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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132)

64화.

“마님. 나오셨습니까.”

주방에서 새벽을 밝히며 오늘을 위한 디저트 준비를 마친 두 명의 요리장과 요리사들이 예를 갖췄다.

“타르트 상태는 어때.”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일단 시식하실 것을 가볍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아가사가 준비한 것은 블루베리 치즈 타르트였다.

먼저 완성한 한 입 크기의 타르트가 접시 위에 놓여 있었는데 새파란 블루베리 아래 깔린 아이보리색 치즈가 먹음직한 색감을 띠고 있었다.

설탕 광택을 입고 반짝이는 블루베리와 페이스트리의 바삭함, 크림치즈의 부드러움.

“좋네. 이대로 만들어 내면 되겠어.”

맛을 본 아가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저트 파티 준비는 완벽했다. 그리고 이 새벽부터 거의 모든 수도 귀족가의 주방에서 똑같은 모습이 보이는 중이었다.

아침이 되자 수도 외성 밖으로 대규모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첫 가을 사냥제가 열릴 곳은 수도에서 대략 2시간 정도 떨어진 대규모 황실 사냥터였는데.

몸이 불편하거나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이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귀족이 말을 타고 사냥터로 향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온갖 귀족 가문의 깃발이 휘날렸다.

그 사이에 아가사를 비롯한 아라투스가의 행렬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니.

옆에서는 에녹이, 주변에서는 아라투스가의 기사들이 빈틈없이 경계 중이었다.

바로 옆에서 말을 타며 에녹이 말을 붙였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에녹은 조금 전부터 은근하게 같이 타지 않겠느냐, 권하고 있었다.

새벽에 나가는 모습을 봐서 그런가?

아가사가 고개를 저었다. 높이 올려 묶은 머리칼이 고운 사냥복 위로 사르르, 흔들렸다.

“전 괜찮아요. 어차피 사냥제 중에는 막사에서 쉬고 있을 텐데요.”

아가사는 도리어 에녹이 걱정이었다.

“당신이야말로 괜찮으시겠어요? 분명 전하께서 억지를 부리실 텐데.”

사내가 옅게 입꼬리를 휘었다.

“그분께서 요구하실 것이야 사냥감이겠지요. 결과에는 지장이 없으니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불시에 가까이 다가선 그가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내 체력이야 그대가 더 잘 알지 않습니까.”

“……!”

순간 귓바퀴가 화끈 달아올랐다. 묘한 손길이 흔들리는 머리칼을 가볍게 매만지다가 사라졌다.

“사냥감은 빼앗기더라도 우승은 그대 품에 안겨 드리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무척이나 오만한 선언이었으나.

왠지 그가 말하면 말하는 대로 다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높이 올려 묶은 머리칼 덕에 아가사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감추지 못했다.

아가사가 그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팔 이리 줘 보세요.”

“이쪽이면 됩니까?”

에녹이 즉시 가까운 왼팔을 내밀었다.

저가 뭘 할 줄 알고 이렇게 바로 반응하는지.

어쩌면 알고서 반응한 것도 같았다.

아가사가 답지 않게 부끄러워하며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왼팔에 둘러 묶었다.

“예상하셨을 수도 있지만 제가 만든 손수건이에요.”

아라투스가의 상징인 독수리와 노빌리스가의 상징인 장미 세 송이와 넝쿨을 수놓은 것.

사냥제에서는 귀부인이 제 기사에게 가호와 응원의 의미로 손수건을 내주는 전통이 있었다.

자수가 잘 보이도록 묶고 나니 부끄러움 대신 만족감이 차올랐다.

꼭 내 거라고 인장을 찍어 놓은 느낌이랄까?

“예쁘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에녹은 말없이 손수건 위를 매만지고 있었다.

“……직접 만들어 왔을 줄은 몰랐는데.”

“제 부탁도 들어주었잖아요. 근데 자세히 보지는 마세요. 오랜만에 놓은 것이라 모난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

아가사가 다시 뜨끈해진 뺨을 손등으로 식히고 있을 때였다.

“우리 육촌이 드디어 제대로 된 기사를 만난 모양이군.”

때마침 사냥터 근처에서 나타난 황태자, 안토니 록시바가 그 광경을 보고 말을 걸어왔다.

“본인이 알기로 아가사가 직접 수놓은 손수건은 채 다섯 장도 안 되거든.”

“전하.”

놀리는 것이 역력한 말투였다.

아가사는 자수 놓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평범한 실력이라 그랬다.

잘 알면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비꼬다니.

물론 에녹은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머지 네 장은 누구에게 주었습니까, 아가사.”

“……폐하와 전하, 그리고 네 번째 전남편이요. 의례적인 거였어요.”

고로 이건 정성이 담긴 손수건이라는 소리였다. 에녹의 입가에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가사는 조금 부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쓸데없이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다니.

보복이 필요한 때였다.

“그런데 왜 전하의 팔에서는 손수건이 보이지 않을까요?”

아가사가 보란 듯이 안토니의 빈 팔을 확인하며 한껏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중매로 정략결혼 한 황태자 부부의 사이는 이득만 보고 결혼하면 어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아주 극단적인 예시 중 하나였다.

“비 전하의 자수 솜씨는 황궁 밖까지 유명하죠. 틀림없이 아주 아름다운 손수건을 만들어 두셨을 텐데요.”

“……내가 졌다. 아무 말도 안 할게.”

바로 두 손을 들고 항복한 안토니가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 부탁할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가사 부인.”

황태자비뿐만이 아니라 아가사는 황태자에게도 사전에 서신을 보내 두었다.

대충 디저트 파티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은 되었지만.

그 자리에 아가사의 편을 들 황족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이야기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각 가문에서 가져온 디저트를 선보이는 파티가 있을 예정이에요.”

“그런 일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

“오셔서 함께해 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만일의 사태를 위해서라도 황태자 전하께서 동석해 주시면 좋을 거예요.”

“거기에 참석하려면 사냥을 하다 말고 돌아와야 할 텐데?”

사냥을 즐기는 안토니 입장에서는 황당한 소리였다.

“거기다 내 비가 주최하는 자리잖아. 나보고 거기에 참석하라고?”

“사냥제야 황제 폐하께서 참석하시잖아요. 황후 폐하께서는 사절단맞이로 바쁘시고요. 이럴 때 전하께서 비 전하와 함께 디저트 파티를 맡아 진행하시면 딱 좋지 않으실까요? 폐하께서도 흐뭇해하실 것이고요.”

“아가사.”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안토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놀렸다지만 이건 너무한데? 오늘 파티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는가 봐? 그렇지?”

“저 대신 디저트 몇 개만 먹어 주시면 되는 일이에요. 전하, 설마 거절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거절하면 두고두고 갚아 줄 테다.

그런 문장이 대놓고 떠오른 자색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소꿉친구의 억지에 안토니가 메고 있던 활을 내보였다.

“오늘 곰을 잡으려고 새 활도 마련해 왔어.”

“그 곰은 제 남편이 잡아 드릴 수 있어요. 그렇죠, 에녹?”

아가사의 말에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에녹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

이미 아가사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사냥감을 모조리 바칠 것을 상정하고 있던 그였다.

어차피 아가사에게 모두 주었을 사냥감이 그녀를 위해 쓰인다면 그것도 좋은 일일 터.

“최대한 원하시는 사냥감을 노려 보겠습니다.”

아가사가 작정하고 준비해 왔다는 것을 눈치챈 안토니가 이마를 짚었다.

“너 진짜.”

물론 안토니가 아가사를 이기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한다면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인데.

놀리러 오는 게 아니었다고 작게 투덜거리던 안토니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후작이 잡은 여우나 담비는 전부 내가 가질 거다. 곰도 물론이고 무늬가 괜찮은 표범이나 호랑이가 있으면 그것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그럼 잠시 후에 보지, 후작, 후작 부인.”

안토니가 말을 박차 멀어졌다. 어느덧 그는 위엄 있는 황태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미 사냥터에 들어선지라 귀족들의 시선이 수없이 쏟아졌다.

아가사가 조용히 그의 손가락을 붙들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어서 고마워요, 에녹.”

“내 기준에서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좋았습니다만.”

“다음에 제가 다시 멋진 사냥회를 열어 드릴게요.”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에녹이 제 손을 잡은 아가사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대가 안전해졌다는 게 더 마음에 드는군요.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사냥에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검은 가죽 장갑을 쓴 커다란 손이 흰 가죽 장갑을 낀 손을 거의 삼킨 모양새였다.

걱정했구나.

틈 없이 맞물린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놓은 에녹이 먼저 말에서 내렸다.

하인들이 미리 쳐 둔 막사 위에 아라투스와 노빌리스가의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조심할게요. 걱정 마세요.”

“레온을 두고 갈 겁니다. 어디든 함께 다니십시오.”

“응. 그럴게요.”

에녹이 아가사를 땅 아래로 내려 주었다. 약간 과보호 같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오늘 사냥제가 열릴 황실 사냥터는 광활한 숲 앞에 공터가 자리한 형태였다.

공터에는 수많은 막사가 들어서 있었는데.

중앙에 배치된 황족의 막사와 단상을 기준으로 귀족들의 막사가 신분에 따라 자리를 배정받는 식이었다.

아라투스 가문의 막사는 황족 다음으로 좋은 자리였다.

각자 말과 장비를 점검하고.

사냥제가 시작될 시각이 되자 단상 앞으로 수많은 귀족이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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