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32)

68화.

어쩐지 잠잠하다 했더니.

황제도 2황자가 보통 이상으로 미쳤다는 것을 눈치채고 노력 중이었다.

“역시 폐하밖에 없으십니다. 폐하께서 이렇게 저를 배려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아, 뭘 그렇게까지 말하느냐. 짐의 대녀를 위해 당연한 일인 것을.”

아가사가 웃었다. 본래 이 자리에는 황제가 아니라 황태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감히 에녹의 안위를 걸고넘어지더니.’

네우타는 선을 넘었다. 다른 방식으로 저를 불러냈다면 모를까, 이 부분만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2황자 저하께서는 어디로 가신 건가요?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요.”

“글쎄다. 계속 곁에 붙여 두었더니 많이 힘겨워하는 것 같더구나. 잠시 바람을 쐬러 간다는데 적당히 놀다 오지 않겠느냐?”

아가사가 비로소 활짝 웃었다. 짧지 않은 두 번째 결혼 생활 덕에 페르난드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폐하. 저쪽의 수목을 보러 가도 될까요? 낮 동안 가제보에만 있었던 터라 가을의 숲을 보지 못했더니 구경하고 싶어요.”

“그래. 가 보자꾸나.”

선을 넘은 것은 그쪽이었으니 그 값은 최대로 받아 낼 것이다.

그 기사가 가리킨 곳에 가까이 다가간 찰나 느껴진 수많은 인기척과 익숙한 고함을 들은 아가사가 속으로 차게 웃었다.

2황자, 페르난드의 음성이었다.

“굳이 이곳까지 들어와 내게 모욕을 주다니! 록스바드 제국에는 남의 정사를 훔쳐보는 관음제라도 있는 것인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고함에 놀란 황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이냐?”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귀족들이 깜짝 놀라 예를 갖추며 물러섰다.

“폐하.”

그 사이로 보인 것은 수풀 안에서 흐트러진 차림으로 호통을 치고 있는 2황자와 어쩔 줄 모르고 선 네우타 세 여인을 비롯한 열댓 명의 귀족들이었다.

시기 좋게 황제의 시종장이 목청을 돋웠다.

“록스바드 제국의 위대한 태양, 워밀라이 2세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얗던 네우타 세 여인과 귀족 무리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특히 황제 옆에 선 아가사를 발견한 세 여인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들이 재빨리 예를 갖췄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도 받지 않은 황제는 제대로 언짢은 기색이었다.

“인사가 아니라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만.”

“그것이…….”

네우타 노부인이 제대로 입을 떼기도 전이었다.

“폐하! 이럴 수는 없나이다!”

페르난드가 억울하고 화난 낯으로 외쳤다. 워밀라이 2세와 그 옆에 선 아가사까지 확인한 그는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저것들 때문에 아가사 앞에서까지 망신을 당하게 되다니.

“진정하게, 페르난드 황자. 이게 무슨 일인가? 옷은 또 왜 헐벗었고?”

황제의 하문에 페르난드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폐하. 폐하께서 제게 한창때의 남자에게는 당연히 여자가 필요하다 하시며 어여쁜 시녀들을 붙여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랬지.”

황제가 당혹한 낯으로 수긍할 찰나, 페르난드가 네우타 세 여인과 귀족들을 손가락질했다.

“아니, 누가 여기서 아가사를 보았다기에 와 보았더니 그녀가 없어서 실망하던 차에 시녀가 위로를 해 주겠다더군요. 역시 폐하께서 내려 주신 시녀다, 기뻐하며 수풀로 들어갔는데-”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황제는 2황자와 연을 맺길 원하는 귀족 출신 시녀들로 페르난드의 수행원을 구성해 주었다.

잘하면 그중에 제2황자비가 탄생해서 마이뉴코르 제국과의 관계를 더 공고히 할 수도 있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저들이 갑자기 이곳까지 들어와 제 정사를 관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뭐라?”

“심지어 알고서 들어온 게 확실합니다! ‘찾았다, 여기예요!’라면서 제가 있는 곳까지 거침없이 들어왔다, 이 말입니다!”

곤혹스러워하던 황제의 낯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황가의 권위와 제국 사이의 친교에 대한 문제였으며 무려 황족이 대낮에 희롱을 당한 사건이었으니.

아가사가 나긋하게 눈꺼풀을 팔랑였다.

“누구냐.”

대노한 황제의 시선에 노출된 네우타 세 여인과 귀족들이 몸을 떨었다.

“폐, 폐하.”

“누가 감히 이런 벼락 맞을 일을 꾸몄느냐, 이 말이야!”

퍽, 황제가 발을 구르기 무섭게 근위 기사들이 검을 뽑아 겨눴다.

스르릉-

시퍼런 칼날과 마주한 귀족들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네우타 세 여인을 가리켰다.

“어, 억울하옵니다, 폐하! 저희는 그저 네우타 노부인과 대부인, 영애가 보여 줄 것이 있다고 해서 단순 동행한 것뿐이었습니다!”

“맞습니다, 폐하! 저희는 그게 2황자 저하와 관련된 것인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폐하!”

“저희 말을 들어 주십시오, 폐하!”

뒤늦게 이 자리에 합류한 황태자, 안토니 록시바가 대강 상황을 파악하고 혀를 찼다.

“감히 황족을 구경거리로 삼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어느새 나타난 황후와 황태자비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주관한 디저트 파티에서도 소란을 일으키더니. 아무래도 저 세 사람의 근신이 너무 짧았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래? 네가 주관한 파티에서도 소란을 일으켰다는 말이냐, 황태자비.”

“예, 황후 폐하.”

멍하니 주변을 살피던 네우타 노부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개중에서 현명한 노부인 정도라면 아가사가 황제와 나타났을 때부터 패배를 직감했을 터였다.

문제는 처벌이 어디까지 뻗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겠지.

아가사는 이제 사교계로 전장을 한정할 생각이 없었다. 먼저 남편을 건드리며 전장을 넓힌 것은 저쪽이었다.

그랬기에 황제와 동행한 것이었으니.

그간 2황자를 제 옆에 꼭 붙여 놓는 등 평온한 가을 사교계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던 황제의 분노가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테오도르 네우타 공작은 어디 있나! 외무대신이, 제 집안 단속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감히 이런 일이 벌어지게 만들어?”

깜짝 놀란 네우타 노부인과 대부인, 영애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폐, 폐하! 공작은 이 일과 상관없습니다. 저희도 그저 이곳에 뭔가 있는 줄 알고 들어가 본 것이지, 결코 마이뉴코르의 2황자 저하께서 계실 줄은 꿈에도……!”

황제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대들과 함께한 귀족들은 보여 줄 것이 있다는 말에 따라갔다, 하였는데? 감히 지금 짐에게 거짓을 고하고 있는 것인가?”

“그, 그것이!”

“설령 2황자인 줄 몰랐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수풀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면 알아서 자리를 피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성인식도 못 치른 어린 귀족도 아니고 알 것 다 아는 이들이 정말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그 안에 들어갔다고, 지금 그 말을 짐에게 믿으라고?”

주변 귀족들의 시선까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네우타 세 여인이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황제에게 호통을 듣고 있을 때였다.

“폐하.”

급히 연락을 받고 돌아온 여섯 번째 전남편, 테오도르 네우타 공작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 신의 불찰입니다. 신을 벌하시고 저 세 사람은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공작……!”

“왜, 왜……!”

시선으로 조모와 어머니, 누이의 입을 다물게 한 공작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네우타 가문의 가주인 제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황족 모독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 텐데.”

“각오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음성은 여전히 냉담했다. 간신히 옷을 추스른 마이뉴코르 제국의 페르난드 제2황자가 주시 중인 자리였다.

“테오도르 네우타 공작은 들으라. 지금 이 시각부로 국경 지대로 떠나 외무대신으로서 변경 지대와 각국의 상황을 직접 점검하고 오라. 그전까지는 수도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노라.”

“황명을 받듭니다. 지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사실상의 수도 추방령이었다.

최소 3년간은 수도로 돌아오지 못할 터.

드디어 네우타 세 여인에게서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몸을 일으킨 네우타 공작이 착잡한 낯으로 수하들을 이끌고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짧게 혀를 찬 황제가 뒤로 물러섰다.

“저 세 사람의 처벌은 황후에게 맡기겠소.”

“예, 폐하.”

가주를 처벌했다고 그 구성원이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황족의 밤 생활을 훔쳐보고 그것도 모자라 황족을 구경거리로 만든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대죄였으니.

앞으로 나선 마거릿트 록시바 황후가 네우타 노부인과 대부인, 영애에게 선언했다.

“황태자비에게 듣자 하니 디저트 파티에서도 소란을 일으켰다 들었다. 황태자비가 관대하게 넘어가 주었음에도 이성을 차리지 못하고 이런 일을 벌였으니 이 또한 처벌받아 마땅할 터.”

“흐윽……!”

“가주, 테오도르 네우타 공작이 모든 책임을 지고 수도를 떠났으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저택에서 근신하라. 한 발자국도 수도 네우타 공작 저에서 나오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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