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들어와서 마리처럼 열을 잰 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디 더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근육통이 조금 있지만 괜찮은 것 같아. 그보다 에녹은?”
“잠시 지하에 내려가셨습니다. 기사분들께서 납치범들을 잡아 오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구나.”
혹 얼굴도 못 보고 전장으로 돌아가 버렸으면 어쩌나 했는데.
안심한 아가사가 문득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어제까지 입고 있던 것과 다른 포근한 침의가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먼저 씻고 싶어, 제시.”
“당장 목욕물을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마리가 먼저 목욕물을 준비하러 뛰쳐나갔다.
납치당했던 오두막에서 헨리가 목욕물을 준비해 주긴 했지만 아가사는 마음 편히 씻은 적이 없었다.
그저 그들이 함부로 할 수 없도록 기품 있는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
저택으로 돌아왔으니 그 기억은 이제 씻어 내도 될 것이다.
아가사는 제시의 부축을 받아 목욕실로 향했다.
벌써 더운물이 준비된 목욕실에서 향긋한 꽃향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사이 안정에 좋은 약초까지 물에 풀어 둔 마리가 제시와 함께 목욕 시중을 들었다.
“물 온도는 어떠세요, 마님?”
“딱 좋아.”
따뜻한 물속에 들어앉아 아가사는 정성껏 마사지를 받았다.
부드러운 손길에 뭉친 근육이 풀리고.
꿀에 섞인 우유 크림이 거칠어진 피부를 촉촉하게 가꿔 주었다.
목욕이 끝날 즈음 아가사는 납치로 초췌했던 흔적이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마님. 바로 침실로 모실까요?”
“아니. 내실로 가자. 드레스를 준비해 줘. 오늘은 드레스 선택에 시간을 들이고 싶어.”
그간은 헨리가 준비해 준 대로만 입어야 했지만.
이제 저택으로 돌아왔으니 그 또한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마님.”
아가사가 내실에 드레스를 잔뜩 들여놓고 그 안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기다렸던 음성이 들렸다.
“아가사.”
“들어오세요, 에녹.”
곧장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가 아가사의 이마부터 짚었다.
“……다행히 열은 내렸군요.”
아가사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어쩜 이렇게 똑같은 반응인지.
그녀는 그대로 사내의 품에 파고들었다.
“눈떴는데 없어서 당황한 거 알아요?”
“……섭섭하셨습니까.”
“조금요. 그래도 빨리 와 줬으니까 용서해 줄게요.”
가슴팍에 턱을 대고 올려다보자 곧장 그가 허리에 팔을 감아 왔다.
“미안합니다. 하필 그때 기별이 와서.”
“들었어요. 기사들이 납치범을 잡아 왔다고 하던데요.”
빤히 올려다보자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쩐지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다.
“그 또한 미안합니다, 아가사. 헨리 인시디오를 놓쳤습니다.”
“……알고 있었어요?”
“그대가 납치된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설명할 테니 우선 옷부터 따뜻하게 입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가사는 얼른 아무 드레스나 골라 갈아입고 에녹의 곁에 앉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납치당한 지 열하루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부족함 없는 날이었다. 영지전도 그러했고.
“이제 알려 줘요.”
“…….”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을 짓던 그가 집사를 불러 묵직한 보고서 하나를 보여 주었다.
빠르게 내용을 훑어 내리던 아가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시작은 다섯 번째 전남편, 레오나드 신제러 후작이 눈치챘던 심부름꾼에 관한 것이었다.
그 누군가가 유배지에 있던 헨리를 충동질한 것.
제 유배의 배후에 아가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헨리가 그간 알고 있던 노빌리스의 영지를 탐내는 모든 가문에 서신을 보냈다는 것.
영지전을 선포하면 저가 아가사를 설득해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만들겠다고 하면서 무력이 분산되자 그녀를 납치했다는 것까지.
결국 지금 일어난 모든 사태가 헨리의 계략이었다는 소리였다.
“내가 내 네 번째 전남편을 얕보고 있었나 보네요.”
날치도 뛰어오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헨리 인시디오가 딱 그 예시였다. 아가사의 어깨에 가운을 걸쳐 주던 에녹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와 이리스 도뮤니아 후작 부인이 수고가 많았습니다.”
“아, 갑자기 사라졌으니 이리스 부인이 눈치챌 만했겠네요.”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리스 부인이라면 충분히 사교계에서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해 주었겠지.
안토니에게도 큰 선물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저를 찾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아가사가 차곡차곡 할 일을 적립해 가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집사, 알렌이 고했다.
“후작님. 마님. 조찬이 준비되었습니다.”
“다 영양가 있는 것으로 준비했는가.”
“물론입니다, 후작님.”
곧 내실의 탁자 위가 깔끔하게 치워지고 수십 개의 요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가사는 얼떨떨하게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에녹은 세심하게 무른 수프부터 그녀의 앞에 놓아 주고 있었다.
“배는 고프지 않습니까. 의원이 식사를 잘 챙겨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고파요.”
“어서 드십시오, 아가사. 따뜻할 때 먹어야 더 맛있을 겁니다.”
아가사는 멍하니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보다 숟가락을 들었다.
따뜻하고 제 입에 꼭 맞는 요리들.
곁에서 따스하게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느낀 순간 눈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아가사?”
“…….”
간신히 신음을 참아 낸 아가사가 그를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
“당신도 같이 먹어요.”
“……그럴까요.”
에녹이 기꺼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곁에서 하녀들이 고기와 생선을 발라 주고 있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다 보니 금방 배가 찼다. 납치되었던 동안 하루에 한 끼밖에 못 먹었다 보니 양이 조금 준 것 같았다.
식기를 내려놓자 금방 에녹의 시선이 와 닿았다.
“다 드신 겁니까.”
“배불러요.”
평소 들던 것의 반밖에 먹지 않았지만.
가만히 저를 응시하던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고 후식을 들여.”
“예, 후작님.”
디저트 또한 수십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과일, 푸딩, 마카롱 같은 과자와 케이크 등을 비롯해 갖가지 음료까지.
배를 양껏 채우고 나니 슬슬 현실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아가사는 토마토주스를 마시며 식사하기 이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일단 헨리는…….
‘아마 영지전이 진행되는 곳으로 도망쳤을 거야.’
그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영지전이 승리하고 그나마 한 손을 얹을 수 있어야 간신히 살 희망이라도 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필사적으로 영지전을 이기려고 들겠지.’
그러니 에녹은 곧 전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남부에서 이곳 수도까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온 에녹은 얼마만큼의 전술상 손해를 보았을지.
“언제 돌아가실 계획이세요?”
“그대가 괜찮아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가 와 주어서 기뻤으나 또 부담을 지운 것 같아서 망설여지기도 했다.
이 바쁜 와중에 그녀의 안위를 챙긴다는 것도 그랬다.
분명 무리하고 있을 텐데.
‘같이 가고 싶다고 또 말을 꺼내도 될까?’
아가사가 수도에 있어야 안심하고 싸울 수 있다던 사내였다.
이제 위험은 지나간 것 같았지만.
‘……이번에야말로 정말 따라가고 싶은데.’
아가사가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조금 전부터 마시는 것을 멈춘 토마토주스가 손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아가사.”
“네?”
깜짝 놀란 아가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사내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아…….”
망설이던 아가사가 입을 열었다.
“사실 같이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신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
“물론 전장에 가겠다는 생각은 아니고요. 미리 영주 성에 가서 당신을 지원하고 전쟁이 끝나면 같이 뒤처리를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답니다. 물론 생각뿐이었지만요.”
이번에야말로 정말 혼자 남고 싶지 않았지만.
그 마음을 꾹 눌러 참은 아가사가 애써 미소를 지을 때였다.
“내가 청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가 먼저 해 주어서 기쁩니다.”
“네……?”
진중하게 다가온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 안았다.
어제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부르튼 손끝에 입을 맞추며 에녹이 낮은 숨을 내뱉었다.
“사실 그대가 납치되고 난 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같이 갔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사실 나도 당신께 투정을 부리고 있다는 건 알아요.”
“아니요. 오히려 내가 먼저 청했어야 할 일입니다. 가장 안전한 곳은 내 곁이었지 않습니까.”
아프게 웃은 사내가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부디, 이번에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 주시겠습니까, 아가사.”
진심이다. 그는 진심으로 아가사가 제 옆에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간신히 떨리는 눈동자를 수습한 아가사가 제 앞에 무릎 꿇은 사내의 손을 꼭 맞잡았다.
“함께 가요, 에녹.”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