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강해질 수 있는 수단 (1)
프레이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얘기가 진행되는 동안 어느새 식었는지 더 이상 김이 피어오르고 있지 않다. 그러나 프레이는 그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신력과 마법을 같이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
리키는 확신을 담아 얘기하고 있었지만, 프레이는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다시 한 번 부정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머리에 돌연 스쳐가는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많이 변했구나. 각성을 한 거겠지. 그래. 너한테도 블레이크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거군.]
[네가 마법을 배우질 않길 바랐다. 진심으로.]
[서클은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하인츠 블레이크.’
블레이크 가문의 차남이자 프레이의 둘째 형. 그는 블레이크 가문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프레이에게 몇 가지 충고를 주었다.
프레이는 그의 충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받아들였다고도 할 수 없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만큼 어울리는 표현은 없을 거다.
프레이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 번 리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프레이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린 듯,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너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블레이크 가문의 삼남 프레이 블레이크. 절망적일 정도로 마법의 재능이 부족해 어렸을 때부터 거의 내놓은 자식처럼 취급을 받다, 쫓겨나듯 아카데미에 입학했다고.”
“…….”
“그렇다면 이사카 블레이크도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지. 마법에 대한 재능에 눈을 떴다는 정보를 들은 이후에 너를 찾았지만, 그때부터는 네 쪽에서 행방을 숨겼겠고.”
“맞아.”
방금 리키가 입에 담은 것들은 그리 대단한 정보가 아니었다. 프레이가 내놓은 자식이라는 것은 필라트의 도시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고, 그에 대해 조금만 수소문해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프레이가 궁금한 건 블레이크 가문에 대해서였다.
“대체 블레이크 가문이란 어떤 곳인 거냐?”
“거대한 실험장이지.”
“뭐……?”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거대한 실험장이라니? 제국에서도 명문가로 이름 높은 블레이크 가문이?
“마나와 신력, 상극에 위치한 두 개의 힘을 조화시키기 위한 연구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계속 진행되어 왔다. 그러다가 아포칼립스 중 하나인 레이린의 지휘 아래 본격적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지.”
“레이린.”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아포칼립스 중 하나라는 사실만으로 외워야 할 가치는 충분했다.
“수천, 수만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했다더군. 그러고도 레이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데미갓에게 있어 수백 년은 그리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모든 일에 있어 빨리 싫증을 내는 데미갓의 성질을 감안하면 그녀의 끈기는 대단했지. 그 정도 세월을 오직 실험과 연구에만 매진했으니. 그리고.”
리키의 시선이 프레이에게 향했다.
“블레이크 가문이 탄생했다.”
“…….”
프레이는 무거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블레이크는 카스트카우 제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가다. 그런 곳이 데미갓의 실험장이라면…….”
“카스트카우 제국은 특히 데미갓의 영향력이 짙은 나라 중 하나지.”
인간의 나라 중 가장 강력한 국가가 데미갓의 손아귀에 있었다니.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충격이었다.
“서클에 대해서도 거의 파악하고 있나?”
“그건 아니다. 놈들의 아지트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고 분산되어 있다. 도시 하나를 지운다고 해도 거의 타격을 입힐 수 없을 정도로. 게다가 그중에서도 서클 마스터나 라운더 같은 존재들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특정하기가 요원해.”
“그래도 너희들이 마음만 먹으면 모조리 찾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자 리키의 표정이 묘해졌다.
“너는 서클원이지만, 그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군. 서클은 결코 얕볼 만한 단체가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격이 떨어지는 놈들이긴 하지만 데미갓에 토벌에 성공한 적도 있어. 괜히 지난 수천 년간 데미갓을 귀찮게 군 게 아니란 말이다.”
“…….”
얕볼 만한 단체가 아니다.
프레이는 그 말에 동의했다. 트로우맨 링즈의 베니앙이나 근처에 있던 중소 서클, 그리고 아너 두겐자르나 루케스는 그에게 별다른 존재감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 안 되지. 아직 핵심 인원은 만나 보지도 못했는데.’
삼강의 다른 간부들은 물론, 서클 라운더나 마스터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속단할 수 없다.
아무튼 데미갓을 토벌한 경험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서클에 대한 신뢰도가 확 상승했다.
“내가 알고 있는 블레이크의 정보는 이게 전부다. 자세한 내막이나 과정은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너를 비롯한 블레이크 가문이 신력을 다룰 수 있다는 건 확실하지.”
이사카나 미샤엘, 그리고 하인츠까지.
프레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마도 이사카나 미샤엘은 데미갓의 수하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하인츠의 존재가 의문이다.
하인츠는 블레이크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다. 어쩌면 리키조차 알지 못하는 더욱 깊숙한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서클에 소속되어 있다.
‘배신한 건가?’
아니면 스파이? 모르겠다. 하인츠는 서클과 데미갓, 어느 곳에 속한 이로 분류해야 되는 것인가.
‘서클은 지금 블레이크 가문을 의심하고 있다.’
셰퍼드는 이사카가 데미갓과 접촉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게 벌써 수개월 전의 일이니, 지금은 그 의심이 더욱 짙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을지도 모르고.
지금 당장은 하인츠가 의심받지 않고 있다. 셰퍼드는 그에 대해 굳건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두겐자르는 하인츠를 두려워할지언정 적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추후, 블레이크 가문이 데미갓의 실험장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때도 지금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나 또한 의심을 받을 것이다.’
어렸을 때 버려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하인츠보다는 사정이 나을 수도 있겠으나, 그래 봤자 도토리 키 재기였다.
‘하인츠가 서클을 믿지 말라고 했던 것도 이해가 가는군.’
서클이란 단체를 의심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출신 내력을 염려한 충고였던 것이다.
“이야기를 되돌리지. 프레이, 너는 나와 함께 데미갓의 모임에 가겠는가?”
“당장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생각할 시간을 다오.”
“알겠다.”
리키는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오래 지체할 수는 없다. 신력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려면 최소 한 달은 필요하니까 그 전에는 말해라.”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아.”
프레이는 리키의 결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8성의 경지를 찾은 다음에 결정하겠다.”
“그러도록 해라.”
“그런데 이 결정은 이대로 복용할 수 없을 텐데… 비약으로 정제할 수는 없는 건가?”
결정을 정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이는 극히 드물다. 프레이가 알고 있는 건 연금술에 있어선 독보적인 지식을 자랑하는 아델리아뿐이었다. 그녀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이라면 아직 트로우맨 링즈의 아지트에 있을 텐데, 그곳의 좌표값도 알고 있으니까. 물론 결계 때문에 곧바로 안까지 이동할 수는 없겠지만 숲 바깥에서 부르면 충분히 마중을 나올 것이다.
하지만 트로우맨 링즈는 지금 한창 수련에 힘쓰고 있다. 괜히 찾아가서 그들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흠. 그러고 보니 그대로라면 인간에겐 아무런 쓸모도 없겠군.”
리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결정을 쥐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찾아와라. 그전까지 정제해 두지.”
저 정도 결정을 정제하는 데 하루라니. 프레이는 다시 한 번 데미갓이란 존재가 가진 힘을 실감했다. 리키는 결정을 쥐어들고는 공간의 한층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프레이와 스노우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바깥으로 나왔다.
스노우가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빛을 보며 말했다.
“솔직히 그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더군.”
그녀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신력과 마나의 조화라느니, 거대한 실험장이라느니… 하지만 그대의 표정을 보니 심상치 않은 일임은 분명해. 그렇지?”
“그래.”
아주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데미갓의 신력이 강력한 힘임은 부정할 수 없다. 만약 마법과 신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만 있다면, 프레이의 전력이 최소 두 배는 오를 것이다.
“나는 하루 동안 여기서 시간을 보낼 생각인데. 상관없나?”
“하루 정도는 괜찮다.”
“그렇군.”
프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바닥에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노우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무슨 진을 그리는 것이냐?”
“소환진이다.”
“응? 뭘 소환하려고?”
“아수라.”
“…마계의 대공 아수라? 그 대악마를 여기서 소환하겠다고?”
“그래.”
계약을 맺어야 되니까.
프레이는 스노우의 황당한 얼굴을 무시하고 속으로 뇌까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이 주위엔 옅은 결계가 쳐져 있었다. 아마도 리키가 만든 거겠지. 프레이조차 이제 막 눈치챌 정도로 잘 숨겨져 있었다.
‘저 결계만 있다면 아수라가 소환되면서 방출되는 악기惡氣도 숨길 수 있을 테지.’
리룬드에서 소환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이 최적의 기회다.
프레이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손바닥을 죽 그었다.
* * *
“생각보다는 힘드네.”
그녀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주위에는 몬스터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굴복을 선택한 이들이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지만, 아직 이들보다 몇 배나 되는 몬스터들이 불복을 선택했다.
“다 죽이는 수밖에 없겠어.”
순간적으로 그녀의 동공이 포식자의 그것처럼 세로로 쭉 찢어졌다. 그것도 잠시, 눈을 다시 한 번 깜박였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다시 새까맣게 돌아와 있었다.
그때였다.
“……?”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곧바로 밤하늘로 비상했다.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그녀가 지나간 곳에 불길 같은 잔향이 남았다.
‘드레이크 마운틴에 누군가 있어.’
불길한 느낌이다. 침입자의 위치는 산의 꼭대기였다. 던전의 입구가 있는 곳. 이상한 일이다.
지금의 그녀는 드레이크 마운틴을 비롯한 일대의 몇 개의 산을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했다. 간단히 말하면 그녀의 ‘영역’이 된 것이다.
때문에 영역에 누군가가 침입하면 그 존재를 단숨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다르다.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기척이 느껴졌다.
탓.
화산호수에 있는 작은 섬. 그곳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요사스러운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묘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인간 여자다. 그런데 왜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이…….
“윽…….”
순간적으로 강한 두통을 느꼈다. 그녀가 입술을 씹었다.
‘내가 아니야.’
토르쿤타.
이건 토르쿤타의 기억이다. 그의 기억이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 여자도… 던전에서 나왔었어.’
대체 언제? 수십 년? 아니면 수백 년 전?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여자는 강하다. 토르쿤타의 브레스를 가볍게 무시한 채로, 허깨비처럼 사라진 여자였다.
그녀는 두통을 꾹 참으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섬을 둘러보았다. 그 시선이 닿은 곳은 섬에 있는 나무 중 가장 거대한 나무였다.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 나무.
여자의 입이 툭 열렸다.
“…마지막 방이 열리다니.”
“뭐?”
“그밖에 풀 수 없는 문제였을 텐데.”
“무슨 소리지?”
“…….”
여자는 복잡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바람이 부는 듯하더니.
“…어?”
다음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