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 (121/132)

외전 1화.

외전 1. 신혼여행, 7일간의 기록

마이뉴코르 제국 사절단이 떠난 뒤 아가사가 즐기게 된 것은 빙과와 빙수였다.

벽돌로 웅장하게 지어 올린 팔라비 성은 제법 시원한 편이었지만 한여름의 습윤하고 무더운 공기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숲이 보이는 앞뜰에 파라솔을 펼치고 그 아래 카우치와 테이블을 두고.

아가사는 우유와 과일이 듬뿍 들어간 빙수를 입에 물었다. 세 그릇째 먹는 것을 보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배탈 납니다.”

“더운걸요. 여름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세 그릇 정도야, 뭐.

에녹의 시선이 한창 먹고 있는 빙수 그릇을 지나 테이블에 놓인, 세 번째 바뀐 찬 음료에 닿아 있었지만.

숲과 그 아래 보이는 마을과 한창 공사 중인 도시 전경에 시선을 둔 아가사는 까맣게 알지 못했다.

옅은 숨을 내쉰 사내가 아가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내일은 바다에라도 나가시겠습니까. 그럼 한결 더위가 가실 겁니다.”

“응, 그래요. 나가는 김에 낚시를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아가사가 다른 은제 티스푼을 들어 빙수를 한입 펐다. 사내가 익숙하게 고개를 기울여 받아먹었다.

긴 속눈썹 아래 짙은 회색빛 눈동자가 나른한 빛을 띠었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도 덥지 않았을까.

“어때요?”

“……달아.”

“그래도 맛있죠?”

사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아무리 더워도 차가운 것에 썩 손을 뻗는 성격은 아니라서.

아가사는 저 한 입 먹은 후 그에게도 한 입 먹여 주었다. 사내가 순순히 입을 벌렸다. 붉은 입술 사이로 은제 스푼이 반짝였다.

멍하니 그 모습을 응시하며 차가운 빙수를 입에 물었다.

눈앞의 광경만큼이나 단맛이었다.

느릿하게 들려 올라간 눈꺼풀 아래 그녀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아가사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좀 더 드실래요?”

“내가 빼앗아 먹어도 되는 겁니까.”

“당신도 더울 것 같아서요.”

그는 또 입술을 여는 대신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을 주었다. 탄탄한 가슴팍 위로 얇은 드레스 자락을 걸친 등허리가 가볍게 맞닿았다.

“나는 다른 게 먹고 싶습니다만.”

“……빙수 맛이 날 거예요.”

“맛있겠군요. 본래도 달지 않습니까.”

단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가사는 눈을 감았다. 무색 같은 사내에게서 낯설면서도 부드럽게 등허리를 감싸는 손만큼이나 진한 당밀 맛이 풍겼다.

한번 선을 넘은 뒤로 그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주 신혼을 즐겼다.

때로는 그 자리에서 혹은 침실에서.

아무런 사건도 문제도 없는 평화로운 날이었다.

이튿날, 아가사는 바다에 선박을 띄웠다.

목적지는 팔라비 섬 근처의 작은 돌섬이었는데.

노빌리스의 군함 두 척과 록스바드 제국 동부 해군 함대가 주변에서 은근히 따라붙고 있었다.

아가사는 갑판으로 나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곁에는 자연스레 에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근에 물고기가 많다더군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면 위로 커다란 물고기 몇이 뛰어올랐다 사라졌다. 낚시에 흥미를 동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누가 더 많이 잡나 내기할까요?”

“상품은?”

“뭐든 원하는 것 하나 들어주기로 해요.”

“좋습니다.”

돌섬 근처는 수면이 그리 깊지 않아 좀 더 작은 범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배가 준비되었다는 소리에 자리를 옮긴 아가사가 잠시 침묵했다.

아찔한 줄사다리 아래.

지금 탄 선박의 반절쯤 되는 배가 둥둥 떠 있었다.

호위로 따라왔던 제2부단장, 휴버 카르웬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아무래도 무리시겠지요, 마님?”

같이 밑을 내려다보던 측근 하녀, 제시와 마리가 불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떨어지진 않겠죠, 마님?”

“…….”

아가사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한 몇 번의 낚시 경험은 강이나 귀족을 대상으로 한 실내 낚시터에서 한 것이 대부분이라서.

“이리 오십시오, 부인.”

그가 한쪽 팔을 벌려 보였다.

줄사다리와 그보다 굵은 팔.

“…….”

잠시 고민하던 아가사가 조용히 그의 품으로 찾아들었다.

“괜찮아요?”

“내가 드는 랜스 무게가 그대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아가사.”

나직이 속삭인 그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일순 숨을 들이켰던 아가사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잘 부탁해요.”

“무서우면 눈 감고 있어도 됩니다.”

훌쩍, 배의 선체를 넘어선 사내가 단단히 줄을 붙들었다.

발이 허공에 떴다. 순간 오싹한 기분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쉬…….”

낮게 토닥인 그가 몸을 아래로 내렸다.

흔들거리는 배.

쥐어짜이는 듯한 소리가 나는 밧줄.

아무것도 없이 공중에 뜬 다리에 바닷바람과 치맛자락이 동시에 휘감겼다.

소리 없이 밧줄을 타고 내려간 사내가 갑판에 안착했다.

그가 꼭 감긴 눈꺼풀 위로 입을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무섭습니까.”

“……다 왔어요?”

어떻게 할까.

에녹은 대답하는 대신 제게로 파고드는 여인의 뺨과 귓바퀴에 입을 맞췄다.

꼭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위험하게 저 보지 말고 아래를 보세요, 에녹.”

“아래요.”

“밑을 보고 내려가야죠. 발을 잘못 디디면 어떻게 해요?”

아가사가 그에게 매달려 끙끙대는 사이 기사들의 어깨에 들쳐 업힌 측근 하녀들이 연이어 갑판에 도착했다.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한 아가사가 한쪽 눈을 살그머니 떴다. 코앞에서 시선을 맞댄 사내가 나직이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 도착한 모습은 아니었다. 순간 아가사는 그의 어깨에 두른 손에 힘을 주었다.

절로 두 눈이 치켜뜨였다.

“설마 도착해 놓고서 말하지 않은 거예요?”

“……화났습니까?”

“그래요.”

내가 무서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뒤늦게 허공에 떠 있던 발이 갑판에 닿았다. 팔을 풀려 하자 에녹이 제 손을 붙들었다.

“어디 가려고요.”

분명 공간을 두고 가볍게 붙들었을 뿐인데.

어떻게든 팔을 빼 보려던 아가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놔주세요.”

“…….”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스르르, 손에 힘이 풀린 틈을 타 몸을 빼낸 아가사가 뒤돌아섰다.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아가사.”

“늦었어요.”

“많이 화났습니까.”

“다음에 올라갈 때는 나 혼자 올라갈 거예요.”

“위험한데.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생각해 보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방금까지 두 눈을 꼭 감고 내게 매달려 있었으면서 말입니까.”

아니, 달래는 거야, 더 화나게 만들려는 거야?

아가사가 고개를 돌린 순간 어깨 위로 잘생긴 얼굴이 얹어졌다.

“화내지 말아요, 아가사. 내가 잘못했습니다.”

“……!”

그 무심한 낯으로.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며 사내가 눈을 깜빡였다.

“…….”

“화 풀렸습니까?”

기민하게 감정 변화를 알아챈 사내가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하게 물었다. 그는 이런 쪽으로도 눈치가 빨랐다.

아가사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방금 그건 너무 치사했어요. 알아요?”

“압니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지. 그렇지 않습니까.”

슬쩍, 귓가로 올라온 손이 흘러내린 금발을 귀 뒤로 넘겨 꽂았다.

“정말 예뻤습니다. 나도 모르게 계속 보고 있을 만큼.”

그 밤 이후로, 그는 정말이지 속엣말을 참는 법이 없어서.

이번에야말로 속이 풀린 아가사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살짝 당기는 손에 순순히 파고들듯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자잘한 입맞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다음에도 내가 안고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든가요.”

나직한 음성은 덤이었다. 아가사는 붉어진 귓가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도 모른 채 조금 퉁명스레 대답했다. 큰 손이 달래듯 등을 쓸고 있었다.

배가 점차 돌섬에 가까워졌다. 오늘 온 돌섬은 팔라비 섬의 집정관, 필 버틀러가 추천한 곳이었다.

종종 낚시를 즐기러 오는 이들이 있었던 듯 낚시를 하기 좋은 곳에 넓고 평평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먼저 온 하인들이 이미 가제보와 휘장을 치고 즉석에서 해산물을 구워 먹을 수 있게 화덕과 테이블 등을 준비해 두었다.

한쪽에서는 요리사까지 대기 중이었으니.

“도착했습니다, 나리.”

선원들이 섬과 배 사이에 널빤지로 만든 간이 다리를 놓았다. 에녹이 다시 한쪽 팔을 벌렸다.

“…….”

“응?”

조금 망설이던 아가사가 이번에는 두 눈을 뜨고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굵고 단단한 팔이 허리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흔들리는 다리를 지나.

탁-

에녹은 바닷물이 흐르고 제멋대로 깎인 바위까지 건넜다. 혼자 바다로 툭 튀어나온 평평한 돌바닥이 오늘 놀 낚시터였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사.”

그는 이번에는 도착하자마자 저를 내려 주며 알려 주었다.

쪽-

“고마워요.”

“…….”

뺨에 입을 맞춘 아가사가 뒤돌아서서 카우치와 낚싯대가 놓인 곳으로 향했다.

휴버 경이 안전 점검을 마치고 물러나고 있었다.

“마님. 이상 없습니다.”

“고마워요, 경.”

낚싯대를 드리운 아가사가 카우치에 앉으려는데 에녹이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에녹?”

한차례 머리칼을 쓸어 올린 사내가 성큼,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내기, 지금부터 시작입니까?”

“네. 던지세요.”

그가 낚싯줄을 힘껏 던졌다. 받침대에 낚싯대를 얹어 두고.

아가사는 기다렸다. 올 때 바다 위로 물고기가 보이길래 금방 잡힐 줄 알았더니.

낚싯대는 한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아가사는 턱받침을 한 채 새파란 바다 위를 응시했다. 끝없는 펼쳐진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저게 수평선인가.

오늘도 햇살은 뜨겁게 대지를 내리쬐고 있었다.

빛나는 해수면과 무더운 바람과 하얀 구름.

구름은 뜻밖에도 옆에 앉은 사내의 눈동자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늘진 부분이 밝은 빛을 머금은 회색빛과도 닮아 있어서.

문득 옆을 돌아본 아가사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도 한 손에 턱을 괸 채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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