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이반 (2)
“희한한 놈이군. 너는 무슨 서클 소속이지?”
“트로우맨 링즈.”
“트로우맨 링즈?”
이반의 얼굴이 묘해졌다.
“몰락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생각보다 급한 것 같군. 에그제이인지 뭔지 하는 놈을 쫓아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다시 찾아올 줄이야.”
에이제그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딱히 중요한 사실은 아니니 잠자코 넘어갔다.
“아포칼립스 토벌전에서 상당한 출혈을 입었다고 들었지. 그건 삼강 서클들이 무언가 수작질을 부린 것 같다는 말도 있던데…….”
“뭐?”
처음 듣는 말이었다. 프레이가 알고 있는 건 단순히 몰락한 트로우맨 링즈를 핍박하거나 무시했다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애초에 서클의 몰락에 관여되었을 수도 있다니? 프레이의 반응에 이반이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하지는 않다. 나도 스승님한테 들은 거니까.”
“스승님?”
“질문은 그만해라. 서비스는 여기까지다. 이제 내 쪽에서 묻지. 너는 내 말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프레이가 성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작금의 서클은 데미갓에 대한 일은 뒷전이고 세력의 힘 불리기와 타 서클의 견제에만 정신이 팔려 있지. 돼지우리란 말도 아까울 정도야.”
“그걸 안다면…….”
“그래서 내가 서클을 바꿀 생각이다.”
“바꿔?”
“한심한 거랑 별개로 서클이 가진 힘은 무시할 수준이 못 되지. 분산된 힘을 하나로 뭉치기만 해도 데미갓을 위협할 수 있는 집단으로 발돋움할 수 있어.”
이반이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건 자신도 알고 있는 이야기다. 단언하건데 서클이 지닌 힘은 일개 국가가 가진 힘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다.
국가나 인종, 사상, 종교 따위를 모두 초월해 데미갓이라는 공공의 적을 토벌하기 위해 뭉친 집단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고, 세월이 흐른 지금은 서클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각자의 세력을 형성한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그 중심에 삼강이라는 거대 서클이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고.
그런 자들을 하나로 뭉친다? 4,000년 전의 다섯 영웅이 되살아나도 힘든 일이 아닌가.
“망해 가는 트로우맨 링즈가 할 말로는 생각되지 않는데.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반등이라도 한 건가?”
“아니. 반등할 준비를 하고 있는 단계지.”
“…….”
이상한 놈이었다. 이반은 프레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리 생각했다. 개소리로 치부해도 이상하지 않을 호언이었으나 이상하게 비웃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프레이의 눈동자는 확신에 차있었다. 이놈은 털끝만큼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적어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확고한 녀석이었다.
마치, 자신처럼.
‘싹수가 있는 놈인지는 좀 더 봐야겠지만.’
최소한의 흥미는 생겼다. 이반이 입 끝을 말아 올렸다.
“처음으로 서클에서 재밌는 녀석이 왔군. 그리고 제법 실력도 있는 것 같고. 여태껏 내가 만난 녀석 중 제일 거물은 노란 머리 계집애였는데…….”
“계집?”
“샤를 롤랑. 피스파인더 암릿의 서클 라운더다.”
“…꼬맹이가 삼강의 서클 라운더라고?”
“꼬맹이? 하하. 너는 서클들에 대해 나보다도 모르는군.”
그가 픽 웃으며 말했다.
“샤를 롤랑은 수백 년 묵은 괴물이었다. 세간에서는 흡혈귀라고 불리는 종류겠지.”
“뱀프…….”
“뱀프? 아. 뱀파이어. 그래. 맞아. 그 계집은 뱀파이어였어.”
“…….”
프레이는 잠시 황당해질 수밖에 없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하프 데몬도 있다고 들었는데, 뱀파이어가 있는 게 뭐가 놀랍겠는가. 문제는 그런 이종족이 서클 라운더라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서클 마스터들 중에 인간이 한 명도 없다든가.’
그런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트로우맨 링즈의 마스터인 베니앙도 하프 드래곤이 아닌가.
“그 여자와의 싸움은 시간 죽이기는 되더군. 제법 괜찮은 악마들을 소환했는데, 싸울 맛이 났어.”
피스파인더 암릿의 2인자라면 최소 상급 악마들을 부렸을 확률이 높다. 이반은 지금 상급 악마 여러 마리와 싸움이 흥미로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클 따위 어떻게 되도 내 알 바 아니지만, 너한테 흥미가 생겼다. 분산된 힘을 통일시킬 거라고? 네가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실력인지 보고 싶다.”
쿵!
이반이 자신의 주먹을 서로 부딪치며 프레이를 노려보았다. 딱히 예상 못 한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의도했다.
프레이도 이반의 실력이 궁금했다.
“서론이 너무 길어. 곧바로 시작하자.”
“크흐흐. 마법사답지 않게 터프하게 나오는군.”
탓.
이반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소리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프레이도 움직임을 놓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왕권을 연마한 일류 무인이라면 마법사인 자신의 눈썰미로는 쫓아갈 수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움직임을 놓친 것과 당황하는 건 전혀 다른 얘기였다.
프레이는 블링크를 사용해 나무가 그득한 숲 한복판으로 이동했다.
콰지직.
이반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무왕권을 배웠으니 그렇지 않을까 싶었지만, 역시 저돌적인 녀석이다. 충분히 거목을 피해서 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숨길 생각이 없다고 외치는 것처럼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박살 내면서 오고 있다.
당연히 숲이 진동할 정도로 소란스러웠고, 그게 이반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이스 스피어, 윈드 스톰.”
프레이는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했다. 일찍이 한 번 선보였던 얼음과 바람 마법의 조합이다. 그의 앞에 나타난 수십 개의 얼음 창이 폭풍과 함께 이반에게 쇄도했다.
“흥!”
이반이 코웃음을 쳤다. 극한까지 단련된 그의 육체가 마나까지 두르면 상상을 초월하는 방어력을 가지게 된다. 웬만한 마법으로는 그의 살가죽에 흠집조차 입히지 못한다.
그리고 단단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반의 전신은 둘도 없는 흉기가 될 수 있다.
이반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뻗었다.
콰작.
가장 앞에 있던 아이스 스피어가 박살 났다. 드레이크의 가죽마저 찢어발겼던 아이스 스피어가 한낱 인간의 주먹에 고드름처럼 깨져 나갔다.
첫 번째 아이스 스피어를 박살 낸 순간, 이반의 시선은 이미 다음 표적으로 가 있었다.
콰자자작.
연타가 이어질수록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두 번째, 세 번째. 투박하게 이어 붙인 주먹질이 어느덧 자연스러운 연계기가 되었다. 이반에게 쇄도한 수십 개의 아이스 스피어가 그의 주먹에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윈드 스톰은 이반의 단단한 육체에 흠집조차 입히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프레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옛날 일이 떠올랐다. 카사진과의 싸움, 열 번을 싸우면 십중팔구는 자신이 패배했다. 애초에 마도무인과 정면 대결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상관없다. 눈앞의 남자는 카사진이 아니니까.
“…….”
두 개의 마법을 사용했을 때부터 프레이는 다음 마법의 영창을 시작했었다. 이번에 사용하는 마법은 이반도 쉽게 볼 수 없는 공격일 것이다.
주문을 끝마쳤다. 프레이의 몸에서 하얀색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에 푸른색 귀기가 잔영을 그렸다.
“프로스트 브레스.”
사아아.
허공에 마법진이 출현했다. 이반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이번 마법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는 모르겠지만 프로스트 브레스는 무려 7성의 마법이었다.
마법진이 하얀 입김을 토해 냈다. 이반이 피하려는 순간, 순간적으로 무언가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감촉을 느꼈다.
“뭐?”
얼음으로 된 손이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천하의 이반조차 이 순간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도무인은 마법사보다 마나의 흐름에 민감하다. 마나룸이라는 주머니에서 마나를 꺼내 쓰는 대다수의 마법사와 달리 마도무인은 전신에 퍼져 있는 세맥이나 피부에 마나를 직접 둘러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도무인은 마법사와의 정면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 상대의 마법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강한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수준인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나의 움직임을 재빨리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일류 마도무인을 상대로 마법사가 기습을 성공하는 건 아주 까다로운 일이다.
‘이렇게 은밀하게 영창을 성공하다니?’
자신조차 다리를 붙잡히기 전까지 그의 마법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반은 다리를 세게 털어 내어 얼음의 손을 박살 냈지만 이미 프로스트 브레스를 피하기엔 늦었다.
혀를 차던 이반이 양팔을 교차시켜 안면을 보호한 뒤, 마나를 끌어모았다.
쿠구구.
그의 육체에 붉은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프레이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바위방패.’
자신의 앞에 마나를 집중시켜, 짧은 시간 동안 방어력을 극대화시키는 기술이다. 이름은 바위방패지만, 지금 그의 몸뚱이는 바위나 방패보다 수십 배 단단할 것이다.
“음……!”
이반은 프로스트 브레스를 정면으로 맞았다. 바위방패로도 완벽히 냉기를 막아 내지 못했다. 등골이 오싹하고 이가 시렸다. 그의 전신엔 하얗게 서리가 맺혔다. 그런데도 그의 눈빛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흉포해지고 있었다. 간담이 약한 사람이라면 슬쩍 본 것만으로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사나운 눈빛이다.
그리고 마법진이 사라졌을 때.
번쩍.
이반의 눈이 뜨였다. 동시에 당장이라도 동사할 같았던 그의 전신에 김이 피어올랐다.
치이익.
이반의 몸뚱이에 맺혀 있던 서리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전신에 폭포수처럼 땀이 흘리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쾅!
발가락 끝에 힘을 모은 다음, 지면을 박찬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대지가 뒤집혔다. 눈 깜박할 순간 이반의 신형이 프레이의 코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제법 괜찮은 실력이었지만, 내 승리다.”
뚜둑.
이반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렇게까지 근접한 이상 자신이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주먹이 프레이에게 꽂히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이반의 시야가 반전했다.
쿵!
“……?!”
이반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몸이 대자로 지면에 누워 있었다. 상처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반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기술은… 황소몰이……. 너, 무왕권을 배웠나?”
프레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에 대해 궁금한 점들이 몇 가지 생긴 모양이군. 이제 얘기를 시작해 볼까.”
* * *
이반은 프레이의 손을 잡지 않고 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레이는 약간 무안하게 손을 거두었다.
“…….”
이반에게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처한 상황이 꽤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그는 한참을 끙끙대다가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내 머리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군. 어떻게 마법사가 황소몰이를 쓸 수 있는 거지?”
“나부터 묻자. 이곳에 돌연 출현한 언데드 무리들은 혹시 데미갓과 연관이 있나?”
“음…….”
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갑자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렇다.”
“어떻게 연관이 있는데?”
그러자 이반이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도 모른다.”
“…….”
프레이가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만약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거짓말이 아니다. 난 진짜 아는 게 없어. 애초에 여기 있는 언데드들을 없앤 것도 녀석의 부탁을 듣고 나서니까.”
“녀석?”
“그래. 흠…….”
이반은 턱을 쓸며 프레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성큼 고개를 끄덕인다.
“너는 다른 서클 녀석들과 다른 것 같으니 그 녀석을 만나도 되겠어. 게다가 반응도 궁금하고.”
“누군데?”
“데미갓.”
“…….”
프레이의 얼굴에 툭 균열이 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그의 얼굴엔 경악이 피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데미갓의 배신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