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파라곤의 아지트는 결계가 겹겹이 쳐져 있기 때문에 일단 이곳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제아무리 데미갓이라도 추적이 불가할 테니 명심해 두시오.”
“알겠다.”
“그럼… 갑시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지금 워프를 사용하는 건 프레이다. 헥터가 있는 뒷골목의 좌표는 그가 알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워프.”
슉.
다음 순간 시야가 반전되더니, 그들의 신형은 루페이의 뒷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파앗.
프레이는 곧바로 마나를 퍼뜨려 주변을 체크했다.
“이쪽엔 없다.”
[이쪽도.]
“여기도 괜찮소. 흐음. 데미갓은 없는 모양이군. 역시 여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나 보군.”
“아직은 모른다. 잡화점에 있을지도 몰라.”
프레이는 뒷골목에 있는 지하 계단을 가리켰다.
“저 밑에 헥터가 있어.”
“좋소. 바로 움직이지.”
프레이가 앞장서서 계단으로 향했다.
이윽고 등불 하나 없는 캄캄한 지하 계단을 내려가는데, 카이로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지금 나는 기쁘다오, 프레이.”
“뭐가 기쁘다는 거지?”
“헥터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 말이오. 나는 항상 그분을, 아니. 드래곤이란 종족의 몰락을 안타깝게 생각했다오. 과거 데미갓에 반목했던 종족 중 가장 강력한 존재가, 지금은 육체마저 빼앗긴 채 그들의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다니. 그보다 비참한 신세가 어디 있겠소?”
“…….”
“아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을 거요. 숨을 쉬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지옥이겠지.”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스승의 종족이자 대륙의 조율자, 그리고 데미갓과의 전쟁에서 가장 든든한 원군이었던 일족의 몰락이 못내 안타까웠다.
카이로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반드시 구해 냅시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계단이 끝나고, 헥터의 잡화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프레이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잡화점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린다. 누가 있는 건가?
“흐흐. 흐흐하하.”
“……?”
“극락이로다. 흐하하하!!”
얼빠진 목소리였다. 그게 헥터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챈 건 직후였다.
프레이와 카이로, 그리고 디아블로의 시선이 잡화점 안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팔자 좋게 의자에 등을 묻은 채, 헤실헤실 웃고 있는 헥터의 모습이 보였다.
“에일리, 쿠키를 주려무나.”
“네, 주인님.”
헥터의 말에 지난번에 보았던 하녀복을 입은 골렘, 에일리가 직접 헥터의 입에 쿠키를 넣어 주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헥터가 엄지를 척 하고 세웠다.
“음. 아주 맛있군. 솜씨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은데?”
“영광입니다.”
“홍차도 타 주겠니? 지난번에 마셨던 찻잎이 아주 좋더구나.”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천천히 하렴.”
흐뭇하게 웃던 헥터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 사는 게 즐거워 미치겠-”
그때 헥터의 시선이 문득 문 앞에 서 있던 프레이와 마주쳤다.
“…….”
“…….”
헥터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카이로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구하러 왔소, 헥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