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제3황녀 (4)
단언해도 당장은 믿지 않을 것이다. 세간에 알려진 그의 경지는 고작해야 7성, 데미갓은커녕 웬만한 서클과 비교해도 부족한 수준이니까.
황녀의 철두철미한 성정을 미루어 짐작하면, 의심의 시선부터 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건 프레이가 어느 정도 의도한 결과기도 하니 문제 될 건 없다.
적절한 의심은 반전에 효과를 주니까.
그런데 황녀의 반응이 의외였다.
“아…….”
얼굴을 홍당무처럼 물들이더니 풀린 눈으로 프레이를 보는 것이 아닌가? 옆에 있던 베로니카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황녀 전하.”
“아? 아아. 그, 그렇군요. 자, 잠시만.”
피오레는 손부채를 하며 호흡을 정돈했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녀 전하, 너무 노처녀인 걸 티 내지 않으시는 게-”
“다, 닥치세요.”
잠시 후 피오레가 진정된 얼굴로 프레이를 보았다.
“프레이의 말이 맞아요. 지금 저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위태로운 상황이죠.”
레티아는 피오레가 황실에 있는 한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틀린 말이다.
황실은 피오레에게 있어 안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선 이보다 위험한 곳도 없을 것이다.
데미갓과 서클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서열 싸움과 황실 세력 간의 알력 다툼, 견제까지. 마음 편히 숙면을 취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다. 위태롭긴 해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피오레에게도 자존심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데미갓이라도 저를 쉽게 죽일 순 없을 거에요.”
“제11마탑주. 그를 믿는 겁니까?”
“…그분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는군요.”
피오레는 쓰게 웃으며 말했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제11마탑주의 정체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지만,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자들은 의외로 많았다.
황실의 비밀스러운 수호자.
데미갓조차도 쉽게 손을 대지 못하는 마법사.
그런 존재가 자신의 뒷배를 봐주고 있다. 피오레는 간접적으로 그 사실을 어필함으로서 황실의 수많은 위협을 물리칠 수 있었다.
“맞아요. 여태껏 제가 황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의 지원도 큰 이유가 되었죠.”
물론 제11마탑주의 눈에 든 것은 순전히 그녀의 역량이었지만. 프레이는 그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한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만.”
“으음…….”
“안 됩니까?”
그러자 피오레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에요. 무엇보다 저는 스승님이 어디 계신지는 몰라서요.”
“황녀께서도 말입니까?”
“네.”
이건 의외였다. 프레이는 그녀에게서 제11마탑주와 접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승님이라니……. 외람되지만 황녀께선 마도학을 배우지 않으신 것 같은데.”
“그분은 제가 아는 최고의 마법사이지만, 그 지식이 꼭 마도학에 한정되어 있는 건 아니에요. 저는 스승님에게 많은 것을 배웠어요. 평생을 들여도 갚기 힘든 은恩을 입었지요.”
“흠…….”
“아무튼… 아.”
그때였다.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피오레가 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구슬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프레이가 눈을 빛냈다.
‘마도구.’
피오레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스승님에게 연락이 왔어요. 먼저 연락을 주는 건 거의 없던 일인데…….”
“잠시 자리를 비울까요?”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아마도… 스승님은 프레이에게 용무가 있는 것 같으니까.”
피오레는 그리 말하며 구슬을 검지로 톡 건드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커넥트.”
우웅.
그러자 구슬에서 작은 빛이 투사되더니, 이윽고 흐릿한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로브를 쓴 괴인이었는데, 안쪽엔 캄캄한 어둠만이 비추고 있었다.
[처음 뵙겠소, 프레이 블레이크.]
“…….”
목소리가 묘하다. 성별은커녕, 나이도 짐작이 가지 않는 탁한 목소리였다. 후드 안의 그늘도 음영이 진 것이 아니다. 아예 안쪽을 볼 수 없게 만들어진 마도구인 것이다.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 없다.
프레이 또한 카인 릭스톤의 얼굴을 가장하고 있으니 피차일반이긴 하다.
“제11마탑주?”
[그렇소. 그대의 얘기는 잘 들었소이다.]
구슬로 피오레와 자신의 대화를 엿들은 건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피오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힐끗 눈동자만 굴려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
당황한 듯한 기색이다. 연기는 아니다.
‘구슬에 도청 기능이 있단 걸 그녀도 몰랐다?’
제11마탑주가 피오레에게도 구슬에 대한 기능을 전부 설명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숨겨진 이유가 있을지는 몰라도, 당장은 음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11마탑주가 말했다.
[향후 몇 년 내로 시작되는 데미갓의 대륙 지배.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오.]
“짚이는 게 있어 보이는군.”
프레이는 하대했다. 피오레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던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으나 어차피 제11마탑주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직함이다. 프레이로서도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11마탑주는 그 사실에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루아노블의 흑룡 기사단이 하룻밤 사이에 전멸했소.]
“흐음.”
그 정보를 알고 있는 건가. 프레이는 당연히 알고 있다. 노즈독이 그 기사단을 전멸시킬 때, 바로 옆에 있엇으니까.
[흑룡 기사단은 작은 성 정도는 하루 만에 함락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기사단이오. 그런 자들이 왕실에서 모종의 임무를 받은 이후,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지. 내가 알기로 대륙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건 데미갓밖에 없소.]
“죽음의 권능을 가진 데미갓의 소행이었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 말하자 11마탑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노즈독이었군. 나 또한 범인이 아포칼립스 중 하나라고 생각했소.]
서클에서 파악하고 있는 3명의 아포칼립스.
칼과 독, 그리고 죽음을 다루는 데미갓. 11마탑주 또한 노즈독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다.
[…데미갓이 여태껏 왜 암중에서 침묵을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를 거요. 하지만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소. 그들이 자신이 없어서 대륙 지배에 나서지 않은 건 아니라는 사실.]
정확한 판단이다.
드래곤이 사라진 작금의 대륙에서 데미갓을 위협할 존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여태껏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패널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의 법칙을 속일 수 있는 일루니늄이라는 금속을 만들어 냈다. 제한 시간이 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닐 터. 그들로서는 더 이상 침묵하고 있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흑룡 기사단을 죽인 건 지난 수십 년간 데미갓이 행한 학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었소. 어포슬이나 부하를 사용한 게 아니라 그들 손으로 직접 행한 학살이었으니.]
“노즈독의 토벌전은? 그때는 수천 명이 죽었는데.”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노즈독의 거처를 파악하고, 서클 측에서 먼저 움직인 거요. 굳이 비유하자면 잠자던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미련한 행위였지.]
그 말에 프레이의 눈이 살짝 빛났다.
“서클의 속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군. 외부인은 아예 모를 것들까지 속속들이…….”
[…음.]
11마탑주가 침음을 흘렸다. 그가 낮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자로군. 당신 생각이 맞소. 나는 원래 서클 소속이었소.]
“……!”
그 말에 가장 놀란 건 피오레였다. 그녀도 금시초문인 모양이다.
프레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스트로우 네클레스였나?”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오?]
“이 구슬은 아마도 당신이 만든 거겠지.”
그가 가리킨 건 피오레가 꺼낸 구슬이었다.
“이건 연금술로 만든 것 같은데, 고도의 마도지식이 없다면 제작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정밀한 마도구야. 연금술의 대가였던 대현자, 스트로우 학파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만들 수 없었겠지.”
그것만이 아니다. 노이즈가 심하게 껴 있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가 입고 있는 로브 또한 대단한 마도장비다.
11마탑주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스트로우 네클레스의 전대 서클 마스터요.]
“……!”
그 말에는 프레이도 순간적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 실력이라면 최소 간부급 인물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삼강의 서클 마스터일 거란 생각은 못했기 때문이다.
“마스터였으면서 어째서 서클을 나간 거지?”
[나간 게 아니오. 쫓겨난 거지.]
“그게 무슨.”
[프레이 블레이크, 눈빛을 보니 알겠소. 그대는 데미갓의 토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군. …오셀과 꼭 닮은 얼굴이야.]
“…오셀 아르젠토를 알고 있나?”
오셀 아르젠토.
베니앙 아르젠토의 의부이자, 트로우맨 링즈가 서클에서도 손에 꼽히는 세력이었을 적 마스터의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11마탑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셀은 내 친우 중 하나였소. 우리는 서클을 부흥시켜 언젠가 데미갓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고 약속했었는데.]
씁쓸한 목소리였다.
[그의 죽음은 서클의 썩은 면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최악의 사건이었지. 정말이지 멍청한 놈이었소. 내 말을 듣고 진작 서클에서 나왔다면 그런 비참한 최후는 맞지 않았을 터인데…….]
“…….”
그 말에 프레이는 갑자기 이반의 말이 떠올랐다.
[트로우맨 링즈?]
[아포칼립스 토벌전에서 상당한 출혈을 입었다고 들었지. 그건 삼강 서클들이 무언가 수작질을 부린 것 같다는 말도 있던데…….]
[확실하지는 않다. 나도 스승님한테 들은 거니까.]
오셀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사실은 그때 느꼈다. 그런데 11마탑주의 반응을 보니 정말 그의 죽음에는 다른 서클의 수작질이 있었던 것 같다.
[서클에서 쫓겨났을 때 베니앙이라도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지. 그런데 이렇게 뜻하지 않게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군.]
“기회?”
[정식으로 제안하겠소. 트로우맨 링즈를 데리고 서클을 탈퇴하지 않겠소?]
“…….”
[그대 정도의 통찰력이라면 서클이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겠지. 그곳에 계속 있어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는 없을 거요.]
“당신과 손을 잡으면 다르다는 건가?”
[물론이오.]
11마탑주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서클에서 쫓겨난 지도 벌써 50년이 지났소.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옛 영웅들의 의지를 오롯이 계승한 집단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최근 그 성과를 거두게 되었지.]
여태껏 초탈한 모습만을 보이던 그의 목소리에 열의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강력한 동맹이 있소, 프레이. 서클에 꿀리지 않을, 아니. 더 강력할 수도 있는 동맹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데미갓을 모조리 토벌하는 것도 꿈이 아니오!]
매력적인 제안은 맞다. 그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게다가 11마탑주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서클에서 쫓겨났음에도 투지의 불꽃을 사그라뜨리지 않고, 여전히 맞서 싸울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11마탑주는 최소 8성에 이른 마법사다. 그 정도 경지가 아니면 삼강의 서클 마스터라는 직책을 가지지 못했을 테고, 제11마탑주로서 데미갓을 견제하는 건 더욱 불가능하니까.
그런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은 정말 서클보다 강력한 힘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저쪽은 프레이가 들어가지 않아도 잘 굴러갈 것이다. 숙원인 데미갓의 토벌을 통해 착실히 나아갈 테지.
반면 서클은 다르다. 이들은 교정이 필요하다. 가만히 놔두면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다 이빨을 드러낸 데미갓들의 공세에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데미갓이 가장 성가시게 여기고 있는 것이 서클이니까, 일루니늄을 얻은 이후 그들의 첫 행보는 그 싹을 잘라 내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서클이 썩었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그대로 버려두기엔 가진 힘과 잠재력이 아까웠다.
“제안은 고맙지만 나는 서클을 내부로부터 개혁할 생각이다.”
그 말에 11마탑주는 흠칫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씁쓸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허허… 내부로부터의 개혁이라. 그대는 정말 오셀과 비슷하군.]
“…….”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오. 과거 트로우맨 링즈는 지금의 삼강만큼이나 거대했지만, 지금과 같이 몰락하는데 10년도 걸리지 않았소.]
그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한 제안은 계속 유효하오. 그대 정도의 인재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부디 그대의 최후가 오셀과 같지 않기를 바랄 뿐.]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러면 좋겠군.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진지하게 얘기를 나눕시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피오레를 본다.
[피오레, 그에게 도움을 아끼지 말거라. 비록 지금은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같으니까…….]
“아… 네, 스승님.”
스으윽.
피오레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11마탑주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연결을 끊으려는 것이다. 프레이는 그의 몸이 거의 사라지기 직전 입을 열었다.
“당신 이름을 알 수 있나?”
[…나는 카이로 위르세만이오.]
“……!”
그 말을 끝으로 11마탑주, 카이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도 프레이는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카이로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카이로 위르세만…….’
위르세만.
그건 슈하이저가 스트로우로 개명하기 전에 사용했던 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