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32)

95화.

“100년이요……?”

“제 영지의 1년 예산이 5만 카르입니다. 이것저것 영지 운영비를 아무리 졸라매도 1년에 제가 갚을 수 있는 돈은 고작 2만 카르에 불과하지요. 이것을 기준으로 후작 부인께서 제시한 100만 카르를 갚으려면 총 5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만 사람이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1년에 1만 카르 정도로 감해 주시면 평생의 은혜로 알고 열심히 갚도록 하겠습니다.”

“…….”

이렇게 말을 잘하는 기사였나.

아가사가 떨떠름하게 그를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즉석에서 수정된 항복 문서에는 기본 1만 카르를 갚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상환 금액이 올라갈 수 있다는 조항이 덧붙여졌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후작 부인.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망가듯 게틴 제닝스가 자리를 비웠다. 남은 이는 칼슨 크레스센쳐 후작 영식뿐이었다.

“……잠시 영지로 전령을 보내도 되겠습니까? 광산까지는 제가 허락받은 바가 없습니다, 후작 부인.”

“그러세요, 영식.”

아가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이야 똑같을 터였다.

오히려 유배 죄인을 숨겨 준 대죄를 덮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내놓을지도 모를 터.

문제는 헨리 인시디오가 이 영지전에 관여했다는 것을 이미 황태자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참. 참고로 황태자 전하께서 이미 인시디오 남작이 영지전에 개입한 것을 알고 계신답니다. 참고하는 게 좋을 거예요, 영식.”

새파랗게 질린 칼슨이 허둥지둥 회의실 밖으로 나섰다. 기사를 찾아 얼른 크레스센쳐 후작에게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래 보았자 다른 세 가문은 몰라도 연합군 진영 내에서 헨리가 발견되었으니 얼마나 책임을 피할까 싶긴 하지만.

“이제 크레스센쳐와 어설러우만 해결하면 끝이네요. 이것만 끝나면 우리, 노빌리스 영주 성으로 가는 건가요?”

“기대가 크신 것 같습니다.”

에녹이 어느덧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가사가 수줍게 웃었다.

“성인식 이후로 처음이거든요.”

다섯 살 이후로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영지를 방문한 것은 딱 두 번이었다.

열여섯 살, 성인이 되었을 때.

그리고 지금.

“꼭 부모님께 당신을 소개하는 것 같고 그래요.”

“……그거 영광이군요.”

설게 웃은 사내가 가볍게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충분히 노빌리스 영주 성에 머물고 나면 내 영지에도 갑시다. 내 부모님께도 그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아가사가 화사하게 웃었다. 어설러우 백작 영지에서 항복 사절이 온 것은 닷새 뒤였다.

어설러우 측에서는 오면서 모든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백작이 직접 왔음에도 무척 공손했다.

“아라투스 후작님, 아라투스 후작 부인을 뵙습니다.”

최소한의 수행원과 검소한 옷차림.

전령으로 떠났던 아라투스의 기사 셋은 대접을 무척 잘 받았는지 무뚝뚝해도 기름진 낯을 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주군. 어설러우 백작님은 저희가 도착한 그때 이미 항복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즉시 동행하겠다고 하셔서 같이 복귀하였습니다.”

“수고했다.”

에녹이 전령으로 나섰던 기사들을 치하하는 사이.

아가사는 어설러우 백작을 맞아 응접실로 안내했다.

저 멀리서 어설러우 백작의 도착을 알아본 크레스센쳐 영식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 크레스센쳐 후작에게 보낸 소식의 답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중이었으니.

묵묵히 아가사의 곁에서 걸어가던 어설러우 백작이 입을 열었다.

“크레스센쳐 후작가에서도 사신이 와 있었군요. 한데 협상이 바로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크레스센쳐 후작이 영식만 보내어서 협상 조건 승인 권한이 부족하더군요. 답신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저런.”

백작의 ‘저런’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럴 시간이 없을 텐데.’는 물론 ‘저런 시국도 제대로 못 읽는 자들과 손을 잡았던 건가.’ 등등.

응접실에서는 노빌리스와 아라투스 측의 가신들과 기사들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아가사와 에녹이 상석에 앉자 측근 하녀, 제시가 차를 준비했다.

그 맞은편 소파에 백작이 앉으며 넌지시 물었다.

“인시디오 남작의 주검을 수습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조만간 황태자 전하께 바칠 예정이에요.”

“아, 황태자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백작이 약간 떨리는 눈가를 쓸어내리며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인시디오 남작이 크레스센쳐와 엘리부쓰 연합군의 군영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것이겠지요? 저는 어설러우 영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아서 상황을 몰랐다는 것까지 말입니다.”

“글쎄요.”

아가사는 제시에게서 차를 받아 들며 나긋하게 웃었다.

“그거야 백작이 해명하기 나름 아닐까요? 실제로 인시디오 남작이 연합군의 진영에만 머문 것은 사실이고요. 물론 그 전에 남작과 계략을 꾸민 것은 해명하셔야겠지만.”

백작이 굳은 낯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명은 물론 할 것입니다. 저는 그저, 후작님과 후작 부인의 선처를 바랄 뿐입니다.”

어설러우 백작이 사전에 전령에게서 건네받았던 항복 문서를 내려놓았다.

만만치 않은 배상금이었음에도 이미 항복 문서에 백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거기에 더해 백작은 한 가지 문서도 더 내려놓았다.

“다시는 노빌리스 영지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입니다. 그와 더불어 감히 후작 부인의 전남편을 이용해 계략을 꾸민 것의 대가를 소정이나마 마련해 보았습니다.”

뒤이어 나온 것은 어설러우 백작 영지의 특산품 거래 허가서였다.

어설러우 영지에서는 버섯이 많이 채취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귀족들이 좋아하는 고가의 트리움 버섯이 아주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쉽게 허가를 내주는 상단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사과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후작님, 후작 부인.”

에녹은 무심히 백작을 응시하다 아가사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최종 결정권자가 후작 부인임을 알아챈 백작이 긴장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말인즉슨, 자신이 잘 해명할 테니 거기에 오해를 살 만한 말을 얹지 말아 달라는 뜻일 터.

유배 죄인의 탈주 사건에 절대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백작의 필사적인 마음이 아주 돋보였다.

아가사가 화사하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옆에서 나타난 제1보좌관, 에셀이 문서를 가져갔다.

“백작의 사과에서 진심이 느껴지는군요. 기쁘게 용서하겠어요.”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똑똑한 어설러우와 발 뻗을 곳과 접을 곳을 아는 게틴 제닝스는 잘 빠져나갔다.

초반에 쓰러진 모이스 남작도 운 좋게 유배 죄인의 탈주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대죄에서 빠져나간 가운데.

미처 이를 예상하지 못하고 영지로 돌아간 엘리부쓰 남작과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아들을 통해 배상금이나 깎아 보려던 크레스센쳐 후작가에는 암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 외에 또 이와 관련된 큰일이 터질 곳이 한 군데 더 있었으니.

마이뉴코르의 사신으로 록스바드 제국에 와 있던 페르난드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이놈이 감히!”

시작은 소소했다. 록스바드 측에서 마이뉴코르 황실 기사가 너무 자주, 너무 오래 궁을 빠져나간다며 그의 명이 맞는지 확인 의사를 물어 온 것이다.

-뭐? 내가 언제 기사를 궁 밖에 내보냈는데?

알고 보니 아단의 하나뿐인 호위 기사였다.

즉시 페르난드는 아단을 불러 추궁했고 아단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아가사 노빌리스를 설득해 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시도 중입니다.

-그래? 그래도 자제하도록 해. 타국에서는 행동을 똑바로 해야 하는 법이야.

그래서 황손이 바깥세상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노라고 변명은 해 주었으나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진척 사항 보고는 없는데 아가사는 사교 행사에 참석하다가 잠적했다는 소리나 들려오고.

그즈음 아단은 애써 감추려 했지만 안색이 퍼렇게 질려 있었다.

‘이상한데?’

페르난드는 즉시 아단의 행적 조사를 시작했다.

그간 아단이 한 일, 아단의 호위 기사가 움직인 루트, 아단의 전속 시종의 행동까지.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아단이 북방에 유배된 아가사의 네 번째 전남편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단을, 아단을 당장 끌고 오너라!”

“예, 저하!”

그렇게 끌려온 아단은 평소 덤덤한 모습과 달리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페르난드는 그 앞에 그간 조사한 것들을 내던졌다.

“이게 뭐냐.”

“…….”

“이게 뭔지, 네놈 입으로 설명을 해 보란 말이다!”

곁에 선 황실 기사들이 놀랄 정도로 격한 사자후였다.

아단이 애써 겁나는 기색을 억누르며 이야기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무슨 말씀이신지를 몰라? 네놈이 허락도 없이 록스바드 북방까지 기사를 보냈다지! 그것도 모자라 유배 죄인과 접촉하고 유배 죄인의 탈주까지 돕지 않았더냐!”

엄청난 사실에 마이뉴코르의 황실 기사며 시종의 입까지 떡 벌어졌다.

“아닙니다! 접촉한 것은 사실이지만 탈주까지 돕지는 않았습니다!”

“서신을 전달해 주었다며? 그게 탈주를 도운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이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아단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으나 상황이 그러했다.

아단이 보낸 호위 기사가 먼 북방까지 가서 황실 모독죄로 유배된 죄인과 접촉했다.

서신을 보내는 심부름까지 해 주었고.

그 죄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탈주까지 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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