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이반 (4)
“어포슬을 죽이면 데미갓은 피할 수 없는 동면에 빠진다. 그리고 그동안은 완전한 무방비가 되지. 가령.”
슉.
리키의 손에 작은 과도가 생겨났다. 대체 어디서 솟아난 걸까? 그가 과도를 휘릭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 아무런 특징도 없는 과도로 목덜미만 쑤셔도 죽일 수 있다.”
“…….”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반과 프레이, 둘 모두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리키를 보았다.
고작 과도 하나로 죽일 수 있다니? 도시 하나는 우습게 지워 버릴 수 있는 데미갓을? 저 말은 동면에 빠진 데미갓이 어린아이보다도 약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닌가?
도무지 믿기 힘든 얘기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이건 천금으로도 얻지 못할 특급 정보였다. 문제는 리키의 태도였다. 대수롭지도 않은 듯이 무덤덤하게 얘기를 하니 진실 여부가 제대로 판별되지 않았다.
이반이 얼떨떨하게 말했다.
“믿을 수가 없는 얘기구만. 그럼 데미갓은 왜 어포슬을 만드는 건데?”
“그게 문제가 되나?”
“그건…….”
입을 우물거리는 이반을 대신해 프레이가 쏘아붙였다.
“당연히 문제가 되지. 어포슬이란 존재가 다룰 수 있는 권능은 데미갓 본신의 힘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 정도 힘밖에 못 다루는 부하를 만든 것치고 리스크가 너무 커.”
프레이의 의문은 당연했다. 어포슬의 평균적인 힘은 잘 모르겠지만 제3마탑의 부탑주였던 루케스는 7성의 경지를 이룩했을 때조차 큰 어려움 없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만약 모든 어포슬이 그 정도 힘을 가진 정도라면, 8성의 경지만 되찾아도 어포슬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어포슬은 조무래기다. 그런 송사리를 죽고 얻을 수 있는 성과가 데미갓의 동면이라니? 너무 남는 장사가 아닌가.
프레이가 아는 데미갓이라면 이런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의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만하긴 해도 멍청하지는 않으니.
그러나 리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들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더 이상 멋대로 설쳤다간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데미갓을 사라지게 만들어? 그런 짓이 가능한 놈이 이 세상에 있나?”
리키가 이반, 그리고 프레이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툭 말했다.
“신.”
“…….”
“…….”
아까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었다. 프레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리키를 보았고, 이반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진담이냐?”
“물론.”
“야단났군. 나는 무신론자인데. 지옥불 온도가 미지근하길 바라겠어.”
“그런 건 상관없다. 죽음 이후 영혼을 선별하는 건 다른 존재의 역할이니까. 내가 언급하는 존재는 신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법칙’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군.”
“뭔 말이야?”
“이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절대적인 에너지 덩어리다. 일정한 규칙만 만족하면 창조와 파괴, 두 분야 모두에서 초월적인 현상을 빚어내는 힘이지. 데미갓이란 그 에너지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자의식을 가지게 된 거고.”
프레이는 설마 초라한 오두막에서 데미갓에 대한 기원을 들을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고찰한 적은 있다. 평생을 걸고 싸워야 할 숙적의 명칭이 데미갓Demigod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가장 오래 살았다는 드래곤조차 신에 대해서 속 시원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리키는 프레이의 복잡한 얼굴을 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우리 데미갓은 지난 수천 년간 너무도 많은 생명을 죽였다. 로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실제로 처벌이 내려온 걸 보니 적어도 신의 판단은 다른 것 같더군.”
“처벌이라니. 벌써 데미갓 중 하나가 죽었다는 거냐?”
“아니.”
그 말에는 내심 아쉬웠다. 데미갓이 하나라도 줄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이어지는 리키의 말은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선사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소멸한 데미갓은 총 스물이었다.”
“……!”
“그 이후로는 로드조차 경각심을 세울 수밖에 없었지.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죽음이란 영혼의 소멸이자 모든 것의 끝이니 필사적이 될 수밖에.”
이반은 황당했다. 리키가 말한 것들 모두, 하나하나가 여태껏 서클이 그 실마리조차 붙잡고 싶었던 세상의 숨겨진 진실이었다.
아니, 그건 둘째치고. 갑자기 나타난 프레이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얘기해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리키가 머리를 긁적였다.
“흠. 생각보다 많은 걸 얘기해 줬군. 뭐, 상관없나.”
“…리키라고 했나? 너는 왜 데미갓을 배신한 거지?”
“얘기할 생각 없다. 지금 얻은 정보들로 만족해라.”
“…….”
단호한 거절이었다. 프레이는 리키의 표정을 보며, 이 건에 대해선 아무리 끈질기게 달라붙어도 얘기를 들을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잠시… 생각을 좀 정리하겠다.”
“그러도록. 이반, 너는 이리로 와서 언데드에 대한 일을 자세히 보고해라.”
“누구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이반이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그 이상 군말하지 않고 리키에게 다가가는 걸 보니 그들의 관계적 우위는 명백해 보였다.
프레이는 하나씩 생각을 정리했다.
리키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 단어들,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중요하고 민감한 정보였다. 물론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반대로 덮어놓고 거짓말로 치부하는 것도 미련한 행위다. 천천히 뜯어보면서 이상한 점이 없는지 파악해야 된다.
우선 첫 번째. 어포슬을 죽이면 데미갓이 동면에 빠지고, 일정 시간 동안 완벽한 무방비상태가 된다는 것.
이건 루케스를 토벌하기 전 층주 미켈에게 들었던 얘기와 이어진다. 그는 어포슬을 죽이면 어떤 형식으로든 데미갓에게 영향이 간다고 말했다. 리키의 말에 따르면 그 영향이 바로 동면이라는 것이다.
‘신빙성이… 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얘기가 이어지니까.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동면에 빠지는지는 모른다. 리키에게 물으면 답해 줄까? …아무튼 그 단위가 생각보다는 훨씬 긴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동면에서 깨어난 데미갓이 다른 어포슬을 만드는 걸 서클에서 즉각 파악했을 테니.
‘최소 수십 년.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그 다음은 신에 대한 얘기였다.
프레이 또한 무신론자다. 데미갓이란 존재를 알고 난 이후엔 신에 대해서 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리키의 말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의식을 가진 것이 아닌, 단순히 법칙으로만 존재하는 신의 존재. 만약 그렇다면 수십, 수백 개의 종족이 데미갓 하나에 고통받았을 때 신이 잠자코 있었던 이유도 납득이 간다.
데미갓은 신에게서 파생된 존재라고 하지 않나. 법칙과 균형이란 걸 잘 이해하고 있을 테고, 그런 만큼 틈을 파고들기도 쉬웠을 것이다.
아마도 어포슬을 만든 이유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살행은 데미갓에게 영향이 가지 않는다든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신의 처벌이라는 대목.
‘신의 처벌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여태껏 데미갓이 제힘을 모두 발휘하지 못했던 이유도 설명이 간다.’
실상 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대륙에 있는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도 당해 낼 수 없다. 프레이가 괜히 그들을 초월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데미갓은 전력을 드러낸 경우가 거의 없다. 4,000년 전에도, 그리고 아마 지금도. 신의 처벌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 이유도 납득이 간다.
허무하리만큼 간단히 결론이 나왔다. 둘 중 하나였다.
리키가 엄청난 거짓말쟁이거나,
모두 진실이거나.
…그리고 프레이는 후자의 경우가 더 확률이 높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생각은 모두 마쳤나 보군.”
리키의 말에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내게 이런 얘기를 해 주는 거지?”
“나 혼자서는 데미갓을 없앨 수 없으니까.”
고작 인간 둘의 힘이 필요하단 건가? 프레이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질문을 잘못 했군. 너는 나를 믿나? 네 말을 헛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사람 보는 눈이 없지는 않아. 그리고 혹여 그렇게 나왔어도 상관은 없다.”
“…….”
리키는 그 이유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지만, 프레이는 살인멸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반이 짜증 나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무게 잡는 건 거기까지 하고. 이제 난 무엇을 하면 되지? 네가 말한 대로 숲에 있는 언데드들은 모두 잡았다.”
“말이 조금 이상하군. 이반, 애초에 내 부탁은 언데드를 잡는 게 아니라 어포슬의 목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흥.”
이반이 코웃음을 쳤다.
어포슬? 프레이의 의아한 시선을 무시하고 이반이 말했다.
“애초에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왜 말이 안 되지?”
“그 빌어먹을 대밀림 안쪽으로는 무슨 지랄을 떨어도 들어갈 수 없었다. 결계나 마법 같은 게 아냐. 숲 자체가 외부자를 몰아내고 있었다고.”
이반은 흉흉한 눈으로 리키를 바라봤다.
“아예 나무를 박살 내면서 움직이면 모를까. 그런데 네가 그러지 말라며.”
“대밀림에 존재하는 모든 엘프와 척을 질 생각이라면 말리진 않겠다.”
“…쳇.”
대밀림 안쪽으로 어포슬이 사라졌다. 프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두 가지 경우가 떠올랐다. 하나는 어포슬이 대밀림 안으로 도망쳤을 경우. 개인적으로 프레이는 이 경우이길 바랐다. 그쪽이 훨씬 쉽게 풀릴 것 같았으니까. 엘프들도 서클과 연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협력을 구하면 어렵지 않게 일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의 경우는 상당히 골치가 아프다.
촤륵.
리키가 품에 있던 종이 하나를 탁자 위에 펼쳤다. 그건 누군가의 초상화였다.
눈이 부시도록 잘생긴 미남자였다. 프레이가 본 남자 중 가장 잘생긴 얼굴을 가진 건 페르안이었는데, 초상화의 남자도 그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특징적인 길쭉한 귀. 남자는 엘프였다.
“이 엘프의 이름은 오이딘 프리딕우드. 하이엘프임과 동시에… 어포슬이다.”
역시 일이 꼬이는군.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엘프들의 왕족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엘프족이라니. 확정적인 증거도 없이 들이댔다간 엘프들의 적대감만 사게 될 것이다.
프레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엘프들 중에서도 서클원은 있을 거다. 그들은 신력에 민감할 거고. 이 남자는 어떻게 그 사실을 감추고 있는 거지?”
“어포슬 중에서도 신력을 숨길 수 있는 존재가 있다. 서클이 아포칼립스라고 부르는 강대한 데미갓, 그리고 로드와 이어진 어포슬이지.”
“…그럼 그 오이딘이라는 놈은.”
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다루는 데미갓, 노즈독의 어포슬이다.”
생각보다도 더 안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자 리키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약 두 달 전이 마지막 기회였지. 호위도 없이 대밀림 밖에 나온 순간이 있었는데, 이반이 낮잠을 자느라 때를 놓쳤다.”
프레이가 눈빛을 보내자 이반이 무안한 듯이 말했다.
“…전날 밤에 달빛이 너무 좋아 약주를 한잔 걸쳤지. 말해 두는데 난 후회 안 해. 아니. 근데 이미 지나간 일을 따져서 뭐 하겠어?”
“당신이 직접 가서 어포슬을 죽일 수는 없나?”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 대부분의 어포슬을 내 손으로 죽였겠지. 내가 하면 흔적이 남는다. 데미갓을 직접 죽이는 건 몰라도, 연결되어 있는 어포슬의 의식은 데미갓과 이어져 있다. 곧바로 내 배신이 탄로 나고 말겠지.”
그렇군. 어포슬이 죽기 직전 리키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면, 그 정보는 곧바로 데미갓에게 넘어간다는 뜻이다.
“…데미갓을 바로 죽이는 건 상관없다고?”
“그래.”
프레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얼마 전에 뇌전을 다루는 어포슬을 죽였다. 네 말대로라면 녀석이 따랐던 데미갓은 지금 동면하고 있겠군.”
리키의 눈이 빛났다.
“…뇌전. 흠. 인드라인가.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아주 쓸 만한 정보인데.”
잠시 고민하던 리키가 말했다.
“네가 인드라의 어포슬을 죽였다는 걸 증명할 수 있나?”
“아니. 결정은 이미 내가…….”
그 순간 아델리아가 주었던 뇌전의 비약이 떠올랐다. 프레이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그걸 꺼내 보여 주었다.
“이거라도 괜찮나? 결정에서 분리해 낸 뇌전의 에너지인데…….”
“…인드라의 뇌전이 틀림없군. 그건 어포슬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에너지지. 충분하다.”
리키의 입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났다.
“잠시 기다려라.”
철컥.
리키가 옆에 있던 칼을 쥐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프레이는 역시 리키가 공간에 관련된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추측했고, 이반은 투덜거렸다.
“이런 경험이 몇 번이고 있었지. 저렇게 사라졌다 다시 나타날 때면 항상 나를 놀라게 만들었어. 오늘은 절대 놀라지 않을 거야. 내가 입을 쩍 벌리면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쳐도 돼.”
“…….”
파앗.
그 순간 리키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이반과 프레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내심 눈가를 좁혔다. 리키는 피투성이였으나 상처는 없었다. 오른손에는 칼을, 그리고 왼손에는 다른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탁자에 올려놓는다.
뚝… 뚝…….
누군가의 목이었다. 번쩍거리는 금발에 수염을 기른 남자의 얼굴.
딱히 시체를 보고 놀라지는 않았다. 프레이와 이반이 궁금한 건 하나다.
“누구지?”
리키가 대답했다.
“데미갓 인드라.”
이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
“알겠나? 우린 앞으로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한다.”
“무슨 뜻이지?”
리키가 고적한 눈빛으로 칼을 칼집에 넣었다.
철컥.
“너희들은 어포슬을 죽여라. 그럼 동면에 빠진 데미갓은 내가 직접 없앨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