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공적으로 긴급 궁정 회의 또한 종료되었으니 곧 사교계도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할 터.
영지로 떠나기 전, 아가사도 마지막 가을 사교계를 마무리해야 할 터였다.
그 전에 친우들과 보낼 시간도 내야겠고.
‘한동안 바쁘겠는걸.’
아가사는 이리스 부인의 심부름꾼이 답장을 받아 갈 수 있도록 즉시 펜을 들었다.
「나의 친우, 이리스 부인.
모든 일이 잘 끝나자마자 부인의 다정한 서신을 받게 되어 저 또한 무척 기쁜 마음입니다.
오랜만에 이리스 부인을 비롯하여 다른 친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을 생각하니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아요.
이번 살롱은 이리스 부인의 저택에서 보내기로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언제든 초대해 주시면 기쁠 거랍니다.
설렘을 담아, 아가사 노빌리스.」
서신을 마무리한 후 잉크를 말리고 자주 쓰는 라일락 향수를 흩뿌렸다.
자색 스타티스 한 줄기를 묻고 밀랍 위에 노빌리스 가문의 상징을 찍었으니.
“심부름꾼에게 전해 주도록 해.”
“예, 마님.”
알렌이 떠나자 에녹이 입을 열었다.
“새 일정이 생긴 것 같습니다.”
“네, 이리스 부인의 저택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번 겨울에는 수도에 없을 테니 남은 가을 사교계 기간은 알차게 보내야 할 듯싶었다.
물론 겨울에는 한창의 여름 때와 마찬가지로 별장이나 휴양지로 떠나는 이들이 많기에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아도 되겠지만.
에녹이 묵묵히 스테이크를 잘라 내며 덧붙였다.
“아쉽게 됐군요. 영지로 내려가기 전에도 그대의 시간을 내가 독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독점하고 있잖아요.”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사 후에 저와 온실이라도 거니시겠습니까.”
“응, 좋아요.”
이 저택에서 맞는 첫 가을이었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너무 바빠서 그와는 제대로 된 데이트마저 즐긴 적이 없었으니.
앞으로는 좀 더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어서 영지로 가고 싶다.’
물론 그곳에서도 일은 많겠지만.
대부분은 영주 성에서 해결 가능한 것이었으니 그와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 터였다.
늦잠도 잘 수 있을 테고.
식사를 마친 아가사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내란죄.
그 큰 대죄의 발생으로 혼란스러웠던 수도가 조금씩 본래의 분위기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불미스러운 일이었어도 도리어 제국에는 이득이 되었던 사건이었으니.
귀족들은 벌써부터 새로 생긴 중립 지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들뜨고 있었다.
“이번 겨울은 그곳에서 보내는 게 어떨까요?”
“해안가도 무척 아름답다죠? 이번에 동대륙과의 교역지로 선정된 섬과도 무척 가까워서 더욱 이국적인 분위기일 것이라더군요.”
“그 바로 옆이 아라투스 후작 부인께서 배상으로 받은 영지라면서요?”
“며칠 전에 영지전의 판결도 내려졌다고 들었어요. 노빌리스와 아라투스 가문의 압승이라고 하던데요.”
마이뉴코르 제국과의 일화가 화두로 올라오면 거기서 가장 큰 피해와 보상을 동시에 얻은 노빌리스와 아라투스 가문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었으니.
갖가지 이야깃거리로 수도가 떠들썩한 가운데.
이른 아침, 수도 노빌리스 제2저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몸을 살짝 말고 누워 있는 아가사 앞에 에녹이 베드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갓 구운 크루아상과 한입 크기로 손질한 과일 그리고 포도주 한 잔이 놓인 간단한 아침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사.”
기분이 좋아지는 먹음직한 빵 냄새에 아직 잠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정신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잘 잤어요?”
“네. 일어나시겠습니까.”
무릎 위로 베드 트레이를 올려 준 에녹이 그녀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등 뒤로 베개를 잔뜩 쌓아 주더니 흐트러진 머리칼 위에 잦게 키스했다.
“오전에 티파티가 있다기에 간단히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응, 이거면 충분해요.”
손을 뻗어 따뜻한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자 진짜 아침이 시작된 기분이 들었다.
에녹이 크루아상을 반으로 쪼개 주며 물었다.
“어제 그대의 오후 일정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티파티가 끝나면 저택에 돌아올까 해서요. 밀린 일을 처리하면서 겨울 동안 영지에서 입을 옷을 맞출 거예요.”
“그럼 저녁은 함께할 수 있겠군요.”
그동안 서신만 주고받고 얼굴은 보지 못하던 차에 열린 그들만의 살롱이었다.
아가사는 시간을 넉넉히 빼 두고 움직이기로 했다.
“혹 변동 사항이 있으면 연락할게요.”
“알겠습니다.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군요.”
쪽-
아가사가 불시에 고개를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잘 다녀와요, 에녹.”
“…….”
곁에서 대기 중이던 측근 하녀들이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가만히 내려다보던 사내가 고개를 숙여 뺨에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부인.”
아가사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정상화된 궁정 회의가 재개되는 날이었다.
아마 조회가 길어지겠지.
그녀가 오찬까지 이리스 부인의 저택에서 들고 오면 비슷한 시간에 귀환할지도 모르겠다.
시각을 확인한 아가사가 측근 하녀, 제시에게 시선을 주었다. 제시가 즉시 고했다.
“마님. 목욕물 준비되었습니다.”
“드레스는?”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내실로 들여놓았고 씻고 나오시면 바로 어울리는 장신구와 구두와 함께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오전으로 예정된 살롱에 참석하려면 이제 움직여야 했다.
아가사는 곧장 목욕실로 이동했다. 둥근 상앗빛 욕조에는 피로 해소에 좋은 약초와 꽃잎이 떠다니며 달콤 쌉싸래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따스한 물에 몸을 충분히 풀고 나와 내실로 이동했다.
한쪽에는 행거에 걸린 수십여 벌의 드레스가, 중앙에는 소파를 중심으로 세워진 두 개의 전신 거울이.
그 옆에는 보석함과 구두, 부채 등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마님. 오늘은 어떤 드레스로 하시겠어요?”
소파에 기대앉아 아가사는 며칠 전에 주문한 드레스들을 쭉 훑었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맞춰 드레스의 천이 살짝 두꺼워져 있었는데.
개중 눈에 띈 것은 연한 살구색의 오프 더 숄더 드레스였다.
팔목 부분을 살짝 조이고 부푼 셔링 소맷자락에 고운 주름이 져 있었고.
허리에는 큰 자수를 놓은 띠가.
치맛단은 러플로 된 산뜻한 드레스였다.
“저 위에 흰 털을 덧댄 망토를 걸치면 좋을 것 같아.”
“이번에 맞추신 흰 토끼털 망토는 어떠실까요?”
“그거 좋네.”
아가사가 내실을 나선 것은 정오 즈음이었다.
안전 점검이 끝난 마차를 타고.
아가사는 제2부단장 휴버 카르웬과 아라투스의 기사들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도뮤니아 후작가로 향했다.
수도 도뮤니아 저택은 신혼 저택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대로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뮤니아 후작 저택의 정문이 보였다.
본저택 앞에 마중을 나와 있던 이리스 부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오세요, 아가사 부인.”
“오랜만이에요, 이리스 부인. 제가 지각한 것은 아니겠지요?”
“전혀요. 그저 부인을 만날 생각에 기뻐서 제가 먼저 마중을 나온 것뿐이랍니다. 이제 괜찮으신 거지요?”
이리스 부인은 이 말을 하기 위해 현관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 분명했다.
아가사가 생긋, 웃었다.
“그럼요. 이리스 부인도 아시다시피 모두 잘 해결되었잖아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랍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되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아가사 부인. 막 다른 친우들도 도착한 참이랍니다.”
이리스 부인이 앞장서서 준비된 티파티 룸으로 인도했다.
오늘 살롱이 열린 곳은 2층, 후원이 보이는 큰 통창이 매력적인 방이었는데.
이르게 불을 지폈는지 따뜻한 공기가 흘러들었다.
붉은 공단과 원목 가구로 꾸며진 공간에 먼저 와 있던 케이트 에블라인 공작 영애와 바네사 베아트리츠 후작 영애, 실리아 카멜론 백작 부인, 마담 샬레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 아가사 부인!”
“이게 얼마 만에 뵙는 건가요. 정말 보고 싶었답니다.”
“어서 오세요, 부인. 이제나저제나 부인께서 언제 오시나 기다렸어요.”
“서신으로만 소식을 듣다가 직접 뵈니 정말 기뻐요.”
아가사가 웃으며 인사를 하나하나 되돌려주었다.
비어 있던 상석이 채워지고.
이리스 부인까지 아가사의 옆에 자리하자 본격적인 티파티가 시작되었다.
소리 없이 들어온 하녀들이 단 디저트와 향긋한 꽃 차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차에 관심이 많은 실리아 부인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이게 이리스 부인께서 새로 들이셨다던 그 차인가요?”
“맞아요. 저번 모임에서 말씀드렸지요? 동대륙에서 들어온 건데 맛이 좋더군요.”
향이 강하지 않고 단아한 맛과 깔끔한 뒷맛이 일품인 차였다.
‘에녹이 좋아할 것 같은데.’
그도 끝맛이 깔끔한 차를 좋아했다. 아가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리스 부인. 차 맛이 무척 좋네요. 혹 어디서 구하신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요즘 팔라비 섬을 통해 교역이 시작되면서 앙트라르 성에 질 좋은 차가 많이 수입되었지 뭔가요? 거기서 가져온 것이랍니다.”
“아하.”
그럼 노빌리스 상단에도 있을 터.
부단주에게 가져오라 이르면 될 것 같았다.
그때 바네사 영애가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런데 아가사 부인께서는 단 차를 좋아하시지 않나요?”
“음, 제 남편은 뒷맛이 깔끔한 차를 좋아하거든요.”
“어머나!”
“세상에, 아가사 부인!”
곳곳에서 터지는 비명을 들으며 아가사는 부채로 조금 쑥스러워진 얼굴을 가렸다.
생각해 보니 이런 적은 처음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