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32)

75화.

서서히 황궁이 깨어나고 있을 시각.

황제의 시종장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아가사를 맞이했다.

“아라투스 후작 부인, 일찍 입궁하셨군요. 폐하께서는 아직 침실에 계십니다.”

시중부의 수장답게 이른 아침에도 반듯한 모습이었으나 살짝 커진 동공에 약간의 의아함이 배어 있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겠어요. 제가 왔다고 폐하께 말씀 올려 주겠어요?”

“예. 그리하시지요, 후작 부인.”

아가사를 제1응접실로 안내한 시종장이 황제에게 보고하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살짝 열린 응접실의 창으로 이른 아침 특유의 선선한 공기가 흘러들었다.

시종이 내놓은 다과를 들며 기다리고 있자니 곧 황제가 기침했다는 기별이 왔다.

“함께 조찬을 들겠느냐, 하문하셨습니다.”

“기꺼이 그리하겠다 전해 주세요.”

일어나자마자 조찬실에서 대녀를 맞은 황제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짐도 나이가 들었나 보구나. 아침이 그리 개운하지가 못해.”

“사냥제 땐 아주 정정하셨던 것 같은데요. 좋은 보양식을 드시면 금세 좋아지실 거예요.”

아가사가 엄살을 받아 주지 않자 황제가 손짓해 그녀를 식탁에 앉혔다.

신선한 반숙 달걀과 샐러드, 과일과 버터, 시럽을 곁들인 얇고 납작한 빵에 갓 짠 과일 주스를 더한 간단한 식단이 놓여 있었다.

“우유라도 주랴?”

“폐하.”

“끌끌, 농도 못 하느냐. 일단 들자꾸나.”

아가사는 황제와 함께 조찬을 시작했다. 어느덧 녹아든 버터를 빵 위에 시럽과 함께 올려 먹으며 후식으로는 요거트를 들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즈음, 황제가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무섭게 차려입었구나.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노빌리스 영지에 전쟁이 일어났어요. 지금쯤 상대 측에서 올린 선포고가 궁내부에도 당도했을 거예요.”

아가사의 보고에 후식을 들던 황제의 손이 멈췄다.

“네 친족들은 없고?”

“엘리부쓰 남작이 끼어 있어요. 그보다는 다른 가문 네 곳이 더 신경 쓰이네요.”

“가주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으니 슬슬 승냥이가 들끓나 보구나.”

황제가 시종장에게 궁내부에 올라온 선포고서를 찾아오라 명했다.

황제의 분석은 정확하다 할 수 있었다.

만약 노빌리스에 적통 계승자가 태어난다면 모든 혈족이 그에 복속할 테고.

더 이상 그 부유한 영지를 탐내는 것은 요원해지는 것이다.

“에녹이 곧 출정할 거예요.”

“그래도 네 남편이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서 다행이로구나.”

황제가 혀를 쯧쯧 차더니 아가사에게 충고했다.

“이번 기회에 다시는 이런 짓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확실히 눌러 주거라.”

“그럴 생각이에요.”

가문의 근간은 영지다. 영지 주변이 평화로워야 어떤 일이든 굳게 헤쳐 나갈 수가 있었다.

아가사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신 뒤 황제를 묘하게 쳐다보았다. 황제가 시종장이 바친 선포고서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영지전은 짐이 도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럼요, 폐하.”

영지전은 제국법에도 등장하는, 귀족 가문 간의 정당한 영토 점령전이다.

여기서 황제는 제국법의 수호자로서 중재와 승패의 판결을 맡아 중립을 유지하곤 했는데.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그렇지만 대부께서 대녀에게 약간의 편의를 봐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폐하의 직할령을 지나갈 수 있도록 허가해 주시는 것이라든가요.”

“전쟁에는 관여하지 않고 말이지.”

아가사가 곱게 웃고 있는 것을 본 황제가 헛웃음과 함께 원하는 것을 내주었다.

황실의 직할령을 가로지를 수 있는 통행증과 행군 중 병력의 움직임을 제한받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이었다.

“돌아갈 때는 안 된다. 가는 것만 해.”

“감사합니다, 폐하. 이번에도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노력하겠어요.”

됐다. 아가사는 활짝 웃는 얼굴로 황제 궁을 나섰다.

그녀의 표정에서 청신호를 발견한 측근 하녀와 제1부단장을 비롯한 호위 기사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님. 성공하셨군요.”

“얼른 돌아가요.”

에녹에게 희소식을 알려 줄 때였다.

황제가 인장을 찍어 준 서류들을 챙겨 저택으로 돌아오자 바쁘게 움직이던 가신들과 기사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마님. 다녀오셨습니까.”

마중을 나온 알렌의 눈빛에도 숨기지 못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모두 대회의실로.”

“예, 마님.”

이미 깨어나 움직이고 있던 에녹을 비롯한 노빌리스와 아라투스의 가신이 대회의실로 모였다.

아가사가 테이블에 황제에게서 받아 온 허가증을 올렸다.

“폐하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셨어요.”

“오오! 이것으로 이동 거리가 훨씬 단축될 수 있겠습니다.”

“역시 마님이십니다.”

비록 가는 것만이지만 이게 어디인가.

솔직히 영지전이 끝나면 서두를 필요가 없기에 굳이 황실 직할령을 가로지를 이유도 없었다.

가신들이 얼른 2안으로 계획했던 황실 직할령을 가로지르는 진군로와 보급로, 군의 합류를 논의했다.

“통행증이 있으니 우회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제닝스 가문부터 먼저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동 거리상으로도 나쁘지 않군요.”

“상대의 병력을 먼저 깎아 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전쟁을 오래 해 왔던지라 다들 어떤 식으로 다섯 가문을 상대하면 좋을지 척척 계산이 빨랐다.

상대 측에서는 이쪽이 황실 직할령을 가로질러 나타날 것이란 생각을 못 하고 있을 테니 기습도 가능한 사안이었다.

아니면 수도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타나 병력을 잡아먹어도 좋을 것이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여러 곳을 동시에 쳐도 좋겠는데.”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주군.”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이 들어오느냐, 아니면 모여서 들어오느냐.

거기서 대회전이 벌어질 것인지 각개 격파가 이루어질 것인지 답이 나올 것이다.

회의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머지는 가면서 결정하면 되겠군.”

에녹이 두 가문의 가신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선언했다.

“내일 새벽. 출전한다.”

노빌리스 영지를 향한 두 번째 진군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번 준비해 봤던 영지전을 다시 준비한다는 것은 좀 더 완벽한 준비가 가능하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이번에는 로안을 지나지 않을 테니 물자를 많이 챙겨서 이동하지 않아도 될 거야.”

“의외로 강이 흔하던데.”

“쭉쭉 달리기만 하면 될 테니 말먹이나 더 챙겨야겠군.”

그러나 더 완벽한 준비가 가능하다고 해서 전운이 감돌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부 전장에 나서게 된 가신들과 아라투스의 가신들을 비롯한 기사들에게서 전장에 대한 흥분과 긴장감, 호승심 등이 느껴지고 있었다.

늦은 새벽.

물자 준비와 보급로 파악, 현장 점검까지 마친 아가사가 수도 아라투스 저택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마님.”

수도 아라투스 저택의 총집사장, 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이는.”

“내실에 계십니다.”

아마 출전 준비 중이겠지.

아가사는 익숙하게 복도를 가로질러 에녹의 방으로 향했다. 3층 중앙 복도에서 가장 아름답고 섬세하게 조각된 방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냐.”

“저예요, 에녹. 들어가도 될까요?”

바로 문을 연 사내가 조금 당황한 낯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그는 가벼운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출전 준비를 도와 드리고 싶어서요. 물론 물자 준비는 완벽하게 하고 왔답니다.”

“……들어오십시오.”

다행히 늦진 않은 아가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내실에는 갑옷을 비롯해 서코트와 부츠 등이 놓여 있었다.

아가사는 집사, 벤과 함께 에녹이 갑옷을 갖춰 입는 것을 도우며 그의 모습을 눈에 새겼다.

다시 전쟁이구나.

결혼 후에 그가 자신을 위해 나서는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평생 전장을 떠돈 사내에게 자꾸만 피 묻히기를 강요하는 것 같았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나가게 되었네요.”

멈칫하던 에녹이 부분 갑옷을 당겨 착용하며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가주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입에 맴돌았지만.

아가사는 그 말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배웅을 나가도 될까요?”

“연무장까지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아가사.”

그가 웃으며 아가사를 향해 살짝 몸을 낮춰 주었다.

아가사는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의 몸에 서코트와 망토를 둘러 주었다.

철 갑옷에서 서늘한 한기가 와 닿았다.

마지막으로 아라투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브로치로 망토를 고정한 아가사가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저가 사랑하는 회잿빛 눈동자 아래 익숙해진 검상과 유려한 콧날, 붉은 입술이 차례로 보이고 있었다.

또 한동안은 보지 못할 얼굴이었다.

눈에 새기듯 하나하나 훑자 아가사의 시선을 잡아챈 에녹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영지전이 끝나면 함께 노빌리스 영지에 머무르는 것은 어떻습니까?”

생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아가사는 부모님이 살아 계셨던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영지에 머무른 적이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궁과 수도의 저택에서 머물렀고 결혼했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가장 안전한 수도에서 시간을 보냈었지.

아가사의 눈동자가 기대로 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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