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32)

86화.

낯익은 형체였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한 회색빛 안광이 선연했으니.

“에녹.”

영지전을 위해 남부로 떠났던 남편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아가사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동안은 조용히 이동했었던 듯 그와 기사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고요하던 숲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앞까지 달려온 사내가 말을 멈춰 세웠다.

짙은 청색 머리칼.

검은 어둠 속에서 흰 살갗 위를 가로지르는 검상이 도드라졌다.

기사단의 반은 그의 곁에.

나머지 반은 그대로 속도를 내서 아가사의 뒤로 빠르게 사라졌다.

땅으로 내려온 에녹은 잠시 말이 없었다. 까맣게 침잠한 회잿빛 시선이 엉망이 된 머리부터 신발 한쪽이 날아간 맨발까지 훑었다.

그는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떨리는 손으로 한쪽 어깨에 고정된 망토를 풀었다.

“그래도…….”

펄럭-

“살아 있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아가사.”

두꺼운 망토가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따뜻하게 감쌌다. 아가사는 그제야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여기까지 온 거예요?”

“며칠 되었습니다. 혹 낙마한 겁니까.”

“전쟁 중일 줄 알았는데.”

“그대가 잘못되면 그깟 영지전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아가사가 탔던 말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한 사내가 조심스레 그녀를 안아 들었다.

“흐…….”

긴장이 풀리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약한 신음에 눈앞의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무의식중에 그의 입술에 손을 올리자 턱에 힘이 풀렸다. 대신 그 손끝에 입을 맞춘 사내가 그대로 그녀를 안은 채 말에 올랐다.

“손이, 많이 거칠어졌습니다.”

전처럼 이를 악물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꺼졌다.

망토로 그녀의 발끝까지 빈틈없이 감싸던 사내가 다시 중얼거렸다.

“도망치다가 낙마한 겁니까.”

“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려고 했는데 더는 안 될 것 같았거든요.”

“…….”

“그래도 당신이 제때 와 주어서 다행이에요.”

지금 에녹이 와 주지 않았다면 아가사는 그대로 오두막으로 다시 끌려갔을 것이다.

거기서 헨리와 에녹이 대치하면서 제대로 인질극이 벌어졌겠지.

“더 서둘렀어야 했습니다.”

에녹이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가사가 말을 잇기도 전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픈 곳을 말해 보십시오, 아가사.”

“……사실 잘 모르겠어요. 낙마하면서 바닥을 열 바퀴쯤 굴렀거든요.”

“…….”

그는 말없이 아가사를 좀 더 느슨히 당겨 안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고삐를 쥔 채 아주 느리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오두막과 반대 방향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머리칼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이만 저택으로 돌아갑시다. 뒤처리는 기사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응, 좋아요.”

이 납치의 주범이 헨리라는 것.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아가사는 따뜻한 가슴팍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너무 피곤해서, 눈이 무거웠다.

에녹은 완전히 힘을 빼고 그에게 기댄 아가사를 조심스레 안은 채 수도로 말을 몰았다.

새벽녘,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아가사는 곤히 잠든 채였다.

잠든 와중에도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후작님! 마님을 무사히 찾아오셨군요!

-많이 여위셨습니다. 영양식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의원을 불러라. 낙마했으니 정밀 진단이 필요해.

‘아, 이건 에녹의 목소리다.’

저도 모르게 웃은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잠시 뒤척이던 아가사가 다시 조용해지자 에녹이 조심스레 그녀를 고쳐 안았다.

“침실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입니다, 후작님.”

약 열하루 만의 귀환이었다.

침실에 도착한 에녹은 침대 위에 조심히 아가사를 내려놓았다.

머리맡의 의자에 앉아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

황태자의 추측은 틀렸다. 아무리 귀한 여자라 하더라도 납치된 이상 받을 처사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역시 남부로 데려갔어야 했다. 같잖은 안심이니 뭐니 그럴 게 아니라 그녀를 곁에 두고서 더 잘 싸웠으면 될 일이었다.

“후작님. 의원이 도착했습니다.”

“들여라.”

에녹은 후회 가득한 손길을 어렵사리 거둬들였다.

노빌리스가의 전용 주치의가 아가사를 진단했다. 타박상과 영양 부족, 약간의 미열이었다.

“몸을 따뜻하게 유지해 주시고 한동안 식사에 신경 써 주십시오. 다행히 뼈는 멀쩡하시니 멍든 곳에만 약을 조금 발라 주시면 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집사, 알렌이 약을 받고 의원을 배웅했다. 아가사의 침실에는 이르게 벽난로에 장작이 한가득 들어가고 있었다.

에녹이 한참 동안 잠든 그녀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을 무렵.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측근 하녀가 그에게 고했다.

“후작님. 추적을 맡기셨던 기사님들이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지금 나가겠다.”

에녹이 곧장 침실을 나섰다. 대기 중이던 기사를 따라 지하 감옥까지 내려간 에녹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돌바닥 위.

무릎 꿇려진 사내는 단둘뿐이었다. 그것도 평복 차림의.

추적을 이끌었던 상급 기사, 두운이 즉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인시디오 남작과 수하 하나를 놓쳤습니다.”

“…….”

에녹이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그 와중에 아가사를 구출한 것은 천운이었지만.

“보고해라.”

“……주군께서 화살로 쏴 맞힌 자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습니다. 곧장 그 모습을 보고 도망친 자들 중 가까이 있던 두 놈은 잡았으나 가장 뒤에 있던 자를 놓쳤습니다.”

“남작은.”

“그게, 마님께서 도망치시자마자 몸을 숨긴 것 같습니다. 이자들이 이야기하기로 마님을 쫓으라, 명한 뒤 남작은 마님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도망한 것 같다더군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하였습니다.”

“…….”

기사들에게 추적을 명하고 저는 도망가는 주군이라니.

헛웃음을 내뱉던 에녹이 인시디오가의 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움찔, 한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뭐, 어디로 갔을지야 짐작은 간다만.”

“정말이십니까, 주군.”

유배지에서 탈주하고 납치 사건을 비롯해 영지전까지 획책한 자다.

그대로 잠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욕심을 보면 그렇지는 않을 테고.

숨어서 호시탐탐 다시 납치 기회를 노릴 수도 있겠으나 역시 확률이 높은 것은 영지전에서의 승리를 노리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유배지를 이탈한 죄를 면해 보고자 할 테니.

‘휴버가 꽤나 힘들어지겠군.’

에녹은 전장에 두고 온 제2부단장, 휴버 카르웬을 떠올렸다.

그가 수도로 왔으니 휴버는 제닝스 영지를 공격하는 대신 노빌리스 영지로 진군한 게틴 제닝스의 군을 상대하고 있을 것이다.

돌아갈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두운.”

“예, 주군.”

에녹이 인시디오가의 기사들을 가리켰다.

“각자 격리하고 그간 있었던 일을 진술하게 시켜라. 상의하지 못하도록.”

“알겠습니다.”

“둘 중 더 많은 내막을 말한 한 놈만 황태자 전하께 바쳐라.”

둘 중 한 명만?

두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한 명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주군?”

“주인을 잘못 선택한 죗값을 치러야겠지.”

고개를 번쩍 든 헨리의 수하들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결과 나오는 대로 보고해라.”

“예, 주군.”

에녹이 막 지하 감옥에서 올라왔을 때였다. 다급히 달려온 집사, 알렌이 서신을 내밀었다.

“후작님. 남부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제2부단장, 휴버 카르웬」

수신인을 확인한 에녹이 손을 들었다. 지척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가 즉시 반응했다.

“예, 주군.”

“출전을 준비해라. 전장으로 귀환해야겠다.”

“바로 알리겠습니다.”

개봉한 서신에는 최근 전장의 동향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간단히 답신을 작성한 에녹이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 알렌에게 건네주었다.

“바로 전서구를 보내겠습니다.”

“그녀는 깨어났는가.”

“예. 막 일어나셔서 목욕하시고 옷을 갈아입고 계십니다.”

“식사를 준비하게. 영양가 많은 것들로.”

“예, 후작님.”

에녹은 즉각 4층으로 향했다.

* * *

아가사는 느리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익숙한 휘장이 비쳤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

후끈한 침실 한쪽에서 익숙한 측근 하녀, 마리가 열심히 벽난로를 뒤적이는 중이었다.

“……마리.”

마리의 고개가 즉시 번쩍 들렸다.

“마님!”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얼른 달려온 마리가 그녀의 이마를 짚더니 활짝 웃었다.

“미열이 있으셨는데 지금은 내리셨네요. 타박상이 조금 있으신데 그건 약을 바르면 금방 나으실 거고요. 따뜻하게 계시면서 영양가 많은 음식을 드시면 몸 상태도 금방 좋아지실 거라고 의원이 그랬어요.”

“나 말고 너 말이야.”

아가사가 작게 웃으며 순간 말문이 막힌 마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침입자들 때문에 기절했잖아. 집사가 잘 치료해 주었니?”

“……네. 의원님을 불러 주셨어요. 별 이상은 없다고 하셨어요.”

“다행이구나. 나 좀 일으켜 주련?”

“예!”

얼른 아가사를 일으켜 앉힌 마리가 물을 가져와 내밀었다.

밖에 나갔을 때 그녀의 기상을 알렸는지 침실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마님. 제시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제시에 이어 집사, 알렌도 문틈으로 얼굴을 비쳤다.

“마님. 저도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물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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