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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63/132)

63화.

‘대부인이나 영애라면 몰라도 노부인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은 인사인데.’

사냥제 때 디저트 파티를 열어 무슨 짓을 할지는 대충 예상이 간다.

이것이 함정이라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어디에든 라르엔을 섞어 넣겠구나.

라르엔은 향을 없애 버리는 대신 원하는 색을 내고 싶을 때 사용하는 드문 식재료였다.

이혼하기 전, 네우타 공작 부인으로 지냈을 때.

아가사는 라르엔이 들어간 쿠키를 먹었다가 그만 크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먹는 즉시 얼굴이 얼룩덜룩하게 달아올랐다.

간지럽지도 아프지도 않았는데 색만 변했었지.

잘 사용하지 않는 재료였던지라 그런 부작용이 일어날 줄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물론 별다른 처치를 하지 않아도 사나흘이면 정상으로 돌아오기에 위험하지는 않았다.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딱 망신 주기 좋은 반응이 일어난달까.

당연히 네우타 노부인과 대부인, 영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뭔가가 걸리는데.’

문득 황좌가 있는 곳에 시선을 주던 아가사가 눈을 크게 떴다.

겉가죽만은 무척이나 수려한 페르난드 근처의 수많은 귀부인과 영애들 사이에 네우타 영애가 머물고 있었다.

살짝 홍조가 도는 얼굴.

숨기지 못한 미소가 잘생긴 황자를 보며 좋아하는 것도 같았으나 조금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네우타 노부인이 대륙에서 유명한 난봉꾼 곁에 손녀가 접근하도록 둘 리가 없을 텐데.

“…….”

“아가사 부인. 잘되었네요. 저들의 수작을 알았으니 잘 대처할 수 있을 거예요.”

이리스 부인의 속삭임에 작게 수긍하며 아가사는 티 나지 않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이상을 알아챈 이리스 부인이 아가사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혹 이상한 점이라도 있으세요?”

“뭔가 너무 쉽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네요. 저기, 보이시나요?”

아가사가 은밀히 부채로 페르난드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거기서 네우타 영애를 발견한 이리스 부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머나.”

잠깐 있다가 사라지기는 했으나 확실히 수상한 일이었다.

“알아봐야겠네요.”

“부탁해요, 이리스 부인.”

“맡겨 주세요.”

아가사는 부채를 펼쳐 표정을 가리며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쩌면 양동 작전일지도 모르지.

이후로 첫 가을 황실 무도회는 별 탈 없이 흘러갔다.

중반쯤이 넘어갔을 때 아가사는 에녹과 함께 페어리아스 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끈질기게 페르난드를 잡아 놓고 있던 황제가 안도했다는 후문이 돌았다.

그 외에도 귀족들이 아라투스 후작 부부를 응시하고 있을 무렵.

황가의 계단 한편에 자리한 마이뉴코르 제국의 황손, 아단 마이뉴도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여자가 아가사 노빌리스.’

아가사가 페르난드와 이혼하기 전.

아단은 고작 여섯 살이었기에 그녀를 어렴풋하게만 기억하고 있었다.

대륙의 어느 황제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귀부인.

혈통, 신분, 재력, 권력, 무력,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전부 가진 노빌리스 공작 가문의 상속녀.

얼굴을 확인했으니 됐다. 이제 남은 것은 저 여자와 은밀하게 만남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곧 사냥제가 열린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마마.”

시종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가 유일한 기회가 될 것이다.

희망에 찬 아단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첫 가을 황실 무도회를 마무리하고 에녹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온 아가사가 늦은 밤 측근 하녀를 불러들였다.

일단 첫 방법과 수단을 알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고스란히 되돌려 드려야지.

“마리, 네우타에서 내게 라르엔을 먹일 계획인가 봐.”

놀란 마리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감히 마님께 그런 짓을 하려 든다고요?”

“응. 그래서 나도 적당히 괜찮은 방식으로 응수하려고 해.”

이상 반응이란 때로는 암살이나 공격 수단으로도 쓰일 수 있는 것.

이런 수작에 대비해서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그때 그 향신료, 기억나니?”

오래전, 상단에서 새로 유통할 식재료를 찾다가 알게 된 엄청 매운 향신료였다.

반의반의반의반 티스푼만 넣으면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지만.

그 이상 넣을 경우 넣는 양에 비례해 죽지는 않고 1시간쯤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울게 될 수도 있는 흰 향신료였다.

수도에서만 지내는 네우타 가문이 알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정보였다.

마리의 눈이 반짝였다.

“기억해요, 마님. 가을 사냥제에서 사용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둘까요?”

“응. 그렇게 해 줘.”

새하얗고 작은 알갱이는 얼핏 보기에 설탕과 매우 비슷해 보였다.

마리는 그 가루를 설탕에 섞어 쉽게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들 예정이었다.

“티스푼 한 번이면 충분하실 거예요.”

네우타 공작 대부인은 어떤 차를 마시든 설탕을 넣어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고마워, 마리.”

내실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댄 아가사는 고민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지만.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가사.”

곧 나직한 음성과 함께 물기가 살짝 남은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잠시 샤워 때문에 자리를 비운 사내가 돌아온 것이다.

아가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냥제 때 디저트 파티를 열 예정이라 잠깐 마리와 상의를 했어요. 파티 주최를 황태자비 전하께 맡길까 하고요.”

“좋은 생각이군요. 그대는 조금 쉴 필요가 있습니다.”

“음, 일을 더 크게 키우려고 황태자비를 끌어들이는 건데 말이죠.”

나긋하게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사내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소파 등받이를 짚으며 앞으로 넘어온 사내가 가두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네우타?”

“정답이에요. 이번 사냥제 때 끝낼 생각인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나요?”

살짝 굳어 있던 사내의 낯에 부드러운 온기가 돌았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뭐든지.”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도 디저트 파티에 참석하실 수 있게 도와주세요.”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요. 그대의 뜻대로 될 겁니다.”

아가사가 웃으며 에녹의 목에 팔을 감아 당겼다. 보답은 직접 수놓은 손수건이 좋을 것 같았다.

단풍이 만발한 가을.

첫 가을 황실 무도회가 끝나고 황실 주관 가을 사냥제가 개막했다.

이번 가을 사냥제는 마이뉴코르 제국의 제2황자가 참석해서 특별해진 것은 물론, 귀부인들을 위한 디저트 파티까지 계획되어 있었다.

디저트 파티의 주최자는 엘리자베스 록시바 황태자비였는데.

황궁 무도회 다음 날 즉시 서신을 보낸 아가사의 안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친애하는 비 전하.」

「이번 사냥제에는 디저트 파티를 열어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디저트는 각 가문에서 준비해 올 것이니 비 전하께서 차를 준비해 주시면 비 전하께서 주관하시는 행사가 될 거예요.」

「여담이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참석하실 수도 있답니다. 두 분의 화목하신 모습을 보시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모든 공을 돌려주겠다는 꽤 먹음직스러운 제안이었다.

답신은 곧장 돌아왔다.

「친애하는 아가사 부인.

언제나 나를 위하여 주는 부인의 따뜻한 마음씨에 늘 감동하곤 한답니다.」

「함께 보내 준 차와 디저트에 곁들여 먹을 수 있는 귀하고 드문 향신료도 나를 기쁘게 하는군요. 부인만 괜찮다면 이 향신료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감미료와 향신료를 파티에 내 볼까 해요. 차를 깔끔한 것으로 준비하는 대신으로 말이지요.」

황태자비가 나섬으로써 사냥을 나서는 이들을 제외한 모든 귀족이 디저트 파티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조금 당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가사가 웃으며 엘리자베스 황태자비로부터 받은 만족감 가득한 답신을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더 커진 판에 당혹했을 네우타 여인들의 표정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사냥제 이튿날.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뒤 측근 하녀, 제시가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짙은 휘장 너머의 침대에서 군살 없이 완벽한 형체의 사내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실례했습니다, 후작님. 마님께서 지금 시각에 깨워 달라고 하셔서요.”

“이 새벽에?”

낮은 대화 소리가 꿈속에 파묻혀 있던 아가사를 일깨웠다. 졸린 눈을 깜빡이며 아가사가 에녹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몇 시예요?”

“아직 새벽녘입니다.”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네요. 요리장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디저트 파티 때문입니까.”

“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잠이 조금 깼다. 아가사가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자 조용히 침대맡에서 대기 중이던 제시가 가운을 걸쳐 주었다.

“먼저 가 볼게요. 당신은 좀 더 주무세요.”

“…….”

빤히 올려다보는 사내를 뒤로하고 아가사가 먼저 침실을 나섰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난 아가사가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

오늘 디저트 파티에 내놓을 디저트의 수량이 어마어마했는데.

문제는 그날 식재료에 따라 맛과 향 등이 달라질 수 있으니 사전에 확인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판도 부지런해야 짤 수 있는 거라니까…….”

“힘내세요, 마님. 오늘만 잘 넘기시면 다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렇겠지?”

제시와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아가사의 뒤로 제1부단장, 레온 타크란과 기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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