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로드 (3)
“헛소리는 그만해라.”
“리키, 너 정말 정신이 나가 버린 거야?”
데미갓들의 표정에 분노가 어렸다. 당연한 반응이다. 방금 리키의 말은 일선을 넘었다. 여태껏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아그니와 레이린조차 흉악하게 뒤틀린 표정으로 리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것은 노즈독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리키를 찢어죽일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로드가 공개하지 않으면 너도 드러내지 않아? 웃기고 있군. 로드와 네가 동등하다고 착각이라고 하고 있나?]
“착각하고 있는 건 너다, 노즈독. 모든 데미갓은 대등하다. 그를 로드Lord라고 부르는 건 단순히 솔선해서 우리를 단결한 첫 번째 데미갓에 대한 경의의 의미가 전부지.”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로드의 역할과 업무는 오로지 그만이 감당할 수 있다. 우리로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화할 수 없는 일들을 그 혼자서 수행하고 있단 말이다.]
“그렇겠지. 하지만 로드는 못하고 우리만 할 수 있는 일들도 있다.”
[이놈……!]
노즈독의 몸에서 숨 막힐 듯한 사기死氣가 치솟았다. 이번에는 리키도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것만으로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진 것처럼 긴장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까보다 훨씬 심각한 분위기를 깬 것은, 이번에도 로드였다.
[그만.]
그러나 이번에 노즈독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귀화가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 막지 마라, 로드. 지금 리키가 수상한 건 명백한 사실이다. 나 혼자만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닐 터.]
“클클. 그렇지.”
아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히드라가 죽은 시점부터 리키에 대한 의심이 크게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 정도의 실력자를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는 건 이곳에 있는 자들밖에 없으니.
아그니와 레이린은 아직까지 망설이고 있지만, 아까보다는 의심하는 느낌이 강해졌다. 리키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노즈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노즈독, 네 의심은 타당하다. 하지만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조금 더 언행에 주의를 기울여라.]
노즈독이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러나 로드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분노하던 그가, 로드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의 몸에서 씻은 듯이 사기가 사라졌다. 그러자 리키도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내가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 건, 리키가 자신의 의심을 덜기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에게 의심받는 것 따위는 별 상관도 없다는 저 태도. 거기에 부아가 치민다.]
[…….]
로드가 순간적으로 침묵했다. 노즈독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한참이나 가만히 있던 로드가 툭 말했다.
[알겠다.]
“알겠다니?”
레이린이 어리둥절하게 묻자 로드가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모임이 끝나기 전까지, 리키가 배신자인지 아닌지 반드시 밝혀내겠다.]
“…….”
좌중에 침묵이 맴돌았다. 로드가 허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로드가 리키를 보며 말했다.
[물론 너도 협력해 주겠지?]
“그래.”
[좋아.]
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너희들의 어포슬을 보여 주겠나?]
“…그건.”
“음…….”
[…….]
로드의 말에 데미갓들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들은 힐끗 리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리키가 배신자라면 이곳에서 어포슬을 드러내는 건 아주 위험한 짓이다.
그러자 로드가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젓는다.
[걱정할 것 없다. 지금 이 주위에는 결계가 만들어져 있다. 들어오는 건 가능해도 나갈 수는 없는 일방통행적인 결계지.]
그래서 흑룡 기사단이 들어올 수 있었던 건가. 프레이는 그리 생각하며 로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배신자가 누군지 확정될 때까지 절대 결계를 풀지 않을 생각이다. 일주일, 한 달, 혹은 일 년이 걸리더라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데미갓이 억지로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부터 하지.”
성큼 나선 건 아그니였다. 그는 애초에 자신의 어포슬을 드러내는데 별다른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여담이지만, 프레이는 그를 보며 이반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흥미가 있는 분야에는 영혼까지 불살라 버리는 열정을 보이지만, 반대로 관심이 없는 것에 한해서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가 엿보였던 것이다.
아그니에게 있어선 이 모임이 후자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어포슬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면을 벗어라.”
아그니의 뒤에 서 있던 어포슬이 한 발자국 걸어 나오더니 천천히 가면을 벗는다.
“…….”
드러난 얼굴은 프레이가 처음 보는 여자의 것이었다. 오뚝한 콧날에 꾹 다문 입술, 그리고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후드 사이로 삐져나온 붉은 머리카락은 용암을 녹여내 만든 것처럼 색이 진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러나 프레이는 그녀와 자신이 구면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두근.
심장의 고동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아마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피닉스.’
모습은 다르지만 그녀는 토르쿤타의 시체에 두고 왔던 피닉스였다. 프레이는 그 사실을 확신했다.
그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토르쿤타의 심장을 나누어서 먹었으니까. 조금 과장하면 프레이는 그녀가 자신의 반신半身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간의 모습을 가지게 된 건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피닉스는 거의 죽어 가는 상황에서 토르쿤타의 사체, 그리고 반 덩이 남은 심장을 흡수했다.
그곳에 담긴 막대한 에너지는 육체를 수복하기 충분했을 것이다. 아니, 아예 재구성을 하고도 남을 정도다. 그리고 변화된 모습은 그녀의 의지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그니의 어포슬이 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강제적으로 어포슬이 된 건가? 아니면… 자의적인 건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프레이는 후자가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레이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껍데기는 인간인데 속은… 잘 모르겠네. 뭐야. 그건?”
“피닉스. 이스파니아 산맥 근처를 지나갈 때 발견했다. 일반적인 피닉스보다 수십 배는 강한 개체야.”
“피닉스? 요즘 구하기 힘들던데 잘도 발견했네. 그런데… 뭔가 이것저것 섞인 것 같은데. 혼혈… 은 아닌 것 같고. 흐음. 확실히 유니크한 개체야. 흥미가 생기는걸.”
레이린의 눈이 반짝였다. 아마 로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해부를 하고 싶다는 둥, 어처구니없는 말을 꺼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음.]
로드의 말에, 이번에는 아난타가 손짓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어포슬이 가면을 벗었다.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흐릿한 인상에 죽은 눈동자, 갈색 머리카락까지.
노즈독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아난타. 로드의 앞이다]
“그랬지. 젠타, 벗어라.”
“…….”
젠타라고 불린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뜯었다. 그러자 안면가죽이 아무렇지도 않게 뜯겨나가며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날카로운 인상, 그보다 특징적인 것은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다.
‘암살자인가?’
인피로 만든 가면에 절제된 살기. 프레이는 눈앞의 남자가 암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만치 않은 존재다. 아마 암살자로서 독보적인 경지에 위치한 강자임은 분명하다.
‘저 정도 암살자가 작정하고 모습을 숨긴다면…….’
설령 수천 명의 병력이 있다고 해도 찾기가 요원할 것이다. 아난타는 그 점에 주목했겠지. 4,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음흉한 늙은이다.
[다음.]
노즈독의 차례였다. 그가 손짓하자 어포슬이 가면을 벗었고, 드러난 건 붉은 안광을 터뜨리고 있는 악마였다.
“악마? 악마잖아?”
레이린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악마를 어포슬로? 아니. 그것보다 저건… 악마의 본체인 것 같은데?”
게다가 만만한 하급 악마도 아니다. 저 정도 악기를 선보이고 있다면 최소 상급 악마일 것이다.
“어떻게 현계시킨 거야?”
[조력자가 있었다.]
조력자. 그 말에 프레이는 이리스가 떠올랐다. 그녀는 악마의 힘을 온전히 보존한 채 대륙에 현계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연구했다. 당시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4,000년이나 흘렀으니 뭐라도 건지긴 건졌을 것이다.
게다가 오이딘이 아수라의 소환진을 알고 있던 것도 수상하다.
‘…노즈독은 이리스와 끈이 있다.’
프레이는 이 추측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레이린이 턱짓하자 뒤에 있던 어포슬이 가면을 벗는다.
드러난 건 차가운 얼굴을 한 여인이었다. 30대 초반으로까지 보이는 외모였으나, 프레이는 그녀의 나이가 그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리키는, 레이린의 어포슬이 이사카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프레이도 그 사실에 동의했다. 아니, 그가 아니더라도 블레이크 가문의 핏줄일 거라 생각했다.
장남인 미샤엘. 혹은… 차남인 하인츠.
그 둘 중 누구도 아니었다. 레이린의 어포슬은 다름 아닌 블레이크 가문의 안주인인 레티아 블레이크였던 것이다.
[좋군. 리스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안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나의 동포들이여.]
로드가 흡족한 듯이 말했다. 어포슬들은 모두 가면을 썼다.
프레이는 그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야 궁금하겠지. 이곳에 있는 어포슬들 중 유일하게 가면을 벗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로드의 어포슬은, 이 자리에 없었다. 처음부터. 애초에 그는 자신의 어포슬을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는 뜻인가. 아니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자리로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아포칼립스의 어포슬. 프레이는 그 존재들을 모두 파악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상대들이었다. 본신의 힘을 가진 채 현계한 악마, 블레이크 가문의 안주인, 자세한 신원조차 모르는 독보적인 경지의 암살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언젠가 재회를 약속했던 존재였다.
아니. 그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시기상조다. 프레이는 로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배신자가 누군지 확정될 때까지 절대 결계를 풀지 않을 생각이다. 일주일, 한 달, 혹은 일 년이 걸리더라도.]
로드가 직접 만든 결계. 당연히 워프도 안 될 거고 리키의 시공간이동도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는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해서든 배신자를 추출할 생각이다. 당연하다. 아포칼립스의 어포슬들의 정체가 모두 드러났으니까. 심지어 로드는 별것 아닌 이유로 그 일을 강행했다.
이유는 한 가지다.
로드는, 배신자를 찾을 자신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상황이 웃기게 되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단절된 공간, 죄여 오는 로드의 손길, 이해할 수 없는 리키의 행동들까지.
자신이 이곳을 살아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