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9화. (129/132)

외전 9화.

이후에도 에셀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님께서 눈여겨보셨던 장인의 참여 의사를 확인했습니다. 곧 남부로 올 테니 도로 공사에 이어 이후 공사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지금은 은퇴한 황실 장인 말인가요?”

“예. 자재 수급은 현지 상업 활성화를 위해 남부에서 역시 공수하기로 했습니다. 몇몇 가문에서 쓸 만한 광산과 숲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확인한 바가 있었죠. 샤드로 부인. 이 영지에서 중점적으로 자재를 수급할 생각인데 이것도 살펴보도록 하세요.”

“아…….”

다과를 제외한 탁자 빈 곳에 점점 서류의 산이 쌓이기 시작했다.

체린 샤드로가 막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 보았던 저기, 아가사의 집무 책상과 비슷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도로 정비를 시작했으니 황실에서도 반응이 있을 텐데요.”

“예. 폐하께서 잠깐 남부 귀족의 군사 상황을 살펴보라, 군부 대신에게 이르셨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 외에도 이로 인해 거둘 이익, 도로 정비로 인해 연계될 무역에 대한 수익, 전망, 수도의 반응 등등.

체린 샤드로를 배려하느라 이 간이 회의는 평소와 달리 순서를 밟아, 설명하듯 확인도 곁들이며 천천히 진행되었다.

아가사는 약 반나절 동안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

찻잔을 다섯 번째 바꾼 아가사가 서명만 남겨 둔 문서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여기까지가 노빌리스가 남부에서 벌일 첫 사업이에요. 그 외에 보충해야 할 것이나 참고할 것이 있을까요, 샤드로 부인?”

“없, 는 것 같아요.”

시각을 확인한 아가사가 깃펜을 잉크에 적시며 빠르게 서명하고 인장을 찍었다.

샤드로 부인에게 설명을 겸하느라 평소보다 시간이 두 배는 더 지나가 있었지만.

나름 나쁘지는 않았다. 이미 예상한 결과이기도 했고 체린 샤드로가 필사적으로 따라온 덕분도 있었다.

‘오기로 따라온 거겠지만 능력은 확실히 있어.’

반면 체린 샤드로는 고작 반나절 만에 머릿속으로 쑤셔 박힌 엄청난 보고와 결정과 정보의 향연에 약간 넋이 나가 있었다.

아가사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샤드로 부인. 시간이 늦었는데 함께 만찬을 드는 건 어떨까요?”

“네? 네.”

대답하고서야 샤드로 부인은 아차, 한 얼굴이었다.

“제시, 요리장에게 저녁 만찬에 손님이 참여한다고 이르렴.”

“예, 마님.”

물론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가사는 도로 정비를 시작으로 남부에서 크고 작은 사업을 천천히 불려 갔다.

남부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이 증대되었고.

금은 풍족하게 돌았고 상업은 활성화되었으니.

이안이 성인이 될 즈음이면 근 20년간 약간 침체하였던 과거는 찾아보기도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

약 한 달 뒤.

“이제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샤드로 부인. 다음에는 내 살롱에서 볼 수 있을까요?”

“…….”

소파에 앉아, 물끄러미 아가사를 보던 체린 샤드로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체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간 제가 범한 무례를 벌하시는 대신 좋은 가르침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내 진심을 알아주어서 기쁘군요. 아가사라 불러도 좋아요, 체린 부인.”

“아가사 부인. 언제든 초대장을 보내 주시면 기쁘게 참석하겠습니다.”

큰 소란 없이 남부는 전처럼 대영주를 중심으로 뭉쳐지고 있었다.

어느덧 초여름이었다. 마이뉴코르 제국으로 갔던 노빌리스 상단이 무사히 두 번째 상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아라투스 후작 부부가 외부 활동을 개시했다는 소식에 부단주, 필립이 직접 남부까지 축하 선물을 가지고 왔다.

“상단주님을 뵙습니다. 그간의 보고도 드리고 무사히 출산하신 것을 축하드린다는 인사도 드리고 싶어 직접 왔습니다. 혹시 제가 불편하게 해 드린 것은 아닌지요?”

“그럴 리가.”

막 출산했을 때도 상단에서 선물이 왔었으니 두 번째였다.

이번 상행에 갔을 때 골라 온 것인지 선물 중에 동부 물품이 눈에 띄었다.

“이번 상행의 성과가 좋았나 보네.”

“예. 그렇습니다.”

바로 보고가 이어졌다. 요즘 동부 물품이 유행을 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수치상으로도 첫 번째 상행의 세 배가 넘는 이익이 보이고 있었다.

“첫 상행 이후로 거래처를 조정하고 판로를 더 확대했습니다. 세 번째는 더 큰 이익이 남을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부단주가 수고가 많아.”

“아닙니다. 혹 쓰시다가 마음에 드신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즉각 가져오겠습니다.”

상단 전체의 선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가사가 선택한 것은 수도 사교계의 귀족들도 선호하게 될 것이다.

응접실 한편에 쌓인 선물을 살펴보던 아가사는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한 촉감의 원단에 관심을 주었다.

“새로운 옷감인가?”

“이번에 내보일 신상품입니다.”

얇고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섬세하게 짠 원단은 동부의 특산품이었다.

그중에서도 촉감이 좋고 갖가지 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인 것이 좋았다.

“이것, 괜찮네.”

이번 여름, 이안을 위해서 새 옷을 짓기에도 적당해 보였다.

필립은 아가사가 선택한 원단을 추가로 들인 뒤 품속에서 납작하고 고급스러운 보석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선물입니다.”

최상급의 굵은 다이아몬드가 달린 목걸이였다.

“직접 축하드리고 싶어서 조금 늦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직접 온 거군?”

깔끔하고 우아한 모양새가 평소에 걸기에 좋은 것이었다.

“고마워.”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더 좋은 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필립은 아가사가 선택한 원단 하나를 품에 안고 예를 갖췄다.

올해 여름 사교계에서는 저 원단이 유행을 타게 될 터였다.

아가사는 응접실 창가에서 필립이 탄 마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 후 이안의 방으로 향했다.

막 묽은 수프를 먹고 있던 이안이 아가사를 보자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가사를 닮은 금발이 제법 숱이 풍성해져 어제보다 오늘 훨씬 귀여워져 있었다.

“이안의 식사는 끝났어?”

“예, 마님.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내가 먹일 테니 이리 줘.”

아가사는 유모의 손에서 유아용 작은 스푼을 받아 들고 이안 앞에 앉았다.

“우리 아기. 얼마나 잘 먹나 한번 볼까?”

스푼을 쥔 손이 달라졌어도 이안은 수프를 잘도 받아먹었다. 주는 대로 꼴딱꼴딱 먹는 모습에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착하다.”

포동포동한 뺨에 반쯤 수프를 흘리면서도 열심히 먹은 이안을 안아 올려 바닥에 내려 주었다.

“아부부부.”

이제 제법 다양한 옹알이를 할 줄 알게 된 이안이 손을 흔들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요즘 인형을 좋아하십니다.”

신나 보이는 이안을 보고 있는 아가사에게 유모가 다가와 노란색 물고기 인형을 가져다주었다.

“그래?”

“소리가 나서 특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 벨벳으로 만든 노란색 물고기 인형이었다. 손으로 잡을 때마다 바스락대는 것도 같은 소리가 나 아기들이 흥미를 가질 만했다.

“아우부부.”

인형을 안겨 주자 이안이 야무지게 꼬리 부분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바스락대는 소리를 즐기며 입으로 빨기 시작했다.

“저런.”

놀이라기엔 부족해 보이는 모습에 아가사가 웃음을 터트리자 유모가 재빨리 변명을 덧붙였다.

“매일 세탁하고 있습니다.”

인형이 침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노는 것을 지켜보던 아가사는 거울을 가져오라 명령했다.

거울 놀이는 며칠 전까지 이안이 가장 좋아하던 놀이였다.

“이안, 여기 좀 볼까?”

아기의 키에 맞춘 거울은 테두리를 금으로 두르고 루비로 장식한 물건이었다.

보통의 인지 능력을 가진 이라면 거울의 화려한 장식에 놀랄 테지만 이안의 눈에 보이는 것은 유리 속에 비친 본인의 모습뿐이었다.

“꺄아!”

활짝 웃더니 이내 인형을 놓고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이게 누구지? 응?”

아가사가 추임새를 넣어 주는 것에 맞춰 거울에 다다른 이안이 손을 뻗어 거울 속 자신을 건드렸다.

그러곤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활짝 웃었다.

“어머!”

같이 거울 속에 비치고 있는 아가사나 유모의 모습엔 아랑곳없이 오직 자기 자신의 모습에만 집중한 얼굴이었다.

“저게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건가?”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른 거라면 또래의 친구가 필요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나 좋아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아가사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돌렸다.

“제시, 그이는 어디 있지?”

“연무장에 계십니다.”

“그럼 그리로 가자.”

거울에 푹 빠진 아이를 한 번 안아 준 후 방을 나섰다.

영주 성 뒤뜰의 개인 연무장은 에녹이 기사단 훈련 외에도 자체 단련을 할 때 쓰곤 했다.

기온이 따뜻하게 풀리자 개인 훈련을 하는 일이 잦아졌는데.

아가사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그가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훅, 일직선으로 매섭게 떨어지는 곧은 검.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듯했지만 거기에도 그의 성품과 절도가 녹아 있었다.

나름 거리도 두고 조용히 지켜보았건만 사내는 곧 그녀의 등장을 눈치채고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내가 너무 오래 밖에 있었습니까?”

하인이 건넨 수건으로 대강 땀을 닦아 내고 겉옷을 걸쳐 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아가사는 그의 옷깃을 정리해 주며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제가 훈련을 방해한 것 같아요.”

아가사의 기척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의 검이 멈출 일은 없었을 것이다.

허리에 찬 검을 슬쩍, 물린 에녹이 미소를 지었다.

“끝나 가던 참이었습니다. 도리어 그대가 나를 찾아 연무장을 방문해 주니 기쁘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별건 아니고요.”

하인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 이르며 자연스레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안에게 친구가 필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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