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일순 그가 낮게 숨을 들이켜는 것 같았다.
“하여튼 당신은 그들과 달라요. 나를 진심으로 아껴 주고 사랑해 주고 존중해 주고 있잖아요?”
처음이었을 것이다. 일곱 명의 남편 중에 저를 이토록 위해 준 남자는 에녹 아라투스, 그밖에 없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자들의 말에 흔들리지 마세요.”
아가사가 작게 웃으며 발돋움해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이만 식사할까요? 당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잔뜩 준비했답니다.”
그 순간.
그대로 입술을 겹친 사내가 아가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뜨거운 손이 허리를 타고 내려가 가볍게 그녀를 안아 들고 있었다.
“지금은 식사보다 그대가 필요합니다.”
가쁜 숨결을 삼킨 사내가 그대로 침실로 방향을 틀었다.
* * *
다음 날 아침.
느긋하게 아침을 맞이한 아가사는 가운을 걸치고 내실로 나섰다.
테라스 너머 평화로운 성 밖의 풍경이 보였다.
‘앞으로 몇 가지 일만 더 처리하면 이런 광경이 계속 이어지겠지.’
에녹은 도망간 게틴 제닝스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리에 새벽같이 성을 나간 후였다.
이 뒤는 아가사의 몫이었다.
“두운 경.”
“예, 마님.”
내실 한쪽에서 대기 중이던 상급 기사, 두운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두운은 전쟁이 완전히 종료되기 전까지 그녀의 호위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어설러우 백작에게 항복 의사가 있는지 확인해야겠어요. 행정관에게 말해 둘 테니 항복 문서를 들고 갈 기사 셋을 골라 주세요. 오늘 중으로 출발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곧 두운이 고른 상급 기사 하나와 중급 기사 두 명이 보르크 성을 떠났다.
대략 사나흘 후면 마지막으로 남은 어설러우 영지에서 어떻게 나올지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가사는 아침을 먹고 우아하게 단장한 뒤 응접실로 향했다.
어제 막 보르크 성에 도착한 노빌리스의 제1집행관, 데니 케일러와 호위 기사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마님 드십니다.”
안에는 먼저 끌려온 엘리부쓰 남작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가사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오랜만이군요, 엘리부쓰 남작. 이렇게 마주하게 되어서 유감이에요.”
“여전히 친족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으십니다, 아가사 님.”
“그런가요? 이 정도면 충분히 대우해 주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맞은편 소파에 자리한 아가사가 두 눈을 나긋하게 떴다.
“죽이지도 않았고 사지 중 어느 한 곳 상한 곳 없이 멀쩡히 두었는데. 이게 대우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요?”
“…….”
자연스럽게 그 뒤에 시립한 집행관과 아라투스의 기사들이 엘리부쓰 남작을 향해 기세를 뿜어냈다.
순간 압도된 남작은 잠자코 묶인 손만 꽉 쥐고 있었다.
아가사는 집행관이 바친 항복 문서를 받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다른 분들은 배상금에서 끝낼 예정이지만 알다시피 우리의 관계는 특별하잖아요?”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서리가 내릴 정도로 차가웠다.
“특별히 조항을 추가해 보았어요. 확인해 보세요.”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엘리부쓰 남작이 항복 문서를 들어 올렸다.
“이게 무슨……!”
“괜찮죠? 이참에 아예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어마어마한 배상금과 노빌리스 상단의 지분 전부를 넘기는 것 외.
엘리부쓰 남작이 받아 든 항복 문서에는 노빌리스와의 친족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것은 물론 상속 포기 서약서까지 달려 있었다.
“미치셨소? 내가 이딴 문서에 서명할 것 같은가!”
두 손이 묶여 있어도 다리는 자유로운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채채챙-
즉시 두운을 비롯한 아라투스의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남작이 주춤한 찰나.
아가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사가 내온 차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무심한 음성이 떨어졌다.
“그럼 목을 내놓으시든가요.”
“뭐요?”
“보자, 영지전에서 승자가 가지는 권리는 남작도 알고 있을 테고.”
이미 앞선 영지전을 통해 친족 중 다섯 가문이 사라진 상태였다.
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여름 전에는 항복한 친족의 목까지 베었을 때 상속자로서의 지위가 조금 흔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친족의 세가 약해진 지금에 와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 에녹 아라투스는 오히려 아가사보다도 그녀의 친족에게 더욱 강경한 면이 있었다.
전쟁 영웅이자 제국 최강의 기사단을 가진 남편조차도 그녀의 판단을 지지한다는데.
아가사는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내가 못 할 것 같은가요?”
그녀가 감수할 것은 조금의 귀찮음뿐이었다.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은 불명예와 약간의 타격 정도?
이제야 그것을 깨달은 남작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나, 나는…….”
“생각이 없다면 그만 지하 감옥으로 돌아가 보아도 좋아요. 여기까지가 내 혈족이었던 남작을 위한 자비였답니다.”
아가사가 항복 문서를 도로 거둬 갈 찰나였다.
“자, 잠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남작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서명하겠소.”
“잘 생각했어요. 나도 굳이 혈족의 피를 손에 묻히고 싶진 않답니다.”
엘리부쓰 남작 가문은 노빌리스 영지의 일부분을 다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니 친족 관계가 끊어지더라도 영지는 남겠지만.
공작 가문의 방계인 것과 일개 지방 하급 귀족인 것은 그 위상부터 하늘과 땅 차이다.
오늘부로 엘리부쓰 남작은 끈 떨어진 신세가 될 터.
물론 그것도 이제 아가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힘없이 서명하는 예전의 친족을 보며 아가사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런 때도 있구나.’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볼 것이라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광경이었다.
늘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것은 아가사였고.
친족들은 늘 전남편들의 소극적인 방어와 그녀의 부족한 명분을 무기로 상속자를 제 뜻대로 휘둘러 보려 안달이었으니.
그것조차도 오늘로 끝일 것이다. 엘리부쓰 남작이 노빌리스 가계에서까지 쫓겨난 것을 보면 이제 모든 친족이 몸을 사릴 터였다.
“……서명했소.”
깃펜을 내려놓은 남작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집행관, 데니가 재빨리 항복 문서를 챙겼다.
서명을 확인한 아가사가 웃었다.
“이제 다시는 볼 일 없겠군요, 엘리부쓰 남작. 살펴 가세요.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엘리부쓰 남작이 기사들의 손에 끌려 나가던 찰나였다.
“잠깐.”
아가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남작을 끌고 가던 기사들이 즉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아직 내게 볼일이 남았소이까.”
남작이 치욕스러워했지만.
아가사가 알 바 아니었다.
“헨리 인시디오, 기억하겠죠?”
“……!”
놀라 크게 뜬 눈을 직시하며 아가사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생각해 보니 조금 괘씸해서 말이에요. 내 네 번째 전남편이 누군가에게 충동질을 당해서 이런 일을 꾸몄다는데, 나는 전혀 아는 게 없단 말이에요?”
“아가사 님. 아니, 후작 부인. 그건 진짜 내가 꾸민 게 아니오. 헨리, 그자가 먼저 서신을 보내와서……!”
“정말 아니라면 다른 증거가 필요할 거예요.”
지금까지 네놈들이 해 온 일을 생각해 보라.
그런 뜻이 담긴 싸늘한 자색 눈동자에 남작은 연신 마른침만 삼켰다.
“……사실은 헨리가 보낸 심부름꾼이 이상했소. 인시디오 가문의 기사 같지는 않았는데 분명 기사 신분 이상인 자 같았단 말이지.”
“앉으세요. 자세히 들어 봐야겠군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남작이 도로 소파에 앉은 순간.
“신분 체계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듯하군요, 남작. 말투에 교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주의하겠습니다, 후작 부인.”
그 자리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린 남작이 잠시 후, 응접실을 나섰다.
아가사의 앞에는 남작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심부름꾼의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콧수염을 길러 얍삽한 인상.
잠시 막혔던 꼬리가 잡혔다. 아가사는 여전히 향긋한 차향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 참 좋네요.”
“보르크 성 특산품입니다. 노빌리스 영주 성으로 가실 때 가장 좋은 것으로 몇 상자 싣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집정관.”
아가사는 데니를 칭찬하며 환하게 웃었다.
한 차례 협상이 끝나고.
영주의 방으로 돌아온 아가사가 창밖을 내다보며 평화로운 풍경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아.”
멀리서 한 떼의 기마대가 보였다.
익숙한 아라투스의 깃발.
분명 에녹의 행렬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가사가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마님?”
“남편이 왔어요.”
호위 기사들도 덩달아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아가사가 막 1층 홀에 도착한 찰나였다. 다리를 건넌 행렬이 영주 성의 정문으로 입성했다.
“에녹!”
말에서 내려선 사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대로 달려온 아가사를 받아 안으며 에녹은 뒤에 선 두운과 기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녹? 어디 보는 거예요?”
“잠깐 호위 기사들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는 종종 뒤를 볼 때가 있었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아가사가 맨 마지막으로 들어온 기사의 말 등에 시선을 주었다.
“혹시 저 사람이……?”
“네. 게틴 제닝스입니다. 인근 영지에서 술을 마시고 있더군요.”
아가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말 등에 실려 온 게틴 제닝스에게서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