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32)

78화.

그 시각, 아가사는 정체 모를 곳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시야마저 흐릿한 가운데 사방이 깜깜했다. 누가 있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마리는 괜찮을까?

막 몸을 일으키려던 아가사는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입을 틀어막았던 천은 사라졌지만 손목은 여전히 묶인 채였다.

낯선 고통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아가사는 일단 냉정하게 납치의 주범부터 상정해 보았다.

친족일까? 아니면 영지전 상대 가문들?

영지전을 벌이는 동안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부인이나 어린 자녀를 납치하는 것은 관례가 아니었다.

그러나 얼굴에 철판을 깔면 하지 못할 이유가 없긴 했다.

아가사 노빌리스는 황족을 제외하면 이 제국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귀부인이었으니 한몫 단단히 챙길 셈을 할 수도 있을 터였다.

문제는 납치혼 쪽인데.

아가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녹이 알면 걱정할 텐데.

다 이긴 전투에서 그녀 때문에 항복해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대로 끌려가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어딘가에 감금될 수도 있었고.

“어쩌지.”

양탄자도 없는, 그야말로 맨바닥에 방치된 아가사가 작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끼익-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있는 줄도 몰랐던 문이 열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햇살에 눈을 찌푸린 찰나.

안으로 들어선 남자의 정체를 알아본 아가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

“헨리?”

“안녕, 아가사. 여전히 예쁘네.”

검은 머리칼에 초록색 눈.

유배지 생활을 한 탓에 잘난 얼굴이 조금 거칠어지긴 했지만 분명히 그녀의 네 번째 전남편인 헨리 인시디오 남작이었다.

“잠시만.”

문을 닫고 들어온 남자가 탁탁, 부싯돌로 초에 불을 붙였다.

유배지 생활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꽤나 능숙한 솜씨였다.

곧 불이 붙은 촛대를 곁에 놓아둔 헨리가 웃었다.

“오랜만이지?”

“……6년 만이네요.”

“맞아. 6년 만이지. 너와 이혼하고 그 거지 같은 유배지에 갇힌 게 말이야.”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 녹색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아가사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설마 납치를 사주한 게 헨리 인시디오였을 줄이야.

최근 유배지의 근황이 수상하다고 전해 준 레오나드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사이, 가까이 다가온 헨리는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금빛 머리칼로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막 성인이 되었을 때보다 더 예뻐진 것 같아.”

등줄기로 미미하게 소름이 돋아났다. 아가사는 티 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유배지에서 도망쳐 나왔나 보군요. 폐하께서 아시면 크게 노하실 거예요.”

“괜찮아. 네가 다 막아 줄 테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게 죄를 뒤집어씌웠던 것처럼 그렇게 해 주면 돼. 쉽지?”

왜 유배지에서 뛰쳐나왔나 했더니.

누군가 상황을 눈치채고 헨리에게 언질을 넣은 것 같았다.

역시 유배지에 들락거린다던 그 누군가를 잡았어야 했는데.

법무부에 요청한 감찰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모르겠다.

아가사는 모른 척 두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헨리. 지금이라도 유배지로 돌아가는 것이 어때요?”

“그냥 돌아갈 거였으면 널 납치하지도 않았겠지.”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폐하께 선처를 구해 보겠어요.”

여전히 머리칼만 만지작거리던 헨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순 없지. 지금 돌아가 봐야 또 그 지긋지긋한 유배지에 갇히기만 할 텐데. 아, 무단으로 유배지를 벗어났으니 이젠 처형이려나?”

킬킬거리며 웃은 그가 아가사의 머리칼을 꽉 움켜쥐었다.

“네가 내게서 빼앗아 간 모든 걸 되찾기 전엔 너도 나도 여기서 나갈 수 없어.”

“…….”

6년의 세월이 길긴 길었나 보다. 1년을 감쪽같이 연기하던 남자가 제 본성을 모조리 내어놓다니.

심지어 어조와 태도마저 난봉꾼인 양 거칠었다.

티 나지 않게 그를 관찰하면서도 겉으로는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던 아가사가 긴 숨을 내뱉었다.

“헨리. 많이 변했네요. 전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내가 예전에는 어땠는데?”

“다정했잖아요. 그래서 나도 당신을 꽤 아꼈었는데…….”

의도적으로 시선을 내리깐 찰나, 남자의 녹색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아가사가 마른 입술을 적셨다.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을 보니 내가 알던 헨리는 없어졌나 보군요. 그럼 나도 이제 당신을 납치범으로만 대하겠어요.”

“아니, 저기. 아가사?”

“아무리 내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을 테죠. 좋아요, 헨리. 그래서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 건가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던 남자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일단 날 유배에서 풀어 줘.”

“죄인을 풀어 줄 권리를 가지고 있진 않아요.”

“그게 아니지. 그 편지는 내가 아니라 네가 쓴 거였잖아.”

희번덕 빛나는 눈을 한 헨리가 아가사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린 부부였으니 내 인장에 손을 대기 가장 쉬운 사람도 너였어.”

입술이 맞붙을 수도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턱을 붙들었다.

“그때는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그 답은 아가사가 알고 있었다. 헨리는 아가사에게 푹 빠진 사랑꾼 행세를 제법 잘 해냈었다.

그날 헨리가 제 수하들과 떠들던 말을 듣지 못했다면 아가사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완벽하게 속이고 있다, 생각했을 테니 아가사를 용의선상에서 배제했을 터.

아가사의 눈을 가리기 위해 했던 짓이 본인의 눈도 가린 것이었다.

“그 고약한 편지는 네 손으로 직접 쓴 건가?”

지척에서 까만 녹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럴 리가요. 폐하의 수사관은 바보가 아니에요, 헨리. 편지에 쓰인 필체도, 인장도 모두 당신의 것이라 밝혀진 것을 당신도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하지 않았다고!”

“윽……!”

순간 버럭 외친 남자가 턱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가사가 신음을 흘리자 얼른 손에 힘을 뺀 그가 곧 잡고 있던 턱을 놓아주었다.

“……고의는 아니었어.”

“아파요.”

어느새 아가사의 꽃봉오리 같은 자색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손도요.”

“…….”

뒤로 묶인 손목은 여전히 거친 밧줄에 쓸리는 중이었다.

잠시 욕설을 중얼거리며 마른세수한 남자가 아가사의 구속을 풀어 주었다.

“제길.”

“고마워요, 헨리.”

의도적으로 곱게 웃은 순간 헨리가 고개를 옆으로 홱 틀었다.

“어쨌든 내가 원하는 건 두 가지야. 유배 해제. 네가 빼앗아 간 것을 모두 되찾는 거. 알았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걸요.”

“될 거야. 그대는 노빌리스잖아?”

그제야 손이 자유로워진 아가사가 입술을 매만지며 신음했다.

조금 전에 입술을 핥았을 때 따갑다 했더니.

거친 천에 틀어막혔던 입술이 살짝 찢어진 것 같았다.

“……하여튼 생각 좀 해 봐. 나는 내일 아침에 올 테니.”

훅, 촛불을 불어 끈 헨리가 도망치듯 문을 닫고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표정이 돌변한 아가사는 어두운 방 안에서 한참 숨을 죽이고 있었다.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도 숨을 쉬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곱 번쯤 확인하고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문이 저기쯤 있었지.’

기억해 둔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살금살금 소리 나지 않게 움직이다 보니 이내 커튼이 손에 잡혔다.

며칠 이상 기절한 것이 아니라면 수도 혹은 수도 근처일 터.

아가사는 부디 아는 곳이 보이길 바라며 커튼을 젖혔다.

“……!”

긴 속눈썹이 충격으로 파르르, 떨렸다.

슬슬 노을이 지기 시작한 무른 하늘 아래.

낡은 오두막으로 보이는 이 집 주변에는 넓게 펼쳐진 들판과 촘촘히 솟아난 굵은 나무들뿐이었다.

임시 마구간으로 보이는 곳에 매인 말 몇 필과 주위를 경계하는 듯 보이는 남자 둘.

아가사는 커튼을 열어 둔 채로 창 앞에 앉았다. 맨바닥에서 서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지금쯤 레온 경은 내가 납치됐다는 걸 알았겠지.’

대담하게 수도까지 숨어들어 그녀를 납치했다.

자신감 넘치는 그 행동을 보면 뒤처리는 확실히 했을 것이다.

증거가 거의 남지 않았을 테니 구출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그사이에 에녹이 알면 안 되는데.’

그들은 지금 영지전 중이었다. 져선 곤란한 싸움에 악재를 끼얹을 순 없었다.

연기가 어디까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되는 데까지 버텨 봐야지.”

만약 구원이 오기 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자력으로 탈출해야 했다.

이곳이 어딘지라도 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고민하던 아가사는 서늘한 한기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모으고 그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어쨌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한편 공연이 끝날 때까지 아르망드 홀을 수색했지만 레온과 기사들은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혹시 몰라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색색의 드레스 행렬 사이를 훑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낯이 심각하게 굳어 갈 때였다.

“레온 타크란 경?”

“……도뮤니아 후작 부인.”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나 그를 부른 이는 아가사의 최측근인 이리스 도뮤니아 후작 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서서 귀족들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리스 도뮤니아였다.

“상황이 꽤 심각한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레온은 아가사가 사라진 즉시 기사를 통해 마님과 동행했던 이리스 부인에게 양해를 구했었다.

-마님께서 몸이 좋지 않아 먼저 귀가하신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레온도, 이리스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몸이 좋지 않아도 아가사가 최측근에게 언질도 없이, 그것도 기사를 보내 대신 말을 전할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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