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32)

81화.

순간 아가사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300만 카르?”

에녹이 10년간 전쟁에서 구르고 굴러 받은 승전 포상금이 1만 카르였다.

물론 땅을 엄청나게 하사받긴 했지만.

그리고 아가사가 에녹에게 이자 없이 빌려준 돈이 금 10만 카르였다.

명문가가 대략 반년에서 1년가량 굴러갈 수 있는 금.

그러니까 헨리는 지금 아가사에게 그 큰 명문가에서 약 15년 이상 30년 이하 동안 굴릴 금을 요구한 셈이었다.

“헨리. 그게 말이 되는 액수라고 생각하나요? 6만 년쯤 갇혀 있었다면 모를까 고작 6년으로 300만 카르를 달라니요.”

요구를 해도 정도가 있지.

심지어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헨리는 1여 년간 아가사를 속이고 그녀를 죽일 궁리만 하다 그게 들켜서 내쳐진 상대였다.

“심지어 내가 정말 당신을 유배 보냈다면 억울하지는 않겠네요. 유배 해제까지 요구하고 있으면서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가사는 이번만큼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러자 헨리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니, 네가 먼저 생각한 금액이 있냐고 물었잖아!”

들을 필요도 없는 항변이었다.

“협상이 될 만한 금액을 제시하세요. 그래야 나도 생각할 여지가 있을 거예요.”

아가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고민하던 헨리가 슬그머니 금액을 내렸다.

“그럼 150만 카르를 줘.”

나름 생각한다고 한 것이 반값 할인인 모양이었다.

아가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많아요.”

“뭐가 많아!”

두 번 거절당한 헨리가 결국 제 성질을 못 참고 벌컥 화를 냈다.

“내 6년이 그 가치도 안 된다고 생각해?”

주변에 잡히는 게 있었다간 잡아 던지기라도 했을지 몰랐다.

부릅뜬 초록색 눈이 생기를 잃은 이끼처럼 눅눅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가사는 이번에는 대놓고 기사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하게는 그 기사가 들고 있는 쟁반이었다.

“그럼 나는,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뭐?”

마른 빵 덩어리, 고작 치즈에 물.

아가사는 저런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것이 필요했다.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물론 그녀를 찾고 있을 이들이 눈치챌 수 있을 만한 것.

아가사의 두 눈이 냉정하게 빛났다.

“솔직히 이야기해 봐요, 헨리. 누가 감히 내가 누명을 씌웠다고 하던가요? 내 친족? 아니면 노빌리스의 계승 1순위?”

“그걸 내가 왜 알려 줘야 하는데?”

“난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내가 왜 당신에게 이런 협박을 받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가사.”

“하지만.”

아가사는 꼿꼿이 허리를 세웠다. 지척까지 그에게 다가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이 그렇게 되고 안타깝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봐줄 만큼 말이지요.”

“……!”

쉼 없이 몰아붙여지던 헨리의 눈이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

“그럼……!”

“생각해 보겠어요. 대신 당장 내 대우를 개선해야 할 거예요, 헨리. 지금껏 황제 폐하께서도 내게 이런 대접을 하신 적은 없으시니까 말이에요.”

아가사는 먼지가 가득한 방과 기사가 든 쟁반 그리고 제가 앉은 맨바닥에 한 번씩 시선을 주었다.

과연 그 모습에 헨리도 그녀가 머무는 방의 심각함을 깨닫게 되었으니.

사실 노빌리스의 단 하나뿐인 고귀한 상속자가 머물 만한 방은 아니었다.

솔직히 위협하려고 일부러 이런 방에다 데려다 놓은 것도 있었고.

고심하던 헨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말했듯이 밖에서는 아가사가 납치된 것은 알아도 누구에게 납치되었는지까지는 모를 터였다.

그러니 어디에 있는지는 더더욱 모를 것이고.

대우 개선이야 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혹시 아는가? 더 많은 것을 내어 줄지.

“좋아. 네게 어울릴 만한 대우를 갖춰 오지.”

헨리는 즉시 제 수하를 이끌고 방 밖으로 사라졌다.

아가사는 그제야 머리를 벽에 기댄 채 뻑뻑한 눈을 감았다.

이제 뭐든 사러 여길 나가게 되겠지. 에셀이 빨리 눈치채 줬으면 좋겠는데.

밤을 새우며 세웠던 계획이 무사히 첫발을 내디뎠다. 긴장이 풀어지자 피로가 쏟아졌다.

대병력을 이끌고 움직일 때와 300 남짓한 기사를 데리고 움직일 때는 속도 자체가 달랐다.

객관적 계산으로는 한 열 배쯤 빨라졌을 터였다.

그러나 에녹은 그 속도마저도 성에 차지 않았다.

“주군. 조금 쉬셔야 합니다.”

“말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중간중간 휘하 기사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잠도 자지 않았을지 몰랐다.

그래도 부지런히 달린 보람이 있어 수도의 성벽이 눈앞에 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가 에녹과 기사들을 먼저 알아보았다. 이미 안면이 있던 경비대장이 에녹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벌써 돌아오셨군요, 후작님.”

“일이 있어 잠시 그리되었소.”

경비대장은 누가 봐도 바빠 보이는 에녹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후작님께 무운이 함께하기를.”

“고맙소.”

곧장 외성문을 통과한 에녹은 간신히 말을 달리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곧장 말머리를 신혼 저택 방향으로 틀어 대로를 가로질러 가고 있을 때였다.

앞에서 말을 몰아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라투스 후작님.”

“사라브린 경.”

황태자의 측근, 사라브린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느긋하게 에녹을 초청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차를 한잔하길 원하십니다.”

“지금 말인가?”

“부인께서 기다리시는 것은 알지만 잠시 시간을 내주시지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평화로운 요청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던 에녹이 순순히 긍정했다.

“가지.”

“안내하겠습니다.”

그는 눈치가 없는 사내가 아니었다.

필시 황태자부터가 아가사의 실종을 감추고 있는 것일 터.

예상대로 궁은 평화로웠다.

그를 발견하는 귀족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건 ‘왜 아라투스 후작이 여기 있지?’에 가까웠지, ‘부인이 납치됐는데 왜 여기 있어?’가 아니었다.

황태자 궁의 온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황태자, 안토니 록시바가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게, 아라투스 후작.”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주변은 호위를 제외하면 아주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시종 대신 측근인 사라브린 경이 차를 끓여 내왔다.

느긋하게 차를 권한 안토니가 입을 열었다.

“내 육촌께서 납치되는 바람에 일이 많아. 알다시피 아직 마이뉴코르의 사절단이 궁에 머무르는 상황이거든.”

사교계며 궁정에서도 매우 지위가 높은 아라투스 후작 부인이 이런 시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 슬슬 누구라도 아가사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챌 때가 됐다.

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에녹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찾으셨습니까.”

쇠 냄새가 밴 갑주.

완벽하게 기세를 갈무리하고 있어도 풍기는 오싹한 분위기.

‘……아가사가 이번에는 남자를 참 잘 골랐단 말이지.’

속으로 그런 생각이나 하며 안토니가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다행히 손이 떨리지는 않았다.

“아직. 그러나 주시하고 있는 것은 있네.”

안토니가 알기로 아가사는 순순히 잡혀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 똑똑한 머리로 분명히 이쪽에 뭔가 신호를 보낼 방도를 마련하고 있을 터.

“그것 아나? 아가사 노빌리스를 납치할 이들은 많아도 그녀를 대우하지 않는 이들은 없을 거라네. 그러니.”

에녹이 옅은 살기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태평한 눈빛 아래.

황태자는 날카로운 살기를 기저에 숨겨 놓고 있었다.

“대기해, 후작. 추적은 내가 할 테니 그대는 꼬리가 잡히면 바로 출동할 준비나 하라고.”

“좋습니다.”

무표정하던 사내, 에녹 아라투스가 그제야 입꼬리를 비틀었다.

“알려만 주십시오. 아가사는 제가 구해 올 테니.”

전하께서는 그놈을 잡아 유배지를 이탈한 죄로 쳐 죽이시면 됩니다, 그리 말하는 눈앞의 사내를 보며 안토니가 비죽, 웃었다.

“후작이랑 나, 의외로 잘 맞을 것 같지 않나?”

에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찻잔을 집어 들며 말을 돌렸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일단 긍정적이지. 납치의 주범은 밝혀지지 않았나.”

바로 인시디오 가문을 족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랬다간 아가사가 위험해질 것이다.

그러니 안토니는 헨리 인시디오 남작을 지지하는 가문 내 파벌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동시에 아가사가 즐기는 상점과 음식점의 동향을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기다려 봐. 내, 며칠 내로 반드시 후작에게 아가사가 있는 곳을 알려 줄 것이니.”

몇 시간 전.

헨리의 행방을 쫓던 황태자는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자 좀 짜증이 난 상태였다.

“인시디오 남작 가문이 내 눈을 피할 만큼 힘이 있는 가문이었나? 아니면 헨리 인시디오가 그만한 인물인 것을 내가 몰랐던 건가.”

“죄송합니다, 전하.”

안토니는 측근의 사죄에 손을 내저었다.

“사죄보다 확실한 결과가 필요해.”

아가사가 고작 헨리 따위에게 쉽게 당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구출이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아라투스 후작이 올 때까지 아무 소득도 없이 시간만 보내게 생겼군.”

그 또한 황태자의 체면이 망가지는 일이었다. 안토니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사람을 좀 더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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