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60화 (60/857)

60화 이반 (1)

프레이는 곧바로 흔적을 살펴했다. 그리고 언데드 무리가 전부 박살 나는 데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생각을 바꿔야겠는데.’

이 정도 실력이라면 일류 무인 중에서도 윗줄에 속한 실력이다. 아무리 그래도 무왕급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그에 준하는 실력자일 수도 있다.

언데드들의 사체를 살펴볼수록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어떤 놈인지 점점 궁금해지는군.’

적어도 이 남자가 카사진의 후계자라는 건 인정해야 될 것 같다. 프레이는 낯설었다. 무왕권은 카사진이 독자적으로 만들었고, 그의 육체에 특화된 맞춤형 무술이었다.

물론 카사진과 다른 체격을 가지고 있다고 사용하지 못할 건 없다. 프레이 또한 무왕권을 쓰며 육체를 단련했으니까.

문제는 효율에 있다. 프레이는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무왕권의 진수를 끌어낼 수 없다. 무왕권에 특화된 몸이 아니니까. 기껏해야 2할 정도의 힘을 살리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 녀석은 다르다.

‘무왕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 카사진과 같은 방식으로 몸을 단련했겠지.’

전신이 바위보다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아마 마나를 사용하지 않아도 바위 정도는 가볍게 부술 수 있을 정도로.

동시에 마음이 놓였다. 가차없이 언데드 무리를 박살 낸 걸 보니 최소한 데미갓의 끄나풀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무언가 알겠나?”

알콘이 물었다. 프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무술의 흔적이 보입니다.”

데스 나이트의 흉갑에 새겨진 주먹 자국을 보여 주며 말하자 알콘의 표정에 감탄이 생겼다.

“대단한 실력을 가진 마도무인이로군. 아니, 잠깐만.”

주위를 둘러보던 알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으음… 내가 보기에 이건 한 명의 소행 같은데.”

제법 눈썰미가 있는 편이 아닌가. S등급은 입으로 따낸 게 아닌 모양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허. 말도 안 나오는군. 이 정도 숫자의 언데드를 단신으로 깨부수다니. 최소 SS등급 용병의 실력이야.”

프레이는 숲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흔적은 안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당장 추격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에이제그는 놈이 레이널스 대밀림 근처에 있다고 했지.’

그러나 이 숲은 빈말로라도 레이널스 대밀림 근처라고는 할 수 없는 장소다. 그렇다면 계승자가 직접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건데.

‘언데드를 없애기 위해서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지만 확신하기엔 이르다. 우선은 알콘과 함께 마차로 돌아갔고, 가벼운 정비를 마친 후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비록 언데드와 직접 싸운 건 아니지만, 그들의 사체엔 언데드 특유의 불길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건 충분히 용병들의 안색을 딱딱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그들의 표정은 점점 맥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또야?”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언데드들의 사체. 여태까지 몇 번이나 보았던 광경이었던 것이다. 용병 중 한 명이 스켈레톤의 머리를 툭 발로 차며 말했다.

“이러다가 조만간 만나는 게 아닐까 모르겠군.”

그의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다시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콰앙… 콰앙…….

무언가 터지는 것 같은 격렬한 소리였다. 용병들의 시선이 알콘에게 향했다. 알콘은 짧게 말했다.

“토벌조, 따라와라.”

아까 미리 조를 나누었기 때문에 용병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그의 뒤를 따랐다. 수풀을 지날수록 소리는 점점 커졌다.

이윽고 작은 공터가 드러났다.

그곳엔 한 남자가 언데드들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때려 부수고 있다는 표현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맨몸으로 언데드 무리에 서 있는 남자는 언뜻 보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으나, 위험한 건 그가 아닌 언데드들이었다.

콰앙!

그의 주먹이 꽂힐 때마다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일격을 맞은 데스 나이트는 대포라도 맞은 것처럼 날아가더니 아름드리나무를 몇 그루나 부순 다음에야 멈췄다.

“허…….”

“두,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용병들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주먹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길래 데스 나이트의 갑주가 종이처럼 구겨진단 말인가? 그나마 고위 언데드는 사정이 좋았다.

스켈레톤이나 구울 같은 저급 언데드들은 그의 손에 스치는 즉시 폭죽처럼 터져 나갔던 것이다.

남자는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언데드들을 박살 냈다. 그의 전신은 흉기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때리고, 걷어차고, 이마를 들이박을 때마다 언데드들은 모래성처럼 부서져 나갔다.

싸움, 아니. 일방적인 학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콰직!

남자가 마지막 남은 듀라한의 머리통을 손아귀의 악력만으로 터뜨렸다. 투구까지 쓰고 있었는데도 마치 썩은 사과처럼 쉽게 짓이겨졌다.

“퉷.”

그는 침을 뱉은 다음, 알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시선을 보냈다. 남자의 시선을 받는 순간 알콘은 몸음 움찔거렸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살기가 아직까지 아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놈들은 뭐냐.”

“우, 우리는 용병이오.”

“그러냐? 알겠다.”

남자는 흥미 없다는 얼굴로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때 알콘이 그를 붙잡았다.

“자, 잠깐.”

“뭐지?”

“당신은 누구요?”

“이반.”

“이, 이름을 물은 게 아니라, 여기서 왜 언데드들을 없애고 있었는지…….”

남자, 이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만으로도 인상이 맹수처럼 바뀌었다.

“내가 그걸 왜 말해 줘야 되는 거지?”

“어, 어?”

“방해하지 말고 꺼져라. 죽여 버리기 전에.”

“…….”

S등급 용병이라는 알콘은 이반의 으름장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이반은 몸을 돌렸다.

프레이는 지금 타이밍이 제법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상한 남자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적은 아닌 것 같은데…….”

“속단할 수는 없죠. 이대로 내버려 두기엔 위험합니다.”

알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그럴까? 그래도 우리에게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 않나.”

“지금 당장은 그렇지요. 하지만 그가 보여 준 살기가 신경이 쓰입니다.”

알콘은 이반의 마지막 으름장을 떠올리며 몸을 흠칫거렸다. 그러나 곧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리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추적하거나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야.”

이 정도 인원의 용병들을 이끌더라도 저 남자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정확한 판단이다. 이반의 강함은 수적우위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프레이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 남자의 정체라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도 이 경로는 상단이 계속 이용할 텐데, 저런 정체불명의 사내가 멋대로 활개치게 놔두는 건 위험합니다.”

“그건… 그렇지.”

“그러니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마법사 혼자서? 너무 위험해. 차라리 레인저한테 맡기는 편이 더 낫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일반적이지. 프레이는 알콘을 설득하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도무인을 상대로 몸을 숨기는 건 레인저보다 마법사가 더 낫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될 텐데. 눈만 봐도 알 수 있어. 저자는 맹수야. 잘못 건드렸다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괜찮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게다가 저는 레이널스 대밀림을 향할 때만 호위를 맡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 사실은 아마 알콘도 알고 있을 것이다. 프레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귀환할 때를 대비해서 제가 없을 때까지 가정하여 전력을 구상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그렇지. 보기보다 눈치가 빠르군.”

알콘이 결심을 굳혔는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겠다. 독박을 쓴 만큼 의뢰비는 두 배, 아니. 세 배 더 주도록 하지.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쳐라.”

“예.”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인 채 곧바로 이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를 찾는 건 쉬웠다. 숲을 진동시킬 만큼 커다란 소란이 일어나는 것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되었으니까.

콰앙!

이반은 또다시 언데드들을 죽이고 있었다. 프레이는 그 모습을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언데드들을 죽이고 있는 거지?’

언데드가 인간에게 위협이 되니까? 아니. 잘은 모르지만 그런 정의로운 목적이 있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 수행을 위해서? 그것도 아닐 것이다. 고위 언데드가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이 정도 언데드 무리는 이반에게 있어 식후 운동도 되지 않을 테니까.

지금도 보라. 달그락거리며 거리를 좁히는 스켈레톤들을 바라보는 이반의 얼굴엔 짜증과 귀찮음밖에 없다.

“제길. 벌레 같은 자식들이 꾸역꾸역…….”

그가 자세를 바로잡더니, 떨어진 자리에서 정권을 내질렀다.

콰지직.

그 순간 격렬한 폭풍이 일어나며, 스켈레톤 무리가 한 번에 쓸려 나갔다.

‘칼날주먹. 상당한 경지군.’

무왕권의 몇 없는 원거리 공격 수단 중 하나다. 촌스러운 기술명은 당연히 카사진이 지은 것이다. 그때 이반의 뒤에 있던 구울이 어깨를 콱 하고 물었다.

“…그극?”

얼굴이 반쯤 녹아내린 구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무리 힘을 줘도 이빨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흥.”

이반이 코웃음을 치며 구울의 머리통을 부숴 버렸다. 그게 마지막 놈이었다. 이반은 다시 한 번 침을 뱉었다. 아까도 그렇고, 싸움이 끝나면 나오는 습관 중 하나일까?

“너는 또 뭐냐?”

이반의 눈이 프레이에게 향했다. 프레이도 모습을 숨기고 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대놓고 팔짱을 낀 채 이반의 무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프레이는 대답하지 않고 언데드들의 잔해를 살폈다. 의도적인 연출이다. 눈앞에 있는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만난 것도 바로 방금 전이지만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겠다.

주관이 너무나도 뚜렷한 남자였다.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하고 그 사실에 어떠한 고독이나 아쉬움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남자를 대하려면 우선 자신에게 흥미가 생기도록 유도해야 된다.

“…….”

프레이가 대놓고 무시하자 이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걸로 최소한의 관심은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프레이는 그의 입이 열리기 바로 전에 말했다.

“무왕권을 배운 지 얼마나 되었지?”

그러자 이반의 표정에 냉소가 어렸다.

“어떤 놈인가 싶었는데 또 서클의 관계자군. 꺼져. 너희랑 어울릴 생각 없다.”

“무왕권을 계승했으면서 데미갓과 연관되지 않겠다? 뻔뻔하군.”

“외부인한테 들을 말이 아니다.”

프레이가 힐끗 그를 보며 바닥에 있는 언데드들의 잔해를 발로 툭 건드렸다.

“이 언데드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최근 들어 갑자기 생겨난 것 같더군. 혹시 너와 연관이 있는 건가?”

“…….”

이반은 침묵했다. 부정하지 않는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한참이나 프레이를 바라보던 이반이 툭 말했다.

“데미갓과 연관되지 않는다고 나를 욕했지. 그건 틀린 말이다. 나도 무왕권의 배경에 대해선 알고 있다. 이 무술은 애초에 데미갓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지.”

“잘 알고 있군. 그럼 왜 서클의 제안을 무시한 거냐?”

“그걸 너희들이 말하는 거냐? 하. 어이가 없군. 그럼 반대로 묻겠다. 서클에 들어가면 데미갓을 죽일 수 있는 건가?”

이반의 질문을 날카로웠다. 그가 일렁이는 눈으로 말했다.

“네놈들과는 몇 번이나 만나 보았다. 아무리 흔적을 지워도 잘도 찾아오더군.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하는 말이 무엇인 줄 알고 있나?”

으득.

그가 이를 갈았다.

“자신이 속한 서클에 들어오라고 지랄을 떨더군. 데미갓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말이다. 지금의 서클은 썩었다. 데미갓에 대한 일은 뒷전이고, 자신들 배 불리기에 여념이 없는 돼지 새끼들만 득실거리는 곳이야. 그딴 냄새나는 돼지우리엔 들어가지 않아.”

이반이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허튼 말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시선으로.

그러나 이어지는 프레이의 말에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정확히 꿰뚫고 있군. 네 말에 동의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