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블레이크 가문 (6)
정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간다. 위병이 호위하겠다는 걸 하인츠가 한 손으로 물렸다.
“제3황녀가 평소에도 저택에 자주 오는 편인가?”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다시 반말을 했다. 하인츠는 약간 고민하다가 말했다.
“…··몇 년 전부터 교류가 잦기는 했지. 주로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는 듯했고.”
레티아 블레이크와? 프레이의 표정에 의심이 스쳤다. 어포슬인 그녀와 관계되어 있다면 데미갓과도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제3황녀. 프레이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 피오레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무척이나 현명하여, 여인의 몸으로도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고 들었다. 제국에서도 권위 높고 총명한 자들만이 참여가 허락된 국무회의에도 몇 번 얼굴을 비췄다고 하니, 그녀의 총명함은 황가에서 만든 것이 아닌 진실일 확률이 높다.
나이는 올해로 스물다섯으로 혼기를 한참이나 놓쳤다. 아마 그녀 스스로로 결혼을 거절했거나, 황제의 뒷배가 있었겠지.
“무슨 얘기를 하던가?”
“그건 모르겠다. …··혹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방문 자체가 단순히 퍼포먼스일 수도 있다.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
블레이크 가문과 제3황녀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른 세력에게 그걸 보여 주기 위한 방문이라는 건가?
‘차라리 그런 이유라면 좋겠군.’
이 나라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프레이의 본능은 그게 아닐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그는 데미갓의 손길이 생각 이상으로 주요 국가의 깊숙한 곳까지 뻗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피오레가 황가의 일원이라면 마음을 놓는 것이 아니라, 더 의심하는 게 옳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정원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을 거닐고 있는 일단의 무리도.
‘이사카, 미샤엘, 거기에 레티아까지.’
블레이크의 집안사람이 다 모여 있다. 그들만이 아니다. 중간에 있는 젊은 여자, 고귀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저 여자가 아마 피오레일 것이다.
그때 가장 앞에 있던 미샤엘이 하인츠를 발견하고 표정이 밝아졌다.
“하인츠?”
“어머.”
“흠.”
미샤엘의 말에 이사카와 레티아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하인츠가 그들에게 다가간 피오레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블레이크 가문의 차남인 하인츠 블레이크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하인츠.”
피오레와 하인츠는 구면인 듯하다. 피오레가 방긋 미소를 짓는다.
“황녀 전하의 외모는 뵐 때마다 더욱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프레이는 힐끗 하인츠를 보았다. 무뚝뚝한 그가 판에 박힌 금칠을 하는 광경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인츠는 황녀에게 인사한 뒤에야 가족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아버지, 지금 돌아왔습니다.”
“그래. 얘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지금은 황녀 전하의 접대가 우선이니.”
“예.”
“…··그런데.”
이사카의 시선이 뒤에 있는 프레이에게 향했다. 그의 눈에 복잡한 빛이 감돌았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의문, 그리고 짙은 위화감을 억지로 감춘 채 말했다.
“프레이.”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그간 무엇을 하고 돌아다녔는지 궁금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나중에 물어보겠다.”
“알겠습니다.”
그때 피오레가 프레이를 보며 말했다.
“초면이죠? 저는 피오레 디아크 카스트카우라고 해요.”
“프레이 블레이크입니다. 황가의 사파이어라고 칭송받는 황녀 전하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머.”
프레이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이사카와 미샤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실수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프레이치고는 너무 완벽한 인사다. 황녀를 앞에 두고도 크게 긴장한 기색이 없었고, 예의범절도 흠잡을 데가 없다.
프레이의 소심한 모습만을 기억하는 둘은 내심 그가 황녀 앞에서 실수를 하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고 있었기 때문에 훨씬 놀라움이 컸다.
“저 또한 황녀 전하를 접대할 영광을 같이 누리고 싶으나, 지금 같은 먼지투성이 꼴로 함께하는 건 예의가 아닌 줄 압니다.”
“후후.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하인츠의 뜻을 존중하겠어요.”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인츠가 이사카를 보자, 그도 고개를 끄덕인다.
“저녁 식사 때 보자꾸나.”
“예. …··가자, 프레이.”
프레이 또한 피오레와 이사카에게 고개를 한 번 꾸벅인 다음 하인츠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라진 후, 피오레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사카 공작에게 삼남이 있다는 걸 방금 알았어요.”
“프레이는 아카데미의 생도라 집에 있을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카데미라면……?”
“웨스트로드 아카데미입니다.”
피오레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명문 아카데미 중 하나군요.”
“…··그렇지요.”
뒷배를 쓰지 않았다면 프레이의 실력으로는 입학조차 못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보다 저급한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면, 제아무리 버린 자식이라도 블레이크 가문의 명예가 실추될 테니까.
“미샤엘이나 하인츠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자식입니다.”
“…··그렇게 안 보이던데.”
“죄송합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뇨.”
낮게 중얼거린 피오레가 고개를 저었다.
* * *
탁.
하인츠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뒤에 있는 프레이를 보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미샤엘이 너를 추궁할 확률이 높다.”
“그렇겠지.”
방금 전의 짧은 만남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나마 피오레 황녀가 옆에 있어서 조용히 넘어간 것이리라.
“그래서 앞으로 넌 어떻게 움직일 생각이냐?”
“우선은… 그들이 기억하는 ‘프레이 블레이크’로서 행동해야겠지.”
블레이크 가문에서 일루니늄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면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야 된다. 괜히 자신을 드러냈다가 경계를 사게 되면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
‘어금니를 드러내는 건 모든 것이 확실해졌을 때.’
아마 레티아를 죽이는 시점이 될 거다.
프레이는 그녀를 죽일 생각을 확고하게 굳혔다. 그 여자는 레이린의 어포슬이다. 그 사실에 비하면 프레이의 모친이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게 좋을 거다.”
“어째서?”
“그들은 네가 행한 활약을 몇 가지 알고 있다. 해적을 토벌하고, 페르안 준의 친우로서 인정받았다는 것들. 그런데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겠지.”
얼간이 미샤엘은 몰라도 이사카는 반드시 의심의 시선을 보낼 것이다. 하인츠는 그리 확신했다.
“…음. 그렇군.”
대답은 했지만 어려운 문제였다. 아예 찌질이 프레이를 연기하는 것도 아니고, 약간 성장한 프레이를 연기해야 된다니.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귀찮은 일이 될 테지만 어쩔 수 없다. 하인츠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애초에 이 정도 각오는 하고 블레이크 가문에 왔으니까. 잘만 풀리면 레이린을 동면에 빠뜨리게 만들 수 있으니 고생을 감수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다.”
하인츠가 방에서 나갔다.
프레이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프레이가 사용하던 방이었다.
허름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공작가의 자제가 쓸 만한 곳도 아니다. 약간 비싼 여관의 대실만 한 크기. 특히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는지 창틀이나 바닥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다.
프레이는 대충 로브를 벗고 옷장을 열었다. 다행히 옷장 안에 있는 옷들은 비교적 깔끔했다. 실내복으로 꺼내서 갈아입는다.
따지고 보면 몇 년 만에 집에 돌아온 건데도 별 감흥은 없다. 오히려 생각할 게 많아서 머리만 아프다.
프레이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침대에 가부좌를 튼 다음, 명상에 잠긴 채 시간을 때웠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이다. 예고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
프레이는 눈을 떴다. 그곳에는 집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프레이는 그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파비안.’
나이는 30대 후반. 프레이가 어렸을 적부터 특히나 그를 우습게 봤던 사용인 중 하나였다.
지금 이 순간도 그의 태도는 무례하기 짝이 없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데다, 가만히 시선을 보내는데도 전혀 잘못했다는 기색이 아니다. 오히려 뭘 보냐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는 게 아닌가.
‘기억에 있던 상황이지만, 직접 당하니 충격이군.’
프레이가 시선을 거두지 않자 파비안이 툭 던지듯 말한다.
“가주께서 부릅니다.”
도를 넘었군.
프레이는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파비안을 보며 말한다.
“다음부터는 노크를 잊지 마라.”
“…예?”
파비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프레이의 갑작스러운 하대에 놀란 것이다. 이 소심한 도련님은 여태까지 사용인들한테도 존댓말을 쓰며 쩔쩔매는 기색만을 보였다.
프레이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한 번은 용서해 주겠다. 하지만 두 번은 없어.”
“…아. 예.”
파비안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방금, 내가 위축된 건가?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1층에 있는 식당입니다.”
프레이는 곧바로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길쭉한 식탁에 앉아 있는 블레이크의 가문의 사람들이 보였다.
이사카, 레티아, 미샤엘, 하인츠.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이쪽을 향했다.
“아주 대단하군. 부른 지가 언젠데 이제야 털레털레 걸어오고.”
미샤엘이 노골적으로 이죽거리며 말했다. 프레이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흥. 그걸로 끝날 일 같으냐? 너 하나 때문에 우리가 몇 분이나…….”
“되었다, 미샤엘.”
이사카가 그의 말을 끊으며 프레이를 보았다.
“자리에 앉아라. 우선은 식사를 마치고 얘기하자.”
“예.”
프레이는 자리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레티아의 옆자리였다. 프레이는 수저를 들며 힐끗 레티아를 보았다.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홍차를 마시다가 고개를 돌린다.
“할 말이라도 있니?”
프레이는 움찔하는 척하며 급히 고개를 젓는다.
“아, 아니오.”
“흠.”
레티아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식사가 나왔다. 잠시간 수저가 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식사 시간엔 쓸데없는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블레이크 가문의 암묵적인 규칙 중 하나다. 프레이는 스테이크를 자르며 식사에 임했다.
식사는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났다. 프레이로서도 오랜만의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음식의 질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포만감에 몇 모금 마신 와인 덕분에 노곤한 기분이다. 그러나 프레이는 마나로 숙취를 깨끗이 몰아낸 채 이사카를 보았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프레이, 여태까지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프레이는 결연한 얼굴을 연기하며 말했다.
“…세상을 둘러보고 싶어졌습니다.”
“하하하…….”
노골적인 비웃음. 얘기할 것도 없이 미샤엘이다.
“그래서 웨스트로드 아카데미에 돌아가지 않은 거냐?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한 건 알고 있겠지?”
“예.”
“원래 네 실력으로는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조차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너를 입학시키는 데 만만치 않은 노력과 자금이 들었다는 소리다.”
“죄송합니다.”
“쯧…….”
프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미샤엘이 픽 웃었다.
“더 이상 들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홱 고개를 돌려 프레이를 본다.
“세상을 둘러보고 싶어? 핑계는 좋군. 꼴을 보니 아카데미에서도 비참한 생활을 이어 나간 것 같은데, 그걸 못 버티고 도망친 거겠지. 블레이크 가문의 쓰레기가.”
“…….”
이사카는 딱히 미샤엘을 제지하지 않았다. 레티아는 느긋하게 홍차를 마시고, 하인츠도 관심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
반응을 지켜보겠다는 건가.
“도망친 게 아닙니다.”
“그래? 얻은 거라도 있나 보지?”
미샤엘 블레이크.
아까부터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말투다.
애송이가 하나하나 물고 늘어지니 기분은 더러웠지만,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다.
이사카는 가주라는 신분 때문에 껄끄럽고 레티아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된다. 하인츠는 아군이라 할 수 있고.
즉 미샤엘은 장내에 있는 자들 중 가장 만만한 존재라는 것이다.
“예.”
“호오. 뭘 얻었는지 말해 봐라.”
“적어도.”
프레이가 미샤엘을 보았다.
“형님한테 질 것 같진 않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