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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102/132)

102화.

배상 절차가 마무리되자 황제가 근엄하게 손을 들었다.

“이로써 마이뉴코르 측에서 준비한 비공식 배상 거행을 마치겠다. 2황자는 예정대로 즉시 사절단을 이끌고 떠날 준비를 하도록.”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예를 갖춘 페르난드가 뒤돌아섰다. 그 뒤로 금방 눈물을 쏟을 듯한 황손이 뒤따르고 있었다.

탁-

두 인영이 사라지자 아가사는 살짝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둥근 어깨선을 타고 짙은 남빛의 망토가 사르르, 흘러내렸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친필 사과문도, 새로운 영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폐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황제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어찌 짐의 덕뿐이랴? 다 너와 네 남편이 노력한 것이 크지 않겠느냐.”

“그래도 폐하께서 마이뉴코르의 황제께 요구해 주셨기 때문 아닌가요. 마침 이번에 얻은 글리스워드와 새로 얻은 중립 지대의 경계령이 맞닿아 있으니 이에 따른 관세의 일부를 폐하께 바치고 싶습니다.”

“그래, 그래. 이제 짐은 네 후계만 보면 바랄 것이 없느니라.”

자연스러운 언급에 잠깐 머뭇거린 순간 곁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겨울에는 영지로 내려가 있을 생각입니다. 그때 노력해 보겠습니다, 폐하.”

에녹이 정중히 예를 갖추며 대신 말을 올렸다.

만족한 황제의 웃음소리가 한동안 길게 이어졌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이번에 급하게 수도로 오느라 크레스센쳐 가문과의 항복 협상이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다, 하였지?”

“그렇습니다, 폐하.”

“어허, 평온해야 할 길이 그러면 쓰나. 짐이 다 알아서 해 주겠네. 어차피 크레스센쳐 후작 가문은, 아니지. 이제 작위가 자작으로 강등되었던가, 응?”

황제의 시선이 시종장을 향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어설러우, 모이스, 제닝스 가문은 간신히 처벌을 면했으나.

진영에서 헨리 인시디오 남작의 행적이 발견되었던 크레스센쳐가와 엘리부쓰가는 큰 처벌을 받았다.

엘리부쓰가의 작위는 회수되고 영지는 아가사에게 내려졌으며.

크레스센쳐가는 후작에서 자작으로 무려 2등위나 강등되었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을 내야만 했다.

황제가 한껏 풀린 낯으로 물었다.

“영지를 주랴.”

정신을 차린 아가사가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금광이 어떠실지요?”

“금광?”

“본래 크레스센쳐 가문에 요청했던 배상이 금과 금광이었습니다.”

“오, 그렇다면 주어야지. 금광에 더해 금도 내려 주마. 네, 이번에 고생이 심하였는데 당연히 그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황송하옵니다, 폐하.”

이어 황명으로 이번 영지전에 대한 판결까지 즉석에서 내려졌다.

황제가 인자하게 웃으며 직인을 찍고 봉한 판결문을 내려 주었다.

“좋은 소식 기대하고 있으마, 아가사. 기대하겠네, 후작.”

“황송하옵니다, 폐하.”

예를 갖추고 알현실을 빠져나온 아가사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제야 한숨 돌리며 물었다.

“잠시 온실에 들렀다 가면 어때요?”

“가까운 곳이 좋겠습니다.”

곁에는 에녹이, 뒤에서는 제2부단장 휴버 카르웬과 측근 하녀들이 따라붙고 있었다.

늦가을이었으나 온실은 거닐기 괜찮은 곳이었으니.

휴버를 비롯한 가신들이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아가사가 소담히 핀 꽃 무리를 구경하며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가사가 열여섯 살이 되고 나서부터 늘 있던 하문이었다.

재촉이기도 했고.

곁에서 그녀를 에스코트하던 사내는 답이 없었다.

‘뭐라도 말해 주면 좋을 텐데.’

이상하게 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무슨 생각 해요?”

위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바라시는 것을 그대도 바라는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뜨거웠던 귀의 온도가 얼굴까지 옮겨붙었다.

“알면서 왜 고민하고 그래요.”

그 이후로 언제 각방이나 쓴 적이 있었던가.

그들은 부부 침실이 필요 없을 정도로 늘 함께 잠들고 있었다.

잠자리를 할 수 없는 날조차 서로의 체온에 감겨 잠들곤 했으니.

“……!”

아가사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굳은살이 박인 딱딱한 손가락이 귓바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내 대답은 전과 같습니다, 아가사.”

살짝 떨어진 손 대신 까슬한 입술이 귓불에 와 닿았다. 고막 깊숙이 낮은 음성이 틀어박혔다.

“아이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대와 나 사이가 바뀔 일은 없습니다. 늘 그대를 아끼고 사랑하고 지킬 테니.”

“…….”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인. 나는 늘 그대의 편입니다.”

아가사는 떨리는 눈동자를 간신히 아래로 내렸다.

어쩌면.

그를 만나기 위해 일곱 번이나 결혼을 하게 되었노라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지금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달콤한 꽃 내음과 무색 같은 사내의 음성이 심장 깊숙이 아로새겨졌다.

“나,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불시에 튀어나온 진심에 아가사는 크게 눈을 뜨며 입을 가렸다. 곧 그 손은 바로 손목을 움켜쥔 사내의 손에 아래로 내려졌다.

“다시 한번 말해 주시겠습니까.”

“……사랑한다고요.”

밖으로 내고 나니 실감이 나는 기분이었다.

나,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구나.

떨리는 눈동자를 들어 수많은 꽃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사내를 눈에 담았다.

격정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그렇게 숨을 들이켜던 사내가 불시에 아가사를 끌어당겨 안았다.

일곱 번의 결혼이 지나고 나서야 생긴 내 편이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차례로 신혼 저택을 떠났던 아라투스 후작 부부가 신혼 저택으로 돌아왔다.

본저택 앞에서 이제나저제나 서성이던 총집사장, 알렌이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반색하며 다가왔다.

“후작님, 마님. 일찍 돌아오셨군요.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에녹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던 아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전도 마무리되었고 배상도 받아 왔어. 성이 하나 늘어날 것 같아.”

“정말 잘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마님!”

이제 남부에서 대기 중이던 아라투스 기사단도 돌려보내도 되겠지.

그간 근신을 풀고, 제2부단장인 휴버 카르웬 대신 노빌리스 영지에서 군영을 지키고 있던 제1부단장, 레온 타크란도 귀환하게 될 것이다.

영지전 후의 뒷수습과 배상받은 것의 정리만 필요한 시점이었다.

가볍게 그녀의 손을 받쳐 든 사내가 알렌에게 명했다.

“식사 준비를 부탁하지. 온실이 어떨까 하는데.”

마지막 말은 그녀를 향한 것이었다. 살짝 뺨이 붉어진 아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실에 식사를 준비해 줘, 알렌.”

“예, 마님.”

바쁜 하루였다. 알현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만난 대상들이 대상들이다 보니 제법 피곤해서.

따끈한 물에 몸을 풀고 마사지를 받고 향유를 바르고.

간편한 실내 드레스에 숄을 두른 아가사가 온실에 도착했을 때 에녹은 이미 중앙의 원형 테이블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한낮의 태양 빛이 나른하게 카우치에 기대앉은 사내의 몸 위로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매만지던 아가사는 문득 그와 시선이 마주치고서야 손을 내렸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부인.”

에녹이 맞은편 카우치를 가리켰다. 아가사가 앉자 식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철 생선에 유자 소스를 발라 노릇하게 구운 것. 노란 호박 속을 채워 찐 것. 사과 감자 퓌레를 곁들인 스테이크와 맑은 조개탕이며 채소와 대하를 함께 볶아 낸 것 등.

오늘도 영양 넘치는 식사를 시작하며 맑은 수프부터 한술 뜨고 있을 때였다.

“마님. 이리스 도뮤니아 후작 부인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잠깐 사라졌다가 돌아온 알렌이 서신 하나를 받쳐 들고 있었다.

“심부름꾼은 일단 홀에 들여놓았습니다만.”

“역시 이리스 부인이네.”

비공식 배상이 끝난 것과 노빌리스와 아라투스 이하 다섯 가문의 영지전이 완전히 종료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리라.

아가사가 냅킨으로 입가를 정돈하는 동안 측근 하녀, 마리가 서신을 개봉했다.

사실 이리스 부인은 그녀가 납치당할 당시의 상황을 알고 있었으니.

떠나기 전에 선물과 함께 감사의 서신을 보냈다고는 하나 바로 사람을 보낼 만했다.

아가사가 곧장 서신을 읽어 내리며 명했다.

“지금 답신을 보낼 거야. 준비해 줘.”

“예, 마님.”

은은한 향이 배어든 편지 위로 이리스 부인 특유의 정갈한 필체가 보였다.

아가사는 새삼스레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친애하는 아가사 부인.

일찍이 부인께서 수도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아시다시피 궁정과 사교계가 소란스러워 마음으로만 안부를 전하다가 이제야 서신을 보냅니다.

근래에 있었던 모든 일이 잘 해결되셨다는 소식은 들었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곧 늦가을의 사교계가 다시 시작될 것 같은데, 아르망드 홀의 오페라 공연 이후로 부인과 친교를 나누지 못해 아쉬운 마음뿐이랍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이후 못다 한 친교의 시간을 가지면 어떠실까요?

오늘 황궁에 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부인께 편지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이리스 도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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