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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91화 (91/857)

91화 로드 (1)

샤를을 비롯한 서클원들은 이후에도 칼의 데미갓을 계속 추적했다. 몇 번이고 놓칠 뻔했지만 어떻게든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따라잡는다는 말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얘기하면 그들이 루페이 근처에 있는 야산에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따라잡을 수 있던 거니까.

그런데도 더 접근하지는 못하겠다. 인적이 드문 산에서 갑작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그게 꼭 미행하는 자신들을 꿰어내려는 함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도 야산과 조금 떨어진 곳에 머물며 저쪽의 동향을 살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에 짙은 의아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산 곳곳에 있는 특정 장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곳이지?”

“옛날에 쓰던 전초기지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제롬 베르너만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곳은… 노예 사업장이었군.”

그는 루아노블 사람이기 때문에 이 나라의 사정에 다른 이들보다 밝았다. 데미갓이 휩쓸고 간 자리에 시체는 없었지만 철로 된 우리와 몇 가지 도구만을 보고도 그 사실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그 또한 자신의 나라가 최근 청렴치 못한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다.

‘설마 루페이의 바로 옆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을 줄은.’

제롬은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다행히 좌중에 있는 자들은 루아노블의 부정부패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지금 데미갓이 보여 주고 있는 행보가 너무나도 묘했기 때문이다.

‘대체 뭐가 목적인 거지?’

한창 그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다.

“저게… 대체.”

셰퍼드가 입을 벌렸다. 나머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같았던 하늘이 돌연 반으로 쩍 갈라진 것이다. 아무리 셰퍼드가 7성의 마법사라고 해도 저런 광경을 보고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냉정한 건 샤를이었다. 그녀는 연륜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고 주장하듯이, 날카로운 송곳니로 입술을 깨물었다.

“야단났군.”

“왜 그럽니까, 라운더 샤를?”

“저 현상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우리는 이미 데미갓의 결계 내로 들어왔다는 뜻이야.”

“…그 말은.”

“그래.”

샤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모임이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 * *

프레이는 갑자기 후끈한 열기를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 더운 날씨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열기의 근원지는 하늘에 있었다. 구름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낸 건 붉게 타오르는 남자의 형상을 한 거대한 존재였다. 하늘 전체를 불태울 것처럼 맹렬히 타오르고 있다.

“아그니다, 일전에 말했었지? 너희들이 아포칼립스라고 부르는 존재 중 하나다.”

“…….”

“이제부터는 언행에 조심해라.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가장 좋겠지.”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키의 말대로다. 괜히 입을 열어서 단서를 주는 것보다 아예 조용히 있는 편이 나았다.

리키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하늘을 보았다.

산보다 거대했던 아그니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더니, 이윽고 사람만 한 크기가 되었다. 방금 전까지의 모습이 화염의 형상을 띤 초월체라면, 지금은 그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 남자였다.

프레이는 데미갓을 몇 체나 토벌한 경력이 있지만 이런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큰 폭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건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드래곤만 해도 폴리모프라는 마법이 있으니까.

‘혹시 리키도?’

진짜 모습이 따로 있는 걸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 상황에서 물을 수는 없었다. 어느새 아그니가 지척까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프레이처럼 로브로 몸을 감싸고 가면까지 쓴 인영이 한 명 서 있었다.

“내가 제일 빨리 온 모양이군.”

“그렇다.”

“흠… 하지만 조금 의외였다. 네가 먼저 청소를 하겠다고 입을 뗄 줄은 몰랐으니까.”

청소. 야산에 자리를 잡았던 달라만을 말하는 건가.

리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침 이 근처에 있었으니까.”

“그렇군. 아무튼 고생했다.”

그때 아그니의 시선이 프레이에게 향했다.

“그게 네 어포슬인가?”

“그래.”

“흠. 과연.”

아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로드의 대면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되겠군. 제법 괜찮은 놈이야.”

“너도 드디어 어포슬을 만든 모양인데.”

“그렇다. 눈에 차는 녀석을 구하느라 애 좀 썼지.”

그때 아그니 뒤에 서 있던 어포슬의 가면 속 시선이 프레이에게 향했다. 잠시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순간.

“……!”

“……!”

상대의 당황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프레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려고 애썼다.

‘이 녀석이 왜 여기에……?’

꿈에도 상상 못했다. 하지만 확실하다. 가면 너머로도 확실하게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프레이는 황급히 표정을 추슬렀다. 다행히 아그니는 프레이가 당황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그는 그대로 프레이를 지나쳐 성의 안으로 들어갔다. 프레이는 이것에 대해서 리키와 상담하고 싶었으나, 그럴 틈이 없었다.

돌연 허공에 거대한 일렁임이 나타났다. 프레이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하나만 해도 벅찬 기척이 세 개나 느껴져서 순간적으로 호흡하기가 괴로워질 정도였다.

공간이 장막처럼 촤악 갈라지며 그 사이로 세 명의 인영이 걸어왔다.

회색 머리카락의 젊은 여자와 녹색 귀기를 뿜는 해골, 그리고 등이 굽은 추한 노인.

레이린과 노즈독, 그리고 아난타.

프레이는 그들과 자신 사이에 하나씩 악연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이린은 블레이크 가문을 암중에서 지배하고 있는 흑막이다. ‘프레이’가 신력과 마나를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한 데미갓인 것이다.

노즈독은 오이딘이라는 미끼를 써서 자신을 끌어내려고 했었고, 오이딘이 죽기 직전 환영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도 만만치 않은 압박감을 느꼈지만, 직접 눈앞에 마주하니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아난타는, 루카스였을 적 싸웠던 데미갓 중 하나다.

‘괴물 같은 늙은이.’

당시에 루카스를 비롯한 슈하이저와 이리스, 루시드, 카사진의 힘을 모두 합쳤는데도 저 괴물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카사진이 맹독에 걸려서 무려 한 달간 생사를 헤맸다.

물론 아난타에게도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패배는 패배였다. 당시 루카스 일행은 데미갓을 몇 처리하며 한창 자신감을 높이던 중이었기 때문에 더 충격적이었다.

아난타는 그때와 비교해 옷차림 정도를 제외하면 크게 달라진 모습이 아니었다.

“늦지는 않은 것 같네.”

“클클. 아그니가 제일 빨리 오다니. 별일이야.”

아난타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웃으며 성 안을 보았다. 그곳에 있는 아그니의 신력을 느낀 것이다.

리키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보았다.

“너희 셋, 같이 있었나?”

“응.”

“무슨 일로?”

“로드한테 재밌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걸 좀 확인한다고.”

“…재밌는 이야기?”

“회의가 시작하면 말해 줄게. 너도 분명 기뻐할 거야.”

레이린이 싱긋 웃으며 말했으나, 리키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여태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노즈독이 성 바깥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침입자가 있군.]

“뭐?”

[말 그대로. 침입자가 결계를 뚫고 들어오려 하고 있다. 아니. 벌써 들어왔군. …이상한 일이야.]

노즈독의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가 리키에게 향했다.

[우리 중에서 가장 기척이 민감한 네가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리키, 어떻게 된 일이냐?]

“…최근에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감각이 조금 둔해진 것 같군.”

[…….]

잠시 침묵하던 노즈독의 고개가 흐릿하게 끄덕여졌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그럼 쥐새끼들은 내가 없애겠다.]

“괜찮나? 패널티가 가해질 텐데?”

[레이린이 말했지 않나. 로드한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 순간 프레이는 얼굴 가죽 하나 없는 노즈독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확인은 끝났다. 아주 재밌고 설레는 일이었어.]

다음 순간, 노즈독의 모습이 사라졌다.

프레이는 그의 존재감을 뒤쫓았다. 다행히 성 바깥 풍경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내심 당황했다. 공터에는 어느새 수백 기나 되는 기사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광택이 번쩍번쩍 나는 검은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리키가 중얼거렸다.

“…워프를 타고 넘어온 거군.”

중얼거리는 듯 보였지만, 프레이에게 설명해 주는 듯한 말투였다.

“흑룡 기사단까지 보낼 줄은 몰랐어. 생각보다 달라만 후작의 사업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나.”

“리키, 루아노블은 네 담당 구역일 텐데. 저놈들이 왜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것이냐?”

아난타의 말에 대답한 건 레이린이었다.

“구역은 무슨. 손 뗀 지 수백 년은 지났잖아. 나라 돌아가는 꼴이 아주 가관이더구만. 그거 알아, 리키? 로드가 루아노블에서 모이자고 한 이유.”

“아니.”

“청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야.”

레이린의 흑룡 기사단을 가리켰다.

“이건 그 시작.”

하늘에 선 노즈독이 밑을 내려다보았다. 흑룡 기사단이 그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너무 멀다. 저들의 검격으로는 상공에 있는 노즈독에게 데미지를 줄 수 없다.

노즈독은 느긋한 동작으로, 살점 하나 없는 손가락을 폈다.

그곳에 꾸물꾸물한 검은색 덩어리가 뭉치기 시작했다.

번쩍.

검은색 덩어리는 순식간에 수백 개의 가시가 되어 뻗어져 나갔다. 프레이는 저 가시가 수가 정확히 흑룡 기사단의 머릿수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시는 단단한 흑색 투구를 두부처럼 꿰뚫었다. 잠시 부르르 떨던 기사단이 동시에 쓰러졌다. 더 볼 것도 없다.

일순간에 흑룡 기사단이 전멸한 것이다.

[이것이 죽음이다.]

흡족한 듯이 중얼거린 노즈독의 몸이 사라지더니, 리키의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리키가 이해가 안 가는 얼굴로 말했다.

“수백 명이나 죽이다니… 패널티를 받기까지 여유가 있다고 해도,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

[흐흐. 더 이상 그 걱정은 필요 없다.]

“뭐?”

[기뻐해라, 리키. 우리는 신의 처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

프레이의 가면 속 얼굴이 뒤틀렸다. 리키의 놀람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때였다.

[안으로.]

프레이는.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절대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목소리다. 대성당에서 울리는 신의 목소리처럼 성스러웠으나, 이 목소리의 주인은 그렇게 신성한 존재가 아니다.

프레이는 박살난 성벽의 안을 바라보았다.

아그니의 옆에, 어떤 존재가 조용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존재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그것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만큼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형상은 인간 남성이었다. 그러나 이목구비가 없어 달걀처럼 민둥민둥한 꼴이었다. 하다못해 머리카락조차 없었다. 탄탄한 근육질이 그대로 드러난 육체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몸에서는 백색의 빛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4,000년 전과 한 치도 다름없는 모습.

[안으로 들어오라, 친애하는 나의 동족들이여.]

로드가 부드럽게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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