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32)

105화.

아가사는 반사적으로 시각을 확인했다. 조회가 끝나기까지 대략 두어 시간 정도 남았으니.

전보다 훨씬 양호한 부름이었다.

“준비하고 입궁하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폐하께 그리 말씀 올리겠습니다.”

시종이 건넨 초대장을 측근 하녀, 마리에게 넘긴 아가사가 예를 갖추고 응접실을 나섰다.

‘참.’

그녀가 뒤돌아섰을 때 근위대장과 황가의 시종은 막 응접실을 나서는 중이었다.

“베일리 경.”

“예, 후작 부인. 뭔가 묻고 싶은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마이뉴코르 제국 사절단이요. 오늘 돌아간다고 들은 것 같아서요.”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작 부인. 오전 중으로 궁을 나설 예정입니다.”

“그런가요.”

아가사가 입궁할 시각은 정오를 넘어설 것이었으니.

“감사해요, 베일리 경.”

“아닙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후작 부인.”

다시 한번 예를 갖추고 황제의 칙사와 작별한 아가사가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마님. 오늘은 어떤 드레스를 입으시겠어요?”

“단정한 게 좋겠어.”

오늘 아가사가 고른 것은 치맛단 중간에 리본을 달아 주름을 잡고, 그 아래 겹겹이 자리한 치맛단이 차례로 돋보이게 제작된 드레스였다.

어깨에는 가죽을 덧댄 보드라운 망토를 덮고 보석 브로치와 금줄로 연결시켰으니.

“어때?”

“무척 아름다우세요, 마님.”

단아하면서도 은근하게 화려한 모습이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내실을 나서며 아가사는 제1보좌관, 에셀에게 명을 내렸다.

“혹시 모르니 그이에게 내가 입궁한다는 소식을 전하도록 해요.”

“예.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어느덧 정오였다. 아가사는 연락을 받고 1층에서 대기 중이던 제2부단장, 휴버 카르웬과 아라투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궁으로 들어섰다.

희고 붉은 커튼과 금사, 눈꽃 모양의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황궁은 이른 초겨울이 찾아온 듯했다.

황궁을 가로지른 마차가 황제 궁 입구에 멈춰 섰다.

오늘은 황제의 시종장이 아닌 고위급 시종이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마차 문이 열리고, 휴버의 에스코트를 받아 내려선 아가사의 드레스 자락이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아라투스 후작 부인을 뵙습니다.”

시종이 즉시 예를 갖췄다. 무심히 궁 주위를 훑어본 아가사가 물었다.

“폐하께서는 아직 태양의 홀에 계시느냐.”

“예, 후작 부인. 오시면 오찬실로 모시란 명을 받았습니다.”

“안내해.”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가사가 휴버의 에스코트를 받아 막 황제 궁으로 발을 들이려던 찰나였다.

“아가사 부인. 황제 폐하를 뵈러 왔나요?”

아가사는 단박에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타오르듯 아름다운 적갈색 머리칼에 오렌지빛 눈.

근처를 산책 중이었던 황태자비, 엘리자베스 록시바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사가 즉각 예를 갖췄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시녀들과 황실 기사들을 거느린 엘리자베스가 이쪽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폐하께서 부르셔서요. 막 들어가려던 참입니다.”

“아직 조회가 끝나지 않았을 텐데.”

제 시녀의 긍정을 확인한 엘리자베스가 자상하게 물었다.

“아가사 부인. 잠깐 나와 담소를 나누겠나요?”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비 전하.”

엘리자베스가 손을 휘젓자 시녀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시종도, 아가사의 측근 하녀도, 기사들도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되었으니.

듣는 귀가 멀어지자 엘리자베스가 부채를 팔랑이며 입을 열었다.

“큰일을 치렀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걱정했는데 다행히 괜찮아 보이네요.”

“비 전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전하께서는 꽤 힘을 쓰신 것 같지만.”

엘리자베스가 순간 부채로 냉소가 깃든 입술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곳에서라도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

‘둘 사이는 여전한 모양이구나.’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소 닭 보듯 하다가 황제와 황후가 한 소리 할라치면 가끔 함께 있는 모습을 연출했고.

한 달에 한 번 꼭 필요할 때만 간신히 합방했다.

겉으로만 합방이지 황태자비는 말로만 침궁에 들 뿐 몸은 자기 침실에 있었고, 황태자는 몰래 탈주한다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황태자 부부 사이의 유일한 연결 고리는 아가사 노빌리스였다.

결혼을 무려 일곱 번이나 한 대귀족.

엘리자베스는 종종 그녀를 부럽다는 듯이 보곤 했는데.

아가사는 사교용 미소를 만면에 띤 채 입을 다물었다.

엘리자베스가 왜 그녀를 총애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황실의 일이야.’

아무리 그녀라도 황가의 일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인자하게 웃었다.

“참, 선물은 잘 받았어요. 사실 내가 줬어야 했는데. 사냥제에서 디저트 파티를 열고 난 뒤 귀족들을 다루는 게 수월해졌답니다.”

가을 첫 사냥제 이야기였다. 아가사가 손을 쓰긴 했지만 주관자는 황태자비였으니 그녀 역시 면은 충분히 세웠을 터.

아가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비 전하. 도리어 송구한 마음인걸요. 제가 진상한 향신료 때문에 비 전하께서 오랜만에 주관하신 디저트 파티가 엉망이 되었잖아요.”

“괜찮아요. 오히려 그 사건 덕분에 오만한 귀부인과 영애를 쳐 내기도 했고.”

설핏, 웃던 황태자비가 다시 상냥하게 눈을 맞춰 왔다.

“그리고 아가사 부인은 그래도 괜찮아요. 내가 부인을 많이 아끼고 있는 것, 알지요?”

안다. 황태자비도 아가사가 사냥제의 디저트 파티를 권했을 때 무언가 판이 깔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넘어와 준 것이었다.

아가사가 공손히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 전하.”

“그래요. 전하와만 어울리지 말고 종종 내 궁에도 와 줘요, 부인. 나는 늘 노빌리스 상단에서 새로 취급할 물건들이 궁금하답니다. 다음 사교계에선 부인이 어떤 것을 선택할지 미리 알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솔직히 불편한 주제보다는 사교계 쪽 화두가 훨씬 편하기도 했고.

아가사가 곱게 웃으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며칠 전에 제 친우들과 함께 겨울 사교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옷도 맞추었는데 괜찮으시면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어떠실까요, 비 전하.”

“어머, 정말인가요?”

“마침 폐하께서 아직 태양의 홀을 나서지 않으신 것 같으니 잠깐 정도는 괜찮을 거랍니다.”

아가사가 올해 겨울에는 어떤 드레스와 문양이 유행할지, 어떤 차가 좋은지에 대해서 엘리자베스에게 소상히 추천하고 있을 때였다.

“송구하오나, 비 전하.”

멀찍이 서 있던 황태자비 궁 소속,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 중 하나가 다가와 예를 갖췄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조회가 끝난 것 같습니다.”

“아, 아쉬워라.”

그 말을 신호로 시녀들과 황실 기사들이 다시 황태자비의 뒤로 늘어섰다.

“좋아요. 곧 폐하께서 도착하실 테니 이만 들어가 보세요, 아가사 부인.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알죠?”

“예. 알고 있습니다, 비 전하.”

엘리자베스가 한 무리의 시녀들과 황실 기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아가사는 문득 제 후계에 관심을 가지던 황태자, 안토니 록시바를 떠올렸다.

‘나를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저래서야 다음 대 황제가 잘 태어날 수나 있을지.

어쩌면 황제는 노빌리스가의 후계자가 아니라 저쪽을 더 시급하게 돌아봐야 하는지도 몰랐다.

뭐, 그녀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황태자비의 등장에 막혀 멀찍이 떨어져 있던 황제 궁의 시종이 그제야 가까이 다가와 고했다.

“아라투스 후작 부인. 폐하의 다이닝 룸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자.”

아가사는 시종을 따라 황제 궁의 복도로 발을 들였다.

높고 장엄한 대리석 기둥.

일자로 뚫린 황금빛 대리석 복도 위로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실 기사단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소리 없는 소란스러움은 황족의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서자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종이 제국의 전경이 새겨진 황제의 개인 다이닝 룸의 문을 개방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폐하께서 납실 것입니다.”

“다녀올게요.”

아가사가 손을 거뒀다. 문 앞까지 에스코트했던 휴버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예.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아가사가 가벼운 다과를 들며 황제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시종장을 비롯한 시종들과 근위대가 쏟아져 들어왔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제는 조회를 마치고 바로 왔는지 위엄 있는 성장 차림 그대로였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어서 오너라, 아가사. 오래 기다렸느냐?”

“아닙니다. 방금 도착했어요.”

“그래, 태자비와 담소를 나누었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황제가 백호랑이 가죽으로 된 망토를 벗어 내리며 손짓으로 황좌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아가사가 폭신한 의자에 앉으며 답했다.

“네. 이 앞에서 만나 잠시 담소를 나누었어요. 승전을 축하해 주셨답니다.”

“오, 그래?”

“종종 궁에 놀러 오라고 하셨어요.”

“으음, 태자비가 너를 아끼긴 하지. 짐의 대녀와 태자비가 친하게 지내니 보기 좋구나.”

“황송하옵니다, 폐하.”

곧장 오찬이 시작되었다. 황제의 시종장이 직접 식전주와 갓 구워 낸 빵을 내려놓았다.

“들자.”

“네.”

오늘도 황제 직속의 요리장은 그녀의 입맛에 딱 맞는 요리를 내놓았다.

해산물 위주에 시거나 맵기보다 약간 단맛.

신선한 과일과 채소도 양껏 어우러진 식단이었다.

황제는 후식이 들어왔을 때 즈음 본론을 꺼냈다.

“오늘 짐이 너를 부른 건 크레스센쳐에서 항복 문서와 배상금이 도착했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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