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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132)

83화.

여인은 자신에게 심부름을 맡긴 남자에 대해 묘사했다. 아무 가문의 문장도 없는 평복을 입고 있었지만 말투나 자세에서 기사같이 느껴졌다는 증언이었다.

긴 숨을 내뱉은 에녹이 한 차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남자의 초상화를 그려라. 황태자 전하께도 보내 드려.”

“예, 후작님.”

아낙의 묘사를 토대로 제작된 초상화는 곧장 황태자 궁에도 전해졌다.

막 회의를 마치고 온 황태자, 안토니 록시바가 소식을 듣고 놀란 눈을 끔뻑거렸다.

“뭐? 수상한 놈의 초상화?”

“그렇사옵니다, 전하. 아라투스 후작이 수도의 괜찮은 의상실과 상점을 조사하였는데 한 평민 아낙이 사주를 받고 어떤 남자에게 귀부인이 입을 옷과 고급 침구 등을 사서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시종장이 올라온 초상화를 가져다 바쳤다.

“이것이 그 초상화이옵니다.”

“허.”

순간 안토니는 제 육촌이며 육촌의 남편이며 둘 다 범상치 않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돌아오자마자 일을 이렇게 술술 풀어내나?

제 측근 열 명보다 후작 하나가 더 나을 지경이었다.

“사라브린을 불러라. 라겔로리에서 이달라이 블랑코를 포장해 간 자들 중에 이자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해.”

“예, 전하.”

잠시 후 결과를 전해 받은 안토니의 입술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빙고.”

보고서에는 해당 초상화의 인물과 라겔로리를 방문한 자 중 하나가 일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결과는 노빌리스 제2저택에도 전해졌다.

남은 것은 그자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 시간부로 초상화를 머릿속에 새긴 아라투스 기사단이 은밀하게 수도 외성문 네 곳에서 대기하기 시작했다.

딱 한 번만 더 와라.

그 기다림은 다음 날 이루어졌다.

“신분패.”

“근처 이리둠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초상화 속의 남자와 일행 하나가 성문의 경비병을 향해 신분패를 내밀고 있었다.

“수도 방문 목적은?”

“생필품을 사서 가려 합니다.”

“통과.”

아라투스의 기사들이 정확히 셋으로 갈라졌다.

한 무리는 성문을, 한 무리는 저택으로.

한 무리는 누가 봐도 기사 같은 남자와 일행의 뒤를 조심스레 뒤쫓았다.

* * *

납치 3일 차.

아가사는 의기양양한 헨리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네가 원하는 협상 테이블을 갖췄다. 이만하면 너도 인정하지 않고선 못 배길 거야.”

그는 아가사를 가둬 둔 방에서 데리고 나와 문이 없는 홀 겸 식당으로 데려갔다.

원형 테이블에 흰 테이블보를 깔고 은제 식기를 갖추어 놓은 곳이었다.

낡고 어두운 오두막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지만.

“어때. 이만하면 협상할 자세를 갖춘 셈인가?”

“노력은 했다고 쳐주겠어요.”

아가사가 의자에 앉자 헨리가 보란 듯이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네가 좋아하는 와인이야. 내가 또 기억력이 좋거든.”

이달라이 블랑코.

아가사가 자주 가던 고급 레스토랑, 라겔로리에서 판매하는 와인이었다.

수도까지 갔다 왔구나.

이 식사를 받기까지 꼬박 하루 하고도 몇 시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추측이 현실로 증명된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더 성의가 있네요. 그건 인정해 주겠어요.”

“준비한 음식을 보면 더 인정하게 될 거야.”

놀랍게도 오르되브르가 올라왔다. 굴 요리였다.

아가사는 익숙한 요리장의 솜씨를 맛보며 생각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

그 뒤에 나온 수프도 생선도 스테이크도 모두 먹을 만한 상태였다.

어떤 방식으로 포장해 왔는지는 모를 노릇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 생각보다 수도에서 훨씬 가까워.’

반나절 거리, 어쩌면 그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인지도 몰랐다.

“이제 좀 협상할 마음이 나나?”

알아내고 싶은 것을 알아냈으니 이제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갈 차례였다.

아가사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신 뒤 무심히 금액을 뱉었다.

“50만 카르.”

확 깎인 금액에 헨리의 눈이 커졌다. 아가사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유배지를 탈출하도록 도와준 협력자와 이동 경로도 털어놓는 조건을 포함한 금액이에요.”

헨리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금액과 조건이었다.

“그건 안 될 소리지.”

아니나 다를까 헨리는 크게 뜬 눈을 부리부리 번쩍이며 소리를 높였다.

“그건 절대 가르쳐 줄 수 없는 정보야. 조건에 넣을 생각도 말라고!”

그러더니 잔에 따라 둔 와인을 벌컥 한입에 마셔 버린 뒤 다시 잔을 채웠다.

“내가 바본 줄 알아? 탈출로와 협력자를 알아 간 다음 무슨 짓을 할지 다 아는데. 그걸 말할 리가 있나.”

“그런가요? 그럼 금액이라도 줄여야겠군요.”

전혀 협상의 여지도 남겨 놓지 않는 거절에 아가사가 대수롭지 않게 응하자 헨리가 더욱 흥분했다.

들고 있던 와인 잔에 담긴 붉은 액체가 위태롭게 출렁였다.

“50만 카르에서 더 줄이겠다고? 그런 금액을 내가 받아들일 것 같아?”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요.”

“50만 카르부터가 잘못된 제안이었어. 100만 카르는 줘야지.”

“50만 카르도 어디서든 재기할 수 있을 만한 큰 금액일 텐데요.”

“그래 보아야 젊은 시절의 6년을 대신할 순 없는 금액이야.”

헨리 인시디오 남작이었던 시절.

그는 50만 카르는커녕 5만 카르도 쉽게 만져 본 적이 없었던 평범한 하급 귀족이었다.

그런 그가 아가사의 선택을 받아 상류 계급 사회에 입성했고 분에 넘치는 생활을 했다.

심지어 계획적으로 그녀를 해칠 생각까지 했으니.

‘지금도 내 재산을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있구나.’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았지만, 6여 년간 투박해진 태도에서 그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가 묻어나고 있었다.

다 제 것이라고 생각했던 재산이며 영지, 신분을 두고 북부에 유배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헨리의 파렴치함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가사는 새삼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래도 먹어야지.’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자력으로 탈출하려면 억지로라도 먹어 둬야 했다.

근 3일 만의 제대로 된 식사였다. 마지막 코스까지 꼭꼭 씹어 넘긴 뒤 아가사는 식기를 내려놓고 와인으로 입가심했다.

“헨리. 고작 식사 한 끼 내놓고 바라는 게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

“침구도 없이 맨바닥에, 씻을 수도 없고.”

제대로 대우를 개선하라던 어제의 연장선이었다.

헨리는 들끓는 욕망을 분출하다 말고 아가사의 요구를 듣고만 있었다.

“심지어 갈아입을 옷도 준비하지 않았더군요.”

“대접을 받고 싶으시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는 몹시 짙어서 암녹색에 가까웠다. 아가사는 대수롭지 않게 잔을 내려놓으며 헨리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설마 협박, 강요로 내게서 뭔가를 얻어 낼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은 아니겠지요, 헨리?”

그런 저급한 방법에 넘어갈 만큼 아가사는 만만한 인사가 아니었다.

귀족으로 살아온 시간과 방식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으니.

“난 노빌리스예요.”

“…….”

“나 외에 황실 모독죄라는 그 큰 누명을 벗겨 줄 사람이 누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노빌리스라는 이름을 탐내어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수작을 벌였던 헨리 인시디오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6년 전의 누명만 아니었어도!

그럼 아가사에게 눌리는 것이 아니라 황제도 함부로 하지 못할 지위에 올랐을 것이 분명했다.

그걸 못 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굽혀야 하는 것이 분하고 짜증 났지만.

헨리는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

“노빌리스에게도 목숨은 하나뿐이야.”

약간은 치졸함이 섞인 위협이었다. 아가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 하나뿐인 목숨이 멀쩡해야 당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답니다, 헨리.”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가사는 다시 아무것도 없던 방으로 돌아갔다.

커튼을 걷고 창문 밖을 주시했다. 곧 임시 마구간으로 보이는 곳에 기사 두엇이 나타났다.

말을 탄 헨리의 수하들은 너른 들판을 지나 금방 울창한 나무 사이로 사라졌지만.

덕분에 아가사는 수도가 있는 방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빌리스가 사용하는 물품의 수준을 대략적으로라도 맞추려면 수도가 아니고서야 절대 불가능할 터.

오늘 밤 안으로 침구며 필요한 것들이 도착한다면 수도까지의 거리는 대략 서너 시간 안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두르게 되면 흔적을 남길 확률도 높아지겠지.

이제 수도 저택에 남은 가신들이 헨리가 남길 흔적을 잘 발견해 주길 믿는 수밖에 없었다.

* * *

창가의 맨바닥에 앉아 오래 기다렸다. 레스토랑에서 가져온 식사를 제외하곤 먹은 것도 없이 빈속이 되어 해가 진 참이었다.

땅이 흔들리고.

마침내 어두운 숲에서 말을 탄 자들이 두엇 튀어나왔다. 오후에 출발했던 헨리의 수하들이었다.

‘됐어!’

이제 물품의 질만 확인하면 된다. 임시 마구간에 말을 들인 자들이 짐을 내리니 마니 다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가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쉰 후, 표정을 가다듬었다. 곧 들어올 헨리에게 속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더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

이상할 정도로 순조롭기까지 하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아가사는 커튼을 치고 맨바닥에 다시 앉았다.

말에서 짐을 내리는 소리, 문을 열고 사 온 것들을 들이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현관에서부터 돌아다니는 발걸음 소리 등.

예민하게 곤두세운 귀에 문밖에서 나는 모든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온다.

마침내 약간 다른 구둣발 소리와 다른 발걸음 소리 두 개가 가까워지더니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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