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모임 (4)
‘설마 이 팔찌를 눈치챈 건가?’
프레이는 내심 당황했으나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그럴 리는 없다. 대현자의 스태프가 팔찌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현대에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슈하이저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스트로우 네클레스, 그곳의 간부인 셰퍼드조차 이 팔찌가 유물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생각을 마친 프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그, 그러지 말고 조금만…….”
“왜 이 팔찌에 흥미를 갖는 겁니까? 그냥 평범한 팔찌인데.”
프레이가 무심하게 말하자 헥터가 허허 웃었다.
“평범한 팔찌라니… 저한테는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
“뭐.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그 팔찌의 진가를 깨닫지 못할 테니까.”
아마 웬만큼 안목에 자신 있는 감정사조차 그럴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다르다. 헥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저건 정말로 엄청난 물건이다. 그는 쿵쿵 뛰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켰다. 연금술사의 탐구심이 사납게 솟구치는 걸 억지로 가라앉혔다.
“제 입으로 말하기엔 뭐하지만 저는 뛰어난 연금술사입니다. 적어도 대륙 전체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는 든다고 확신합죠.”
확실히 자신의 입으로 말할 내용이 아니기는 했다. 그러나 아예 틀린 말도 치부할 수는 없다. 적어도 눈앞에 있는 남자는 여태까지 만난 자들 중 최초로 슈하이저의 팔찌에 대해 눈치를 챈 것이다.
“마도구를 보고 마지막으로 감탄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그 팔찌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물건입니다. 추측이지만 마도학이 가장 성행했다던 빛의 시대의 유산이겠지요.”
연금술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느끼는 자격지심이었다. 헥터는 충분한 재료가 갖춰진다고 해도 저 팔찌 정도의 물건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샅샅이 뜯어보고 싶다. 그의 눈에 순수한 탐구심이 들끓었다.
프레이는 슈하이저를 인정하는 그의 말이 듣기 좋았으나, 그렇다고 로드의 끄나풀이라는 그에게 팔찌를 보여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괜한 곳에서 덜미를 잡힐 수는 없는 것이다.
“안 됩니다.”
“…후우. 역시 말로는 안 되는가.”
헥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프레이도 신력을 끌어올렸다.
쿵!
헥터는 그대로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부탁드립니다!”
“무, 무슨…….”
“제발! 한 번만 보여 주세요!”
그리 말하고 프레이의 앞까지 기어오더니 로브자락을 붙잡는다. 프레이는 아연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헥터의 얼굴은 필사적이다 못해 애처로울 정도였다. 이것도 연기인가? 아니. 연기가 아니라도 허락할 수는 없다.
프레이는 좀 더 단호하게 말을 하려다 몸을 멈칫거렸다.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연금술사.’
헥터는 자신을 그리 소개했다. 그렇다면 아델리아보다도 뛰어난 연금술사일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델리아도 대현자의 스태프의 진가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적어도 안목 면에서는 헥터가 그녀를 상회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뭐든 말씀하시죠!”
헥터가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프레이가 약간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대답을 해 준다고 팔찌를 보여 줄 생각은 없습니다만.”
“상관없습니다! 제 대답을 듣고 약간이라도 마음이 기울 수도 있으니까요!”
딱 프레이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 아델리아에게 했었던 질문을 다시 꺼냈다.
“100만 ME를 가진 핵으로 골렘을 만들 수 있습니까?”
“100만 ME의 핵? 으음…….”
헥터가 눈가를 좁혔다. 그리고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렵습니다.”
미친 짓이라고 단언했던 아델리아보다는 낫지만, 프레이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대답은 아니었다.
“그렇군요. 역시나.”
“역시?”
“제가 알고 있는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도 미친 짓이라고 말했는지라.”
그러자 헥터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흐음…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습니까? 그자가 말한 것들에 대해서.”
같은 연금술사의 의견이라 흥미가 동한 걸까? 상관은 없었다. 프레이는 아델리아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우선 100만 ME를 가진 핵을 만드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의견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일반적으로 아이언 골렘 1기를 만드는 데 1만 ME짜리 핵이 필요하니까요.”
아이언 골렘 1기라면 오거 10마리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정도였다.
즉 단순 계산으로도 하나의 골렘으로 1000마리의 오거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새삼 이렇게 말하니 100만 ME란 단위가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실감이 갔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드래곤과도 정면 대결에서 크게 밀릴 것 같지 않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육체에, 신경계는 미스릴을 사용해야 그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를 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식을 짜고, 명령어를 주입하고, 자아까지 확립하는 과정은 훨씬 까다롭다고도 말했고요.”
“…….”
헥터는 잠시 고개를 떨군 채로 무언가 생각하더니, 프레이를 보며 물었다.
“그자의 이름이 뭡니까?”
“말할 생각 없습니다.”
아델리아는 서클의 일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정체에 덜미를 잡힐 수 있으니 웬만하면 언급을 피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헥터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입조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로드의 명령이 있었거든요. 이미 떨어진 명령은 로드조차 번복하지 못합니다. 즉 여기서 있었던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는 것이 되지요.”
“…….”
“아무튼 당신이 말한 그자는 제법 연금술에 조예가 있군요. 그래 봤자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후후. 딱 백여 년 전의 제 모습을 보는 듯하군요.”
백여 년 전이라. 프레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대체 이 남자는 몇 살인 걸까?
“당신이 제가 아는 그 연금술사보다 뛰어나다는 겁니까?”
“물론.”
“…….”
“못 믿으시는군요. 그러면.”
헥터가 손뼉을 두 번 쳤다.
짝짝.
“네! 주인님!”
그러자 방금 전에 사라진 에일리라는 하녀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헥터는 에일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는 제가 직접 만든 골렘입니다.”
“그렇군요.”
“…….”
“…….”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헥터가 황당한 얼굴로 프레이를 보았다.
“그게 끝입니까?”
무슨 반응을 더 보여야 되는 건가? 프레이가 의아한 얼굴이 되자 헥터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에일리가 골렘인 걸 한눈에 깨닫는 통찰력은 있는데, 인형제작 자체에는 그리 깊은 지식이 없는 건가?’
묘한 남자였다. 그럼 에일리가 얼마나 정교하고, 엄청난 골렘인지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될 것이다. 헥터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에일리를 물렸다.
“혹시 당신은 100만 ME짜리 핵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
이것도 대답하지 않는다. 헥터의 표정이 곤란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속내가 짐작이라도 가야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거래라는 걸 진행할 텐데.
‘어떻게 해서든 저 팔찌를 보고 싶다.’
헥터는 지금 연금술에 짙은 슬럼프를 느끼고 있었다. 터놓고 말해서 수십 년 동안 진전이 없었다. 다른 이의 연구 서적이나 마도구, 골렘들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아무런 자극을 느끼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 대부분의 실력은 형편없었으니까. 하루하루 몸과 정신이 썩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라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그러면 안 된다. 과거에 모든 것을 잃었던 헥터에게 다시 살아갈 원동력을 준 것이 바로 연금술이었다. 그러나 이대로가면 연금술에조차 흥미를 잃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그런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발견한 프레이의 팔찌는 헥터에게 있어 일종의 구원이었다. 저것만 제대로 살펴볼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프레이의 입이 열렸다.
“만약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그 핵의 에너지를 견딜 골렘을 만들 수 있습니까?”
“…….”
헥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프레이는 그 얼굴이 이 남자의 진짜 얼굴이라고 생각되었다.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이 있는 자가, 정말로 진지하게 업무에 대해 생각할 때에 나오는 얼굴.
그는 한참이나 고민했다. 멍하니 손가락을 두드리거나, 무언가를 중얼거리거나,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거나.
프레이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헥터의 입이 열렸다.
“가능합니다.”
“…….”
“못 믿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헥터가 비죽 웃었다.
“가장 힘든 건 재료를 구하는 겁니다. 오리하르콘과 미스릴이 대량으로 필요할 테니까. 알다시피 그 두 가지 금속은 그저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맞는 말이다. 둘 모두 금속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귀중한 물건이다. 무작정 돈이 있다고 원하는 만큼 매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다루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하지만 꼭 그 금속들에게 구애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대체할 금속을 알고 있지요. 장담하는데, 저보다 많은 금속을 알고 있는 연금술사는 없을 겁니다.”
정말로 이 남자가 아델리아보다 뛰어난 연금술사일까? 프레이의 미묘한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헥터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연금술사가 뛰어나다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제가 알기로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는 딱 세 명입니다.”
“당신을 포함해서?”
“저를 포함해서.”
“…….”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프레이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머지 둘은?”
“카스트카우 제국의 제11마탑주. 그리고 북쪽 끝에 있는 설원에 있는 아크리치.”
제11마탑주와 아크리치.
상상도 못 했던 인물들이었다. 특히나 전자의 경우가 그랬다.
“마탑은 총 10개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다. 하지만 제11마탑주는 존재합니다. 그는 카스트카우 제국의 비밀스러운 수호자 중 하나지요.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설원의 아크리치는?”
“…….”
헥터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프레이를 보며 말했다.
“그자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마법사입니다. 하지만 연금술에 관한 지식도 저나 제11마탑주를 초월하는 빌어먹을 괴물이죠. 그야 살아온 세월이 1,000년을 훌쩍 넘으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
“아무튼 그에게 무언가 부탁할 생각은 접는 것이 좋을 겁니다. 지하 설원에 있는 자신의 던전에 처박혀서 마도학에만 매진하고 있는데, 성격이 지랄 같아서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겁니다.”
그렇게 말하니 더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나 프레이가 무엇보다도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헥터입니다.”
“이름을 묻는 게 아니라. 카스트카우 제국의 수호자, 그리고 1,000년을 산 아크리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헥터는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지금은 꼴이 비참하게 되었기는 한데, 그래도 옛날에는 제법 잘나갔던 종족의 일원이었습니다.”
옛날에 제법 잘나갔던 종족?
“보검으로도 베지 못하는 단단한 비늘, 태양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몸뚱이, 그 어떤 동력 기관보다 초월적인 심장, 그 모든 것을 뺏긴 채 이런 허약한 몸뚱이에 갇히기는 했지만.”
그 말을 모두 들은 프레이의 표정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살아온 세월에 부끄럽지 않은 지식을 인정받아 목숨은 부지했습죠. 어쩌면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비웃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설마.”
헥터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드래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