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블레이크 가문 (5)
“어디에 있지?”
“사막.”
프레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실키드?”
“아마도 그 근처일 거다. 자세히는 가 봐야 알아.”
고개를 끄덕이는 토르쿤타를 보며 프레이는 생각에 잠겼다.
사막국가 실키드는 마도무왕 카사진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임과 동시에, 현재 이반이 카사진의 무구를 찾으러 떠난 곳이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반과 마주치는 건 아니겠지.’
프레이는 불길한 생각을 지우듯 고개를 저었다.
“놈이 완치하는 데는 아마 1년 정도 걸릴 것 같다. 싸운다면 그 전을 노려야 된다는 소리지.”
“그렇겠지.”
“우리도 그딴 괴물한테 속박되는 건 사절이니까. 그놈을 토벌할 거라면 도와줄 수 있다. 어포슬이란 직책은 놈의 정보를 파악하는 데 제법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포칼립스들이 완치할 때까지 이쪽의 태세를 가다듬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전력이 깎였을 때 토벌을 시도하는 게 훨씬 괜찮은 선택인 것 같다.
중요한 건 놈들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적어도 아그니가 어디 있는지는 토르쿤타가 알고 있지 않은가.
생각을 마친 프레이가 토르쿤타에게 경고했다.
“네가 어포슬인 건 다른 서클한테 밝히지 마라. 일이 귀찮아질 테니까.”
“흥. 그 정도 분별력은 있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실은 한 녀석에게 얼굴을 보이고 말았다.”
“뭐? 누군데?”
“젠타라는 놈. 기억나나?”
프레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잊을 리가 없다.
“아난타의 어포슬이었던 암살자군. 어쩌다가?”
“은발의 데미갓이 난동을 부릴 때 가면이 벗겨졌다. 그걸 놈이 보았고.”
“흠.”
좋은 소식은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큰일이라 생각되지도 않는다. 맨얼굴을 보았다고 해서 젠타가 갑자기 닉스를 공격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형식적이지만 어포슬 간에는 데미갓과 마찬가지로 동맹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애초에 얼굴을 숨겼던 이유도 배신자인 리키에게서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래도 닉스가 누군지 알아보려는 움직임을 보일 수는 있겠지.’
물론 이것도 큰 걱정은 없다.
닉스는 새로 태어난 이후 이스파니아 산맥을 나간 적이 없다. 기껏해야 아그니에게 끌려가 데미갓 모임에 참가한 것이 고작인데, 그 과정에서 별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테니 정보를 수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웬만하면 산맥에서 내려가지 마라.”
“네가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군. 약속이 있어서.”
“그러든가.”
토르쿤타가 관심 없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더니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프레이를 보며 툭 던지듯 말한다.
“조심해라.”
“……?”
“…고 닉스가 말하는군.”
프레이는 토르쿤타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을 닉스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 * *
프레이는 달라만의 성으로 돌아왔다. 사실 성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꼴을 하고 있었다. 성은 완전히 박살 났고 그나마 성벽만이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날은 이미 저물어져 있다. 생각보다 토르쿤타와의 얘기에 시간을 많이 할애한 모양이다.
하인츠는 이미 와있었다. 그는 부서진 성벽에 서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레이인가?”
그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이쪽의 정체를 눈치챈 모양이다. 정확히 말하면 프레이가 은연중에 정체를 드러낸 거지만.
프레이는 고개를 끄떡이며 가면을 벗었다.
“그렇군.”
낮은 중얼거림. 반응을 보니 가면을 벗기 전까지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신력을 다루었다는 건 루케스의 결정을 먹었다는 것이겠고.”
프레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자 하인츠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데미갓 때문에 폐허가 된 주변 일대였다.
“루아노블의 상황은 많이 심각하더군.”
“무슨 뜻이지?”
“우리도 흑룡 기사단이 전멸하는 걸 보았다. 그리고 아너 제롬이 그 사실을 루아노블의 수뇌부에게 전했지. 바로 방금.”
하인츠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식으로 나오더군. 웃긴 일이 아닌가? 그들에겐 데미갓과 맞설 생각이 아예 없었다. 이곳에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흑룡 기사단조차 보내지 않았을 테지.”
루아노블이 왕국이 썩었다는 건 프레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왕국이 자랑하는 기사단이 전멸했는데도 허리를 숙이는 비굴함엔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쓸데없는 얘기를 했군, 프레이. 네 행보에 대해서 들었다. 트로우맨 링즈의 베니앙과 접촉 후에 자취를 감추었더군.”
그가 프레이의 가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별로 오래전 일은 아닌데, 너한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군. 대체 그 동안 무슨-”
“하인츠 블레이크.”
프레이는 그의 말을 의도적으로 끊었다. 하인츠는 입을 닫고 차분한 시선을 던졌다.
“블레이크 가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신력과 마나의 조화를 연구하는 데미갓의 거대한 실험장이더군.”
“…그렇군.”
하인츠는 딱히 놀란 기색이 없었다. 애초에 프레이가 신력을 다루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그가 어느 정도는 진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너는 데미갓과 서클 어느 쪽 편이지?”
“어느 쪽도 아니다.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지.”
“너도 신력을 다룰 수 있나?”
“어느 정도는.”
“미샤엘과 이사카도?”
“그렇다. 미샤엘은 나보다 어설프지만, 아버지의 수준은 너라도 무시할 수 없을 거다.”
숨길 생각은 전혀 없는지 묻지도 않은 것까지 말해 준다. 프레이는 눈앞의 남자를 믿어야 될지, 믿지 말아야 될지 고민이 들었다.
“나는 블레이크 가문으로 갈 생각이다.”
“이유는?”
“찾아야 될 것이 있으니까.”
“그게 뭐지?”
“지금의 네겐 말해 줄 생각이 없어.”
프레이는 딱 잘라 말했다. 하인츠에게 적대감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일루니늄에 관한 정보는 특히 신경 써서 다뤄야 된다.
“경우에 따라서 블레이크를 멸문시킬 수도 있다.”
프레이는 최악의 상황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만약 다른 누군가가 프레이의 이 말을 들었다면 미친놈 보는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그만큼 오만한 말이다.
카스트카우 제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블레이크의 멸문을 입에 담다니? 그러나 하인츠는 그가 허풍을 떨지 않는 것도, 그걸 충분히 수행할 만한 힘을 가진 것도 알고 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8성의 대마법사임과 동시에 마계의 대공을 소환할 수 있으며, 뇌전의 신력까지 다룰 수 있다.
하나만 해도 위협적인 힘을 여러 개 가지고 있고, 그것 외에 밝혀지지 않은 힘을 갖고 있을 확률도 높다.
“나를 부른 이유는 보다 자연스럽게 가문에 들어가기 위해서인가?”
“의심을 사고 싶지 않거든.”
레티아 블레이크.
그녀가 레이린의 어포슬이라면, 블레이크 가문에서 가장 조심해야 될 인물은 다름 아닌 그녀다. 이사카는 아크메이지, 그리고 미샤엘은 기껏해야 5성의 마법사다. 거기에 신력까지 다룰 수 있다고 해도 그 둘이 크게 위협적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레이린의 어포슬인 레티아는 다르다.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지. 하지만…….”
“뭔가 바라는 게 있다면 최대한 들어주겠다.”
웬만하면. 프레이는 마지막 말을 삼키며 하인츠를 보았는데, 그가 입에 담는 건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질문?”
“그래.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지금 물으면 되잖아.”
“아니. 아직은 좀 더 지켜보고 싶다.”
이상한 말이다. 대답을 안 해도 상관없고, 지금은 지켜보고 싶다니? 프레이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따지고 들어도 가르쳐 줄 것 같지는 않다.
‘대답을 안 해도 상관없다면.’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럼 곧바로 갈까.”
“서클원들은?”
“이미 철수했다. 라운더 샤를이 데리고 떠났지.”
“그렇군.”
아쉬운 일이다. 샤를에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별수 없지.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수밖에.
둘은 곧바로 루페이로 향했다. 마음만 먹으면 필라트까지 워프하는 것쯤 식은 죽 먹기다. 좌표값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고. 하지만 장거리 워프인 만큼 완벽히 흔적을 지울 수는 없을 거다.
블레이크 가문에 가면, 일루니늄에 대한 단서를 찾기 전까지는 얌전히 지낼 생각이다. 괜히 덜미를 잡히는 것보다는 귀찮은 게 낫다. 때문에 수고스럽지만 루페이에 있는 워프석을 쓰기로 한 것이다.
필라트로 가는 워프는 나흘 후에 있다고 한다. 둘은 가까운 여관을 잡고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형제인데도 불구하고 각방을 잡았고, 서로의 방을 들르는 일은 없었다. 가끔 식당에서 마주칠 때도 대화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삭막한 느낌이 들긴 했으나, 프레이는 그 사실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하인츠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리고 나흘이 흘렀다. 그들은 비로소 필라트에 입성할 수 있었다.
워프가 끝난 직후, 블레이크 가문까지 한달음에 걸어갔다.
그리고 웅장한 저택의 앞에 서는 순간, ‘프레이’의 심장이 격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이…….’
블레이크 가문의 본가. 굉장한 위용이다. 예전에 보았던 준 가문의 저택에 전혀 꿇리지 않았다. 오히려 정원을 포함한 전체적인 크기는 블레이크 가문 쪽이 훨씬 큰 것 같았다.
“아! 하인츠 도련님.”
“지금 귀가하신 겁니까?”
위병들이 하인츠를 알아보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반가운 기색과 함께 진정으로 우러러 나오는 존경의 빛이 맴돌았다. 프레이는 하인츠의 인간상을 간접적으로 느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막 돌아왔다. 집엔 누가 있지?”
“마침 가족분들 모두 계십니다.”
“…그런가.”
하인츠의 표정이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모두 있다는 말은 가주인 이사카도 저택에 있다는 뜻이다. 이왕이면 그가 없는 편이 일을 처리하기 훨씬 수월했을 텐데.
그때 위병들의 시선이 프레이에게 향했다.
“저,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그러자 하인츠가 엄한 얼굴로 말했다.
“흠. 블레이크 가문의 위병이란 자들이 그새 내 동생의 얼굴을 잊은 것이냐?”
“예, 예?”
“도, 동생이라면 설마…….”
“프레이 도련님?”
위병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났다.
프레이에 대한 소문은 블레이크 가문의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자자하다. 마도 가문의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재능 때문에 가족에게 거의 버려진 자식 취급을 받고, 사실상 쫓기듯 웨스트로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 이후에 프레이가 벌였던 일들, 가령 해적과 리치를 퇴치하거나 페르안 준의 친구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귀족 중에서도 별로 없었다. 당연히 일개 사용인들은 그 소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하인츠는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며 말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저, 정원에 계십니다.”
“잘됐군, 프레이. 가자.”
“예.”
보는 눈이 많기 때문에 프레이는 존대를 쓰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하, 하인츠 도련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뭐냐?”
“지금 저택엔 손님이 와 있습니다. 가주께서는 그분의 접대를 하고 계시기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겠다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손님? 그게 누구지?”
하인츠의 표정에 불쾌감이 어렸다. 아무리 가주의 명이라고 해도 하인츠는 블레이크 가문의 차남이다. 물론 이사카와 하인츠 사이에 끈끈한 가족의 정 따위는 없지만, 대외적으로는 한 달 만에 저택에 귀가한 아들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이 정도 명분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손님이 찾아왔다면 모를까.
그러나 위병의 말을 듣는 순간, 하인츠의 표정에 어렸던 불쾌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제3황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