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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95화 (95/857)

95화 리키 (1)

며칠의 시간 동안 프레이는 나머지 어포슬들을 관찰했다. 만약 이곳을 벗어난다면 이들의 신원을 추적해서 죽여야 되기 때문이다. 단서는 하나라도 많이 얻을수록 좋다.

가장 돌출적인 신분을 가진 레티아는 최대한 차례를 뒤로 미뤘다.

피닉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남은 건 아난타의 어포슬인 진타, 그리고 붉은 피부의 악마뿐이다.

우선은 붉은 피부의 악마. 그는 대담하게 자신의 이름까지 밝혔다.

“칼투드다.”

칼투드는 프레이가 가졌던 악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려 놓는 기행을 보였다. 그는 진중했고, 사리분별에 능했으며, 자신의 주제까지 잘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솔선수범해서 악취 나는 지하실을 청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더 이상의 단서를 잡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얘기를 할 건수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대화를 엿듣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어포슬들 사이에는 대화도 오가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노골적으로 프레이를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얘기를 나눈다고 해도 프레이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다음은 젠타. 그에게선 칼투드보다 건질 것이 없었다. 그는 구석에 앉아서 단검을 닦거나 알 수 없는 약물을 섞기만 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살벌한 눈으로 프레이를 노려봤다.

‘이름, 그리고 진짜 얼굴을 본 걸 다행으로 여겨야 되나.’

젠타라는 이름과 얼굴. 특히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상처는 특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추후 그의 신원을 추적할 때 큰 도움이 될 거다.

프레이가 건진 건 그게 전부였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피닉스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프레이는 하루의 반 이상을 명상에 잠겼다. 그러면서도 다른 어포슬들의 돌발 행동에 대비해야 되기 때문에 긴장을 완전히 늦추지 못했다.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때문에 며칠 뒤, 벌컥 문을 열고 리키가 들어왔을 때는 약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어딘가 이상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프레이는 그의 기색이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명백하다. 프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따라갔다. 다른 어포슬들은 불만스럽게 리키를 힐끗거렸으나, 상대가 데미갓인 만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프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고, 리키는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

이 밑에 더 공간이 있었나? 프레이의 의문에 답하듯 얼마가지 않아 막다른 공간이 나왔다.

리키는 손날을 세워 가볍게 벽을 베었다.

스걱.

단숨에 벽면이 반으로 쩍 갈라지더니 숨겨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레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숨겨진 공간이 있는지는 몰랐다. 제대로 조사했다면 알 수 있었겠지만, 딱히 그럴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벽 뒤에 있는 건 막대한 금은보화였다. 아마도 달라만 후작이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리라. 이곳은 그가 평생을 모든 재화가 잠든 보물창고였다.

물론 프레이와 리키의 시선을 끌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재화들을 흙발로 짓밟으며 움직였다.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간 시점에서 리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서 프레이를 보았다.

“로드의 권능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아니.”

“공간.”

“…….”

“그는 공간을 지배한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하지만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점이 여럿 있었다.

9성의 마법사만이 펼칠 수 있는 앱솔루트 필드조차 로드의 앞에선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저갱이라는 공간에 의식만을 분리해서 가두는 것도 가능했다.

공간을 지배하는 권능이 있다면 그가 선보인 힘이 설명이 갔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나?”

“아니.”

“설령 네가 9성의 마법사가 되더라도 로드를 이기는 건 요원하다는 뜻이다.”

앱솔루트 필드에 대해 알고 있는 말투였다. 프레이는 리키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9성의 경지를 이룬다고 로드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건 귀환한 이후 프레이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리키는 그 추측이 사실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어포슬들을 노리는 거잖아.”

“그래. 하지만 너도 보았겠지? 일루니늄. 그 금속이 있다면 데미갓은 처벌을 받지 않고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 더 이상 어포슬의 힘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그 말이 맞다. 레이린이 그 금속에 대해 설명했을 때 프레이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속시간이 짧다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제한 없이 힘을 발휘하면 하나의 도시를 지우는 데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 명백하니까.

“그렇다고 곧바로 어포슬을 팽하지는 않겠지. 일루니늄을 무한정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했으니까. 그러나 어포슬에 대한 가치가 떨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포기하자고?”

“…….”

리키는 침묵했다. 프레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스릉.

그가 칼을 뽑았다. 프레이가 자신도 모르게 마나를 끌어올리려던 찰나, 그의 칼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스걱.

“꺼… 억…….”

암막 속에서, 한 존재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

주름이 자글자글한 추한 얼굴, 프레이는 순간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에 큰 상흔을 입은 존재가 다름 아닌 아포칼립스 중 하나인 아난타였던 것이다.

“리… 키…….”

아난타가 분노를 터뜨렸다. 리키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쥐새끼처럼 엿듣는 건 재밌었나?”

“역시… 네놈이 히드라를…….”

“그래. 내가 죽였다.”

철컥.

다시 한 번 리키의 칼이 뽑혔다. 아난타의 몸이 잘려 나갔다.

프레이가 믿기지 않는 눈으로 리키를 바라보았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히드라를 베었을 때처럼 돌발적인 행동이었으나, 그때와는 장소도, 상황도, 상대도 다르다.

이곳은 로드를 비롯한 아포칼립스들이 머무는 성이고, 지금 리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베어 버린 것도 조무래기 데미갓이 아닌 독의 권능을 가진 아난타였다.

리키가 아난타의 시체를 가리켰다.

“저건 감시 목적으로 내게 붙여 둔 더미다. 곧 놈의 본체도 이 사실을 알아차릴 테니까 서둘러야 돼.”

리키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칼을 뽑은 다음 천천히 심호흡했다.

“스으으…….”

쿠르르.

리키의 몸에서 엄청난 신력이 폭사되었다. 프레이는 그의 작은 몸에서 나오는 힘에 전율했다.

‘이건… 로드와 동급……!’

창고만이 아니다. 이 성, 아니. 산 전체가 리키의 신력에 떨리고 있다.

철컥.

프레이는 리키가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칼이 천천히 칼집에 미끄러져가는 모습만을 보았다.

리키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느껴졌다. 땀도 흘리고 있다.

다만 수확은 있었다.

“…역시 로드의 결계. 베어 내기 여간 까다롭지 않군.”

리키의 앞에 있던 공간이 갈라졌다.

“들어가서 기다려라.”

“너는?”

“곧 갈 거다.”

“…….”

“왜? 나를 못 믿겠나?”

리키를 아직까지 못 믿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지금 그는 무언가 결심을 굳힌 얼굴을 하고 있다.

“네가 못 올 것 같아서.”

“하하…….”

프레이가 솔직하게 말하자 리키가 드물게 웃음을 터뜨렸다. 드물게? 아니. 저렇게 소리 내어 웃는 건 거의 처음 들어 보는 것 같다.

그가 미소를 머금은 채 손짓했다.

“괜찮으니까 가라.”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인 채 갈라진 공간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갈라진 공간이 순식간에 메꿔졌다.

리키는 숨을 고르며 그 자리에 섰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리고 네 명의 인영이 천천히 창고로 들어왔다.

아포칼립스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나.]

“클클…….”

노즈독과 아난타는 그럴 줄 알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반면 레이린과 아그니는 아직까지 충격에서 헤어나온 모습이 아니다.

“정말 네가 배신자일 줄은 몰랐어.”

“리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냐?”

무슨 생각?

말해 줘도 알지 못하겠지. 대화로 설득할 수 있는 상대였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데미갓이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하고,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형성된 사고방식과 견해는 거대한 물줄기와 같아서 도저히 그 방향을 바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로드의 결계마저 베었군. 어포슬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녀석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우리 앞에 선 거고.]

“그래.”

[고작 필멸자 따위를 위해서… 하. 정말 미쳐 버렸구나. 리키. 이게 네가 말한 변화냐?]

리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프레이를 살리는 건 그에게 있어 부수적인 일이다.

로드는 자신에게 내놓은 합의점, 어포슬을 죽이고 100년간 동면에 빠지는 것. 리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로드의 말대로다. 그가 동면에서 깨어났을 때엔 이미 고민할 일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일루니늄을 발견한 지금, 100년이란 시간은 데미갓이 완벽하게 대륙을 정복하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건 리키에게 있어 죽음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리키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로드는 어디 있나?”

[흥… 로드에게 애걸이라도 할 생각이냐? 한 번만 봐달라고?]

노즈독이 비웃었다.

[아쉽게 됐구나. 로드는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너를 살리라는 말도 하지 않았지. 동포를 우리 손으로 죽이는 건 아쉽게 됐지만, 너는 도를 넘었어.]

“착각하고 있군.”

[뭐?]

“한 가지 재밌는 걸 알려 주지. 서클들이 우리 다섯을 동급으로 놓고 있더군. 아포칼립스라는 이름으로.”

“클클. 놈들치고는 꽤 정확한 진단이지. 어떻게 우리의 힘을 재단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난타가 낮게 웃었다. 그러나 리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드가 오지 않은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률이 대폭 올라갔다.”

레이린이 그 말에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키 너, 우리 네 명을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거라 말하는 거야?”

“…네 힘은 알고 있다, 리키. 네가 우리들 개인보다는 강할지도 모르지만 그래 봤자 아주 근소한 차이다.”

아그니의 말에 리키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와는 다를 거다. 이유를 하나 말한다면.”

리키가 칼을 뽑으며 데미갓들을 직시했다.

“너희들과 나는, 동급이 아냐.”

* * *

프레이가 이동된 곳은 어두운 동굴 속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아니,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동굴의 끝에 쓸쓸하게 무덤이 있었다. 프레이는 홀린 듯 그곳으로 걸어갔다. 무덤에는 조촐하게 칼 한자루가 꽂혀 있었다.

“이 칼은…….”

디우키드.

검호제 루시드의 칼.

그럼 이 무덤의 주인은…….

[여기 있었군.]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프레이는 오싹 소름이 끼쳐서 뒤를 돌아보았다.

[너인가? 내 가장 오래된 동포에게 혼란을 야기한 이물질이.]

로드.

그가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뱉으며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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