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오이딘 (1)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죽은 친우들의 최후를 듣는 건 프레이에게 있어 상처를 헤집는 것과 같은 행위였고, 뒤따르는 슬픔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반드시 확인해야 되는 일이었다. 프레이가 고개를 숙이자 흐루히랄이 손을 저었다.
“도움이 되어서 기뻐요, 루카스. 아니, 지금은 프레이였던가요.”
“편한 데로 부르십시오. …흐루히랄, 숲이 소란스러워질 겁니다.”
프레이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흐루히랄의 눈에서 묻어 나오는 슬픔을 눈치챘으나, 그렇다고 방금 한 말을 무를 생각은 없었다. 이미 결심을 굳혔으니까.
흐루히랄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 밤에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이고, 그 이상으로 숲에 깊은 상흔이 남을 것이다. 그건 그녀에게 있어 자식이 상처를 입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어떤 운명을 지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대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그 이상으로 평온과 행복, 좋은 인연들이 따르기를 바랐다. 프레이의 정신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감사합니다.”
프레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이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심상 세계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증조였다. 흐루히랄의 얼굴이 빛에 물들더니, 그대로 사라져 간다.
“…….”
육체로 돌아왔다. 프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새벽의 싸늘한 공기 속에서 잠시 존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하다. 프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하늘을 보았다. 해가 막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한나절 정도 지났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쯤 되었을 것이다. 여전히 감시자들의 존재가 느껴진다. 프레이는 굳은 몸을 풀며 시악스의 집으로 돌아갔다.
달칵.
문을 열자 한 손으로 물구나무를 선 채 팔을 굽혔다 펴는 이반의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한 손이 아니라 한 손가락이다.
검지 하나로 온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이천팔백십칠… 이천팔백십팔…….”
“…….”
상상을 초월하는 무식한 단위에 잠시 귀를 의심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걸 보니 단련을 시작하고 제법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카밀이란 여자와 만났다. 해가 완전히 지면 찾아온다더군.]
이반은 프레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전음을 날렸다. 점점 행동이 자연스러워진다. 프레이 또한 모르는 척 텔레파시로 대답한다.
[수고했다. 그리고 단련은 그쯤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왜? 이제 몸이 풀리려고 하는데.]
[오늘 밤에 오이딘과 결착을 볼 생각이라서. 만전을 기하는 게 좋을 거야.]
“…….”
이반의 기세가 잠시 일렁였다. 프레이는 순간적으로 그의 전신에서 치솟은 투쟁심을 보았다.
탓.
이반이 손가락 힘만으로 뛰어오르더니, 공중제비를 한 번 돈 다음 착지했다.
“좀 쉬어야겠군. 근처에 냇물이 있던데 거기서 씻고 오겠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간다. 프레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악스는 탁자에 앉아서 풀을 정돈하고 있었다. 힐끗 보니 약초와 독초가 적절히 섞여 있었다.
“늦으셨네요. 어디서 시간을 보냈나요?”
“근처에서 명상을 좀. 미안한데 먹을 것 좀 있나?”
오늘 하루 제대로 먹은 게 없다 보니 배가 고팠다. 시악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시만요.”
조금 기다리자 그녀가 갖고 온 나무 그릇을 내밀었다. 이번엔 무슨 풀일까 생각하며 받았는데, 그릇에 담긴 건 스튜였다.
심지어 고기까지 들어가 있다.
“이건?”
“어제는 미안해요. 인간 손님이 온 건 처음이라서…….”
아무래도 어제 선보인 충격적인 풀밭은 그녀의 실수 아닌 실수인 것 같다. 프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먹을 만했어.”
“그럼 다행이구요. 이반은 그러지 않은 것 같았지만.”
“철없는 놈이지. 고기반찬 없다고 투정 부리는 꼴이라니. 덩치가 아까워.”
“후후.”
프레이의 농담에 시악스가 낮게 웃었다. 의자에 앉은 다음 스튜를 한입 떠먹어 본다. 맛있다. 과연 방랑 엘프라 그런지 스튜를 만드는 솜씨도 아주 제법이었다.
“잘 먹었어.”
“네. 오늘은 이제 쉬실 건가요?”
“그럴 생각이야.”
“저는 오늘도 일이 있어서요. 아마 내일 아침에 돌아올 것 같습니다.”
“그렇군. 이반에게는 내가 말해 두지.”
“부탁합니다.”
시악스는 그리 말하고 밖으로 나갔고, 프레이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촛불을 끈 채로 침대에 걸터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시악스가 없어졌으니 카밀이 접근하기 한층 쉬워졌을 것이다.
해가 완전히 지고,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을 때쯤 기척이 느껴졌다.
프레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
어둠 속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흐릿하게 비치는 몸의 굴곡은 분명 여인의 것이었다. 프레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오랜만이다, 카밀.”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프레이는 카인의 모습을 지우고, 그녀가 알고 있는 ‘프레이’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카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프레이군.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긴 했지만, 설마 하이엘프의 마을에서 볼 줄은 몰랐는데.”
“마찬가지야.”
카밀이 복잡한 눈빛을 보냈다.
“트로우맨 링즈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었어. 게다가 피스파인더 암릿의…….”
“……?”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던 카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네. 아무튼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그건…….”
프레이는 이곳에 오기까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숨겨야 될 것도 있었다. 리키와의 만남이 그랬다. 서클 출신에게 데미갓과 임시 동맹을 펼쳤다는 얘기는 안 하느니만 못하니까.
얘기를 모두 들은 카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특히 어포슬의 정체가 오이딘이라는 부분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조차 경악했다.
“하필이면 오이딘인가…….”
“여왕의 혈족이라고 하더군.”
“그건 정확한 말이 아니야. 스노우 여왕과 오이딘의 관계는 조금 묘하거든.”
“묘하다니?”
“스노우 여왕은 프리딕우드에 입양되었으니까.”
“입양.”
엘프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었다. 카밀도 그 사실을 아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엘프 사회에서는 별로 없는 일이긴 하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프리딕우드는 대대로 여왕을 배출하는 가문인데 이번 세대에서는 여아가 태어나지 않았거든.”
설마 엘프 여왕이 세습제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스노우를 입양한 건가?”
“맞아. 너도 스노우 여왕과 만났지? 하이엘프로는 보이지 않았을 거야.”
“확실히…….”
프레이는 스노우의 외모를 떠올렸다. 흰 피부를 빼면 무엇 하나 하이엘프의 특징이 느껴지지 않는 외견이었다.
“그녀는 아이스 엘프야.”
“처음 들어 보는데.”
다크엘프나 하이엘프 이외에 그레이엘프, 우드엘프까지 알고 있는 프레이지만 아이스 엘프란 종족은 처음 듣는다.
그러자 카밀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밀림 출신 종족이 아니니까. 북쪽 끝에 있는 설원에 사는 소수종족이야.”
“북쪽 끝 설원이라…….”
두툼한 털가죽을 가진 동물이나 몬스터만 살 수 있는 극한의 지역이 아닌가. 그곳에 엘프가 살고 있는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카밀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오이딘은 리브스 족장의 친구였어. 듣기로 그는 스노우가 여왕의 자리에 앉은 당시 많은 불만이 있었다고 해. 자신도 흐루히랄과 교감할 수 있다고 믿었거든.”
“불가능했나 보군.”
“여태껏 남성 엘프가 흐루히랄과 교감에 성공했던 경우는 없었으니까. 오이딘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그 역사를 깨뜨리진 못했지. …만약 교감에 성공했다고 해도 스노우의 자리에 앉지는 못했겠지만.”
“…….”
“이미 수십 년도 지난 이야기야. 당시 오이딘의 분노는 그야말로 숲을 불태울 정도였다고 해.”
숲을 불태울 정도. 엘프들이 사용하는 관용구였다. 간단히 말하면 엄청나게 화냈다는 뜻, 프레이가 아니었다면 고개를 갸웃거렸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얌전해졌지. 이후로는 스노우 여왕의 훌륭한 측근 중 하나가 되어 대밀림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노력한다는 소문을 들어서 마음을 고쳐먹은 줄 알았는데.”
설마 어포슬이 되었을 줄이야. 카밀이 낮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프레이는 가장 신경 쓰이는 것에 대해 물었다.
“오이딘은 강한가?”
“강해.”
카밀이 단언했다.
“오이딘은 정령사야. 그것도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지. 하이엘프는 엘프 중에서도 특히나 정령사의 자질이 높은데, 오이딘의 재능은 그중에서도 압도적이었다고 해.”
“…정령술은 신력과 충돌하지 않지.”
죽음의 권능을 다루면서 정령왕의 힘을 쓸 수 있다. 그건 오이딘을 처리하는 일이 몇 배는 까다로워졌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4,000년 전엔 정령왕이 데미갓을 좋게 보지 않았었다.’
프레이는 그때의 악연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길 바랐다. 만약 그렇다면 강력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정령왕은 어포슬이 된 오이딘에게 결코 힘을 빌려주지 않을 테니까.
“카밀, 나는 지금 오이딘을 공격할 생각이다.”
“지금 바로? 너무 성급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지금이 가장 적기야.”
언제가 되었든 자신들에 대한 얘기는 무조건 오이딘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네크로맨서의 뒤를 쫓고 있는 외부인이니, 그가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예상되는 지금이 기습하기에 가장 적기였다.
“…좋아. 도와줄게.”
“괜찮겠어?”
“어차피 그거 부탁하려고 부른 거잖아. 근데 설마 얘기를 전하러 온 게 마도무왕의 후계자일 줄은 몰랐어. 장난 아니던데.”
“무슨 일 있었나?”
“우리 쪽 젊은 전사들을 도발했어. 혈기를 못 참고 몇 명이 덤볐는데 옷자락도 못 스치고 깨졌다지 뭐야.”
그렇겠지. 다크엘프의 수준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이반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다.
“그 남자는 괴물이야. 정면 대결로는 리브스 족장이라도 당해내지 못할 것 같아.”
고개를 젓던 카밀이 프레이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나는 뭘 하면 되는데?”
“나와 이반에게 붙은 감시자들이 있다. 알고 있겠지?”
“그래. 여덟 명 있더라. 그놈들 눈 피해서 오느라 곤욕이었어.”
생각보다는 적었다. 프레이도 정확한 수는 파악하지 못했는데. 역시 다크엘프라고 해야 될까.
“그자들을 재워 줘. 해가 밝기 전까지만. 가능한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카밀이 무언가 염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프레이는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책임은 내가 모두 지겠다. 일이 잘못돼서 하이엘프한테 추궁받으면 나한테 협박당했다고 말해.”
“미안해.”
“사과할 거 없어. 그 정도 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니까.”
진심이었다. 카밀은 손님의 입장으로 하이엘프 마을에 머물고 있다. 엄한 일이 벌어지는 상황을 원할 리가 없다. 그녀도 나름대로 각오를 마치고 도움을 줄 결심을 한 것이다.
특히 주변에 있는 감시의 눈을 없애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엘프 특유의 민감한 시각과 청각을 속이면서도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하게 수행해야 된다. 은밀함과 기동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카밀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럼 부탁하겠다.”
“맡겨 줘.”
카밀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오이딘 프리딕우드는 어포슬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노즈독의 권능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포칼립스의 권능은 웬만한 데미갓보다 훨씬 강력했으니까. 심지어 노즈독의 힘은 같은 아포칼립스 사이에서도 특히나 위험한 죽음을 다루는 권능이었다.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포슬이 되고 난 이후 한 번도 뇌리에서 지우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힘을 조심스럽게 취급했다.
그러나 한 가지 몰랐던 것도 있었다.
노즈독의 권능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치밀어오르는 살심을 풀어 줘야 된다는 것.
“끄윽…….”
오이딘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발버둥 쳤다. 그의 눈동자에 흉흉한 살기가 아른거렸다.
‘살심을 억누르기가 힘들어.’
바깥에 있을 때는 하루가 멀게 학살을 자행했으니 이런 증상을 겪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밀림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아무도 죽인 적이 없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죽이고 싶다.’
아니, 죽여야 된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먼저 미쳐 버릴 것이다. 시야가 핏빛으로 물드는 것 같다.
누구라도 상관없다. 죽이고 싶다. 살을 가르고, 피를 뽑아내고, 내장을 헤집은 다음 뼈를 박살 내고 싶었다.
오이딘은 자신의 어깨를 미친 듯이 할퀴었다. 살갗이 파져서 피가 줄줄 흐를 정도로 격하게. 그 고통 때문에 약간은 머리가 차가워졌다.
‘죽이자.’
오이딘은 결심을 굳힌 다음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신력만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오이딘은 신력 없이도 충분히 누군가를 죽이고 그 흔적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그때 냇가 근처를 걸어다니고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오이딘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법 낯이 익은 얼굴이 아닌가.
여왕이 되기 전, 스노우와 자주 붙어 다녔던 계집이었다.
“시악스.”
오이딘이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