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두 번째 출정 준비와 더불어 아가사가 탈 군마가 준비되었다.
그동안 아가사는 꼬박꼬박 영양가 많은 음식을 챙겨 먹고 의원의 치료도 받았다.
멍든 곳에는 약을 발랐고 밤에는 따뜻한 그의 품에서 잠들기까지.
저택 생활 3일 차.
오늘도 아침부터 저택에 입성한 의원이 신중하게 아가사를 진찰했다. 에녹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곧 물러선 의원이 입을 뗐다.
“많이 회복되셨습니다. 멍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테고 영양도 식사만 잘하시면 충분하니 나가셔도 되실 겁니다, 후작님.”
“승마도 괜찮겠나.”
“무리하시지만 않으면 가능하십니다.”
“알겠다. 나가 보게.”
의원이 내실을 나선 뒤.
에녹은 저를 반짝반짝하게 올려다보는 아내를 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출발해도 되겠습니다.”
“와!”
그리하여 그날 아침, 아라투스 가문의 두 번째 출정이 결정되었다.
아가사는 근 이틀간 에녹에게 전장 상황에 관해 물은 바가 있었다.
에녹은 순순히 현 상황을 알려 주었다.
“휴버가 잘하고 있습니다.”
“휴버 경이요?”
“이틀 전에 연락이 왔을 때 노빌리스 영지로 진군한 게틴 제닝스의 군을 상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쯤 결판이 났을 것 같군요.”
에녹은 딱히 승리를 의심하는 낯이 아니었다.
휴버 카르웬은 정예 중의 정예인 아라투스 기사단의 제2부단장으로 10년간 전쟁터를 누빈 기사였다.
전투가 벌어졌다면 당연히 승리했을 터.
승전은 물론이요, 아가사가 회복할 며칠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부상은 방치하면 좋지 않습니다. 충분히 쉬고 움직입시다.”
아가사는 에녹의 만류에 의원의 처방을 따르기로 했다.
낙마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시고 승마가 가능할 최소한의 휴식 기간이 만 이틀이었다.
드디어 의원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사실 납치되었을 때 신경을 많이 써서 그렇지 문제는 없었어요. 낙마도 푹신한 수풀에 떨어져서 괜찮았고요.”
“……그렇습니까.”
“준비할게요. 당신도 어서 준비하고 오세요.”
아가사가 당당하게 내실을 나섰다. 그 뒤를 측근 하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마님, 짐은 어떻게 할까요?”
가신들도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가사는 대부분의 승마와 사냥을 함께한 갈색 말의 상태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며 말했다.
“짐은 최소한으로 가져갈 거야.”
물과 약간의 식량, 그리고 비상약 정도면 충분하리라.
확인이 필요한 서류들은 앞으로 영주 성으로 바로 올라올 것이고 나머지 필요한 물품들은 물자와 함께 뒤따라올 예정이었다.
“장시간 괜찮겠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에녹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아가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이번 동행은 그녀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었다.
‘함께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절대 이동 중에 짐이 될 생각은 없었다.
저택에 그녀도 없으니 경계할 기사를 많이 남겨 둘 필요가 없었기에 기사단의 수가 더 늘어났다.
몸도 꽤 회복되었고.
심지어 아가사의 승마 실력은 매우 수준급이었다.
시야만 확보되면 기사만큼 달리지 못할 이유도 없었으니.
인원이 많은 만큼 이동 시간이 늘어났기에 아가사는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자신했다.
* * *
아가사가 구출된 밤.
아라투스의 기사들이 헨리의 수하 둘을 잡고 오두막을 기습했지만 헨리를 잡지는 못했다.
도망친 아가사를 쫓아간 자가 복귀하지 않자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빠르게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었다.
헨리는 간신히 저를 쫓아온 수하에게 뒤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에녹 아라투스가 여기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주군.”
아가사를 협박해서 유배를 풀고 배상을 받는 일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대신 헨리는 곧장 다른 계획을 세웠다.
“그렇다면 놈이 오기 전에 이 영지전을 끝내야겠다.”
원래 영지전은 아가사를 납치할 수 있게 만드는 미끼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얼마간의 이득이라도 취해야 유배지에서 무단으로 이탈한 죄를 묻을 수 있을 터.
에녹이 아가사를 챙길 시간에 먼저 전선으로 향해 다섯 가문의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가사, 내가 이대로 끝날 줄 알았겠지? 아직 이 헨리 인시디오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헨리는 아가사와 에녹이 있을 수도 쪽을 노려본 뒤 노빌리스 영지가 있는 남부로 향했다.
그 뒤를 오묘한 눈빛의 수하가 뒤따르고 있었다.
* * *
그날 오후.
아라투스 기사단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두 번째 출정에 나섰다.
선두에 아가사와 에녹이 있었고 기수가 아라투스와 노빌리스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수백에 달하는 기사들의 행렬을 본 외성 남문의 경비대장이 확인차 인사를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아라투스 후작님, 아라투스 후작 부인. 이번에는 후작 부인께서도 함께 가시는 것 같습니다.”
아가사가 우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수도를 비울 것 같군요. 돌아올 때까지 별일 없기를 바라요, 경비대장.”
“저야 성문을 지킬 뿐인 것을요.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부인께도 무운이 함께하시기를.”
경비대장이 비켜서며 정중히 예를 갖췄다.
“승전을 기원합니다, 아라투스 후작님, 후작 부인.”
“고맙네. 다녀와서 보지.”
외성 남문의 중앙 성문을 통과한 수백의 기사단 행렬이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성문을 나와 황실 직할령으로 향하는 길은 관리가 잘되어 있는 편이었다.
말끔한 도로가 깔려 있었고, 길 가운데에 구덩이가 있거나 장애물이 있지도 않았다.
치안도 물론 말할 것 없이 훌륭했지만 그것을 실감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백의 기사들이 무리 지어 이동하는데 앞을 가로막을 간 큰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점심은 잠깐 멈춰 가져온 마른 빵과 물로 해결하고 저녁에는 숙영지를 세운 김에 아궁이에 불을 때워 스튜를 끓였다.
매끼가 단출하고 휴식 시간은 짧았지만.
에녹의 걱정과 달리 아가사에게는 견딜 만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매 순간 그와 함께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좋은 식사와 잠자리보다 만족스러웠다.
닷새째 되던 날.
남부로 향하던 에녹의 행렬은 수도로 향하던 전령과 맞부딪혔다. 아라투스 기사단의 일원인 그는 에녹을 보자마자 말의 속도를 늦췄다.
“주군.”
즉시 군례를 올린 그가 현 임시 사령관이자 부사령관이며 제2부단장인 휴버 카르웬이 보낸 두루마리를 바쳤다.
“휴버 경이 보낸 보고서입니다.”
“수고했다.”
전령을 만나는 동안 잠시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아가사는 에녹의 곁에서 휴버가 보낸 서신을 같이 읽었다.
‘오.’
자색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두루마리에는 게틴 제닝스와 일전을 벌였던 휴버가 완승을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게틴 제닝스는 잡지 못했지만 제닝스군 전체를 와해시켰다는 것까지.
‘휴버 경. 능력이 좋구나.’
평소의 장난스럽고 눈치 없는 행동에서는 전혀 눈치챌 수 없었던 유능함이었다.
물론 능력이 있으니 에녹이 그에게 임시 사령관직과 부사령관직을 수여한 것이겠지만.
제 머리맡에 있던 사내가 무심히 입을 열었다.
“첫 전투는 무사히 치렀군요.”
“시작이 좋네요. 문제는 아래 문구려나요.”
“그렇습니다.”
뒤이은 내용에는 연합되지 못하고 흩어져 각자 움직이던 적들의 움직임이 기민해졌다는 보고가 쓰여 있었다.
노빌리스 영지를 탐낸다는 것 외에는 구심점이 없었던 나머지 네 가문이 유기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이다.
“음, 조금 복잡해졌군요.”
“아마도 인시디오 남작이 이쪽으로 왔기 때문 아닐까요?”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습니다.”
아직 아라투스와 노빌리스는 완전히 결속되지 못한 상태였다.
기사로 이루어진 아라투스의 병력과 병사로만 구성된 노빌리스의 병력은 지휘 체계도 확고하고 일견 잘 섞인 듯 보였지만.
알고 보면 전장 전체를 관장할 사령관이 부재한 상황이었다.
본래 에녹과 제1부단장 레온 그리고 제2부단장 휴버, 이렇게 셋이면 충분했지만.
에녹은 현재 여기에 있었고 레온은 근신 중이라 휴버 혼자서 모든 전장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장 사령관이 하나라도 더 필요할 터.
지금의 전장에는 에녹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더 빨리 움직여야 해.’
에녹도 아가사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늦어서 지는 것보다 덜 쉬고 덜 자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럼 지금부터 속도를 더 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따라갈게요.”
이후 기사단의 기마 속도는 아주 빨랐다. 아가사는 이렇게 빨리 이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배우고 있었다.
말이 지쳐 쓰러지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하지만 가장 빠르게.
이동에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은 말의 체력이었다.
말 위에 오른 사람은 말의 체력이 남아 있는 한 말 등에 올라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금방 적응한 아가사는 어느새 기사들처럼 말에 실려 가고 있었다.
그렇게 재촉한 보람이 있어 에녹과 아가사, 아라투스 기사단 수백기가 드디어 노빌리스의 영향력이 닿는 남부까지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