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16화 (16/857)

16화 준비, 그리고 수련 (3)

프레이는 곧바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스파니올라는 작고 한적한 도시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에선 시골 도시 특유의 느긋함을 엿볼 수 없었다.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간다.

‘산맥과 인접해 있다. 몬스터들이 내려오는 경우도 종종 있겠지.’

위병들의 얼굴엔 관록이 엿보였고 용병들도 제법 많았다. 덕분에 도시 전체가 소란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은 없었다.

위험한 지리적 위치와 달리 안전은 확실하다는 증거다.

우선은 식량과 식수부터 구매했다. 아공간 주머니는 넉넉해서 제법 많이 챙겨 넣었는데도 반 이상이 남았다.

‘이 정도라면 3주는 버틸 수 있겠지.’

그런 다음 향한 곳은 술집이었다. 프레이는 도시 광장 근처에 있는 술집 중 한 곳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용병들이 제법 많은 술집이었다. 그런데도 시끄럽지 않았다. 용병들은 조용히 술을 들이켜며 가끔 몇 마디씩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한낮인데도 내부가 무척 어둡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었다.

프레이는 주위를 한 번 훑어본 다음 카운터로 갔다.

“어서 오시오.”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대머리 거한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프레이는 자리에 앉은 다음 말했다.

“맥주 한 잔. 그리고 간단한 요깃거리.”

“요깃거리라면?”

“빵도 좋고 고기도 좋습니다. 배를 채울 만한 거라면 아무거나.”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음식을 내어 왔다. 요깃거리로 나온 것은 빵과 먹음직한 소시지였다. 프레이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주인을 보며 말했다.

“이스파니아 산맥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용병이시우?”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인이 프레이의 모습을 한 번 훑어보더니 픽 웃었다.

“흠. 내가 보기에… 당신은 용병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군. 틀렸소?”

엄밀하게 얘기하면 틀리지만, 프레이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다 알고 있소. 물도 빠지지 않은 갑옷을 차려입고 새 칼 허리춤에 채우면 설령 드래곤이라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처럼 자신감이 차오르지.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오. 패기는 젊은이들의 특권이니까.”

젊은이, 그리고 패기라.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에 잊은 것들이 아닌가.

“근데 번지수 잘못 짚었수다. 이스파니아 산맥은 알량한 모험심으로 달려들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오.”

“몬스터의 천국이라 불리더군요.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아니.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주인이 씹어뱉듯 거칠게 말했다. 프레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실례했소. 나도 아들이 있었거든. 딱 손님 또래였소. 어렸을 때부터 용병이 되는 게 꿈이라고 설쳐 댔지. 불효자식도 그런 불효자식이 없을 거요.”

프레이는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드님은 지금…….”

“죽었소. 이스파니아 산맥에서. 이제 2년 정도 되었군.”

“유감입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약초를 캐러 간 모녀의 호위를 맡았을 거요. 딸내미만 겨우 살아 돌아왔지.”

주인은 프레이를 한 번 훑어본 다음 말했다.

“나쁜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 이만 돌아가시오. 내 아들을 손님에게 투영하는 게 아니오. 다만, 난다 긴다 하는 용병들조차 저곳을 지옥산맥이라고 부르는 걸 알아주면 좋겠군.”

주인은 이렇게까지 말하면 프레이가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진심으로 이 청년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프레이는 묵묵히 맥주잔을 비운 다음 말했다.

“산맥에 출현하는 몬스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후우. 굽힐 생각은 없는 거요?”

“꼭 가야 될 이유가 있어서요.”

프레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상 주인이 고개를 젓는다면 다른 곳에서 정보를 얻을 생각이었다.

주인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중에 원망하지 마시오.”

“제가 주인장을 왜 원망하겠습니까?”

“에이. 떠그랄. 오늘 푹 자긴 글렀군.”

주인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몬스터 천국. 그 별명대로요. 산맥엔 별의별 몬스터들이 다 나타난다고 합디다. 고블린, 오우거, 트롤부터 드레이크나 와이번, 그리폰까지… 내 장담하는데 그 동네에 없는 몬스터는 없을 거요.”

주인은 아예 겁을 줘서

내쫓기로 결심한 건지, 한층 표정을 험상궂게 만들었다.

“그것만이 아니오. 듣기로 머리가 둘 달린 오우거나 피부가 하얀 트롤, 극독을 제조할 줄 아는 비열한 고블린까지……. 다른 곳에선 한 마리 나올까 말까 한 돌연변이들도 줄을 서고 있소이다.”

주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최대한 열심히 설명해 줬다. 솔직히 그는 말하면서도 이게 의미 없는 짓이란 걸 느꼈다. 그런데도 프레이의 차분한 눈빛을 받으니 대충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설명을 모두 들은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계산을 치르려는 순간이었다.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돈은 받지 않겠소. 멀쩡히 돌아온다면 그때 받기로 하지.”

프레이가 꺼내려던 손을 멈칫하더니 빙긋 웃었다.

“장사치에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군요.”

“마누라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했던 말이군. 뭐, 가족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되니 무슨 상관이겠소.”

프레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돈은 여유가 있지만, 주인의 호의를 거절하기 싫었다.

“잘 먹었습니다. 특히 소시지가 입에 맞더군요.”

“특이하군. 우리 가게는 맥주 빼고는 시체라는 소리가 많았는데.”

주인이 픽 웃으며 말했다.

“당신 얼굴, 기억해 두겠소이다. 꼭 살아서 오시오. 그때까지 더 맛있는 소시지를 구워 둘 테니까.”

“기대되는군요.”

프레이는 몸을 돌리려고 했을 때, 주인이 지나가듯이 말했다.

“참. 요즘 산맥 근처서 시체가 발견되고 있다오.”

“몬스터의 소행입니까?”

“아니. 병장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더군.”

병장기의 흔적. 프레이는 주인의 말을 빠르게 이해했다.

“…산맥 근처에서 누군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

“그렇소. 뛰어난 실력을 가진 용병들도 벌써 몇 당했다오.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살인귀들은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고 있을 것이 틀림없소.”

“시체는 최근에 발견된 겁니까?”

“그렇다더군.”

주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아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위병들이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밝혀진 것 없다오. 내 알기로 용병들도 몇 번 고용한 걸로 아는데 성과는 없었지.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산맥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으니 도시에서도 대응이 시원찮다오.”

일부러 벌집을 들쑤실 필요가 없다는 거다. 애초에 웬만하면 갈 일 없는 위험 지대니까.

‘산맥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건가?’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프레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겠습니다.”

프레이는 그제야 가게를 나섰고, 곧바로 이스파니올라에서 나갔다.

그러자 거대한 대로가 나타났다.

‘맥은 한나절 정도만 걸으면 산맥의 초입이 나온댔지.’

산맥으로 이어지는 길이라서 관리가 아예 안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럭저럭 길의 형상을 갖고 있다.

프레이는 와일드한 느낌의 대로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슈하이저의 던전은 동굴(Dungeon)의 형태가 아닐 확률이 높다.

‘구름을 뚫을 기세로 솟은 산. 정상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 그리고 호수에 있는 작은 섬.’

슈하이저가 예전에 했던 말이 단서였다. 어디를 말하는 건지는 알겠다.

‘운관봉. 드레이크 마운틴이라고 불리는 그 산이겠군.’

정상에 있는 호수는 아마도 화산호수. 거기에 있는 작은 섬을 찾으면 되겠지.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초입이라면 지금 경지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중턱을 넘어가면 몬스터의 레벨이 급등한다. 놈들을 여유롭게 상대하려면 최소 6성의 경지엔 닿아야 된다.

물론 큰 걱정은 없다. 이스파니아 산맥엔 천연의 마나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산맥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수련하면 경지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한 달 정도 걸리겠지만.

‘도착했군’

프레이는 앞을 바라봤다. 어느새 무성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이 울창한 숲은 그대로 산의 꼭대기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산이 주위에 백여 개는 있겠지.

즉, 이곳이 바로 이스파니아 산맥의 초입이란 뜻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프레이는 손을 주억거리며 숲으로 들어갔다.

* * *

프레이는 수행에만 온전히 집중하길 원했다.

‘한 달이라고 정하긴 했지만.’

사실 그것도 빠듯하다.

생리적인 활동을 제외하고는 하루를 모조리 수행에만 할애해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숙련된 마법사도 괴로워할 강행군이지만, 이미 4,000년의 세월을 버텨 낸 프레이에게 있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수련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소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된다.

‘비교적 안전할 것. 그리고 마나가 특히 더 집중된 장소일 것,’

장소를 물색하는 건 나름대로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

프레이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순탄하지는 않았다. 몬스터 천국이란 이명에 맞게 귀찮게 달라붙는 몬스터들이 많았던 것이다.

물론 산맥의 초입이니만큼 조무래기뿐이었다.

이틀의 시간이 흐르고, 프레이는 비로소 원하던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커다란 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장소였다.

수련 장소치고는 고전적인 느낌이 물씬 난다. 물론 저 폭포를 머리로 받아 가며 명상을 할 생각은 없다. 프레이가 주목한 건 폭포의 뒤쪽에 있는 동굴이었다.

사람은커녕 몬스터의 손길조차 거의 타지 않은 곳이다. 폭포 안은 어두웠지만 마법으로 밝힐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다.

‘여기가 괜찮겠어.’

가장 좋은 점은 의식주 중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장소란 것이다.

이 동굴은 거처로 쓰기에도 손색이 없었고 식수나 먹을 것을 구하기도 용이한 장소였다. 가지고 온 식량으로 쭉 버티기엔 빠듯하니까.

“좋아.”

프레이는 일부러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선택한 수련은 바로 투쟁이었다.

이사벨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투쟁의 수련법, 프레이가 끝까지 알려 주지 않았던 건 정말로 리스크가 컸기 때문이다.

우선은 마나를 모은다. 산맥의 마나를 체내에 받아들인 프레이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무척이나 농밀한 마나군.’

그는 과거에도 이스파니아 산맥에서 수련한 적이 있었다. 기억이 조금 흐릿하긴 하지만, 그때보다 마나가 더 진해진 것 같다.

스으으.

프레이의 체내에 마나가 모여들었다.

신체로 모여든 마나는 배꼽 밑에 있는 마나룸(Mana room)으로 모인다. 프레이는 아주 약간의 여유만을 남겨 두고, 최대치까지 마나를 모았다.

스으으-

해가 떠오르고, 해가 졌다.

그리고 다시 해가 떠올랐을 때, 프레이는 비로소 필요한 최소한의 마나를 모두 모았음을 깨달았다.

포만감과는 다른 충족감이 전신을 감쌌다.

마나가 충만할 때 느끼는 감각은 일종의 오르가즘에 가까웠다.

“후우…….”

1단계는 완료다. 그는 눈을 뜨고, 곧바로 주머니에서 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꼬박 하루 동안 수분을 보충 못 했더니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이건 마나의 충만함에 뇌가 속고 있는 거다. 그는 억지로 입에 육포를 구겨 넣은 다음 삼키고, 곧바로 수면을 청했다.

다섯 시간 정도를 자고 다시 일어났다. 생각보다 오래 자고 말았다.

‘이제부터 제법 힘들어질 테니 마지막 휴식을 보냈다 쳐야겠군.’

그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다음 크게 심호흡했다.

마나를 모으는 건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프레이는 마나룸에 자리 잡은 마나를 두 개로 나누었다. 쉽게 설명했지만, 엄청나게 고된 작업이다.

일단 신체에 자리 잡게 된 마나는 서로 달라붙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레이는 능숙하게 마나룸의 중간에 선을 그었다.

50 대 50.

마나가 정확한 비율로 나눠졌다.

비로소 투쟁의 수련을 시작할 준비가 끝난 것이다.

‘후…….’

이제부터는 약간의 고통이 동반된다.

프레이는 오른쪽에 있는 마나가 불의 속성을 띠게 만들었다. 반대로 왼쪽에 있는 마나는 물의 속성을 띠게 만들었다.

쿠구구

“…….”

상극의 속성을 갖게 된 마나들은 곧바로 서로를 견제했다. 프레이는 배꼽에 미약한 통증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하니 조절이 어렵군.’

이것이 바로 투쟁의 수련법이었다.

마나룸은 이제 단순한 저장고가 아닌 전장이 되었고, 각 진영의 마나들은 병사가 되어 작은 전쟁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마나가 폭주를 일으켜 마나룸이 손상되고, 최악의 경우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프레이는 그 투쟁을 관찰하면서, 한쪽이 힘이 부친다 싶으면 작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면 다시 밸런스가 맞춰지고, 마나는 한층 더 정제된다.

또한 마나들이 정신없이 치고 박는 동안 마나룸의 수용 공간과 내구도도 크게 향상된다.

“…….”

프레이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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