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성 밖을 정찰 중이던 에녹이 자작을 발견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아가사는 무리하지 않고 우선 목욕실로 이동했다. 따뜻한 물에 아직 가시지 않은 졸음을 깨우고 조찬에 적절한 복장을 골라 단장했다.
이른 아침.
영주 성의 식당에는 먼저 온 에녹과 코우데이 자작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라투스 후작 부인을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자작.”
시중부 소속의 시종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구두로 가볍게 내려진 황명인 것 같았다.
정중히 예를 갖추는 자작에게 앉으라, 손짓한 아가사가 에녹을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
“에녹.”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부인.”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춘 사내가 제 옆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아직 군 제복 차림이었으니.
아가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기민하게 알아챈 자작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른 시간부터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폐라니요. 황명을 받았으니 자작이 서두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랍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조찬이 시작되었다.
주로 속을 따뜻하게 덥혀 줄 뜨거운 수프와 탕 요리가 나왔는데.
추운 겨울에 어둠을 헤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던 코우데이 자작은 노빌리스와 아라투스의 요리장이 짠 식단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숟가락을 움직이는 손이 쉬지 않았다.
아가사는 그가 식사를 거의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자작을 이 먼 남부까지 보내신 것을 보니 중요하게 전하실 말씀이 있으셨나 봐요.”
잠시 멈칫, 하던 자작이 식기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훔쳤다.
“혹 주위를 물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
물끄러미 자작을 응시하던 에녹이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지척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식당 밖으로 물러섰다.
제1부단장, 레온 타크란과 측근 하녀마저도 벽면까지 멀찍이 물러섰으니.
“되었나.”
“감사합니다, 후작님. 그럼 폐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엄숙하게 표정을 고친 코우데이 자작이 그러나 작게 읊조렸다.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꿈에 황금 꽃잎을 가진 장미 세 송이가 피었다 하셨습니다.”
“네?”
“그 꽃이 매우 아리땁고 향기로우나 가시는 날이 서 있어 꼭 짐의 대녀가 떠오른다, 말씀하셨으니.”
뒤이은 말을 짐작한 아가사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러니까.
“아라투스 후작 부인. 혹 지금 태기가 있으신지요? 폐하께서 그것을 꼭 확인하고 오라, 명하셨습니다.”
아가사는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에녹도 말없이 낯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궁정에서의 경력이 짧은 자작이 전령으로 왔다, 했을 때부터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먼 남부까지 웬 칙사인가 했더니 겨우 두 달 만에 임신 여부를 알기 위해 전령을 보냈다는 소리였다.
“자작. 그러니까, 폐하께서 내 임신 여부를 알아 오라고 하신 게 맞나요?”
“그렇습니다.”
꿈에 장미꽃이 세 송이 나오면 모두 저라고 생각하는가.
아가사는 대놓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차마 말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아무리 대부라도 대녀의 임신 여부를 알기 위해 전령을 보내는 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전에는 결혼에 공을 들이시더니.
이제는 그 관심이 후계자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코우데이 자작이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제가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송구합니다, 후작 부인.”
“자작의 탓이 아닌 것은 알고 있어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의원을 불러 확인을 해 주십시오. 저는 꼭 결과를 알아 가야만 합니다.”
황제가 왜 또 젊은 귀족을 인선으로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궁정에서 오래 지낸 귀족이라면 감히 이런 민망한 요구를 제게 할 수 있었겠는가.
시선은 아래로 내리깔았으면서 자작은 꿋꿋하게 황명을 수행 중이었다.
아가사가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요, 자작. 황명은 확실히 전달받았답니다. 이른 시일 내에 결과를 알려 주겠어요.”
“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확답을 들은 자작이 밝아진 낯으로 도망치듯 조찬실을 나섰다.
잠시 침묵이 식탁 주변을 맴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녹이었다.
“불편하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아니에요.”
그저 골치가 아플 뿐이었다. 영지로 내려온 지 겨우 두 달 만에 칙사까지 보내 임신 여부를 알아볼 정도라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
다시 한번 긴 숨을 내뱉은 아가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고 따뜻한 손이 대번에 등 뒤를 받쳐 왔다.
“이참에 검진받는다고 생각하죠, 뭐. 그간 바빠서 정기 검진도 빼먹었잖아요?”
“……그랬었지요.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잠시 충격받은 낯을 하던 사내가 즉시 목소리를 높였다.
“밖에 누구 없느냐.”
“부르셨습니까, 후작님.”
조찬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집사가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의원을 불러라. 부인의 건강을 살펴봐야겠다.”
“예, 후작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집사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아가사가 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당신도 정기 검진을 받지 못했다는 소리였네요. 이번에 당신도 같이 해요.”
“알겠습니다. 우선 그대부터 보고 나도 하도록 하지요.”
아가사를 따라 노빌리스 공작령까지 따라온 주치의는 갑작스러운 호출에도 놀라지 않았다.
“혹 아이가 생겼는지 확인하려고 해.”
침실에는 에녹과 측근 하녀들만 대기 중이었다.
주치의가 테이블 위에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기미가 있으셨습니까?”
“그런 것은 딱히 아니야.”
“침대에 앉으시지요. 제가 진찰해 보겠습니다.”
의원이 한껏 집중한 얼굴을 보여 주는 동안 아가사는 휘장 너머에 선 에녹만 응시하고 있었다.
딱히 임신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쿵쿵-
귓가에 울리는 심장 소리에 숨결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이게 무슨 짓이람.’
아가사는 이것을 마지막으로 두 번 다시 황제의 억지를 받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올봄에 수도로 올라가면 가감 없이 제 기분을 성토할 생각이었다.
묘하게 긴장된 공기가 흐르고.
한참을 뭔가 하고 있던 주치의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어떤가?”
나이 많은 주치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축하드립니다, 마님. 미약하지만 태기가 있으십니다.”
“뭐라고? 정말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에 놀란 나머지 아가사가 되물었다. 휘장을 걷은 주치의가 주위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축하드립니다, 후작님, 마님. 태기가 있으십니다.”
“세상에, 마님! 축하드립니다!”
“마님, 정말 기쁜 소식이에요! 후작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제시와 마리가 기뻐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아가사는 즉시 에녹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처음 보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 하나 꿈쩍하지 못하고 있던 낯이 서서히 변하더니 환희와 기쁨을 격렬하게 표출했다.
그런 감정 변화는 처음이라서.
“아기님이 아직 매우 작으셔서 모르셨을 수 있으십니다.”
앞에 선 주치의가 무어라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에녹이 제 눈가를 가리며 낮은 숨을 내뱉었다.
곧 나무토막처럼 삐걱거리는 발걸음으로 지척까지 다가온 사내가 제 손을 붙들었다.
늘 크고 단단한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에녹이 물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없는가.”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이니 몸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과격한 움직임은 삼가시고 먹는 것도 조심하십시오.”
“자네가 상시 곁에 있는 게 좋겠군.”
에녹이 아가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우리의 첫아이로군요.”
크고 따뜻한 손이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고 있던 아가사의 손 위로 부드럽게 겹쳐졌다.
아가사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 전혀 몰랐어요.”
“괜찮습니다. 나도 상상도 못 했던 것을요.”
낮게 웃음을 터뜨린 사내가 조용히 읊조렸다. 꿈속을 떠다니듯 단 음성이었다.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쁩니다. 그대와 내 아이라니,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것 같아서.”
눈을 깜빡이던 아가사는 그제야 서서히 실감이 나는 기분이었다.
정말 아이가 생겼구나.
저와 에녹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조금은 생소한 기분이었다.
딸이든 아들이든 이 아이는 그녀의 뒤를 이어 노빌리스 가문을 계승할 상속자이자 후계자가 될 것이다.
문득 친족들의 존재를 떠올린 아가사가 배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괜찮을까요?”
“뭐가 말입니까.”
“……아이가 생겼으니까 이제 정말 친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늘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철저하게 단속해 왔으나 이제는 정말 위험해질 것이다.
처음 보는 표정으로 부드럽게 풀려 있던 사내의 낯이 서서히, 그러나 사납게 굳어졌다.
“그 누구도 그대에게 손대지 못해. 내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믿어요. 그렇지만 내게는 당신이 가장 중요한 거, 아시죠?”
천천히 뻗어 간 손이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뺨을 쓸었다.
찰나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내게는 당신이 가장 중요해요. 당신 자신도 소중히 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아가사.”
그가 없으면 안 된다. 차라리 저가 죽고 말지 그가 제 곁에 없는 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사내의 눈동자에 일그러진 제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가 낮은 숨을 토해 내며 웃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어디 갈 리가 없지 않습니까.”
멈칫, 하던 아가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시 한번 말해 주세요.”
“내가 사랑하는 그대를 두고 어디 간단 말입니까. 걱정 말고 내 곁에 있으십시오. 언제나처럼 내가 그대를 지킬 겁니다.”
뺨을 감싼 손을 붙들어 에녹은 그 위에 오래도록 입맞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