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래도 팔라비 섬에서 있었던 일이 궁금하시다면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겠네요.”
일부러 음을 낮추고 말하는 속도를 늘인 후 뒷말을 이었다.
“이번 무역으로 노빌리스와 아라투스는 물론 이 사업에 참여한 모든 이가 큰 이익을 얻게 될 거랍니다. 폐하께서 무척 만족하셨듯이요.”
현재 모든 귀족 가문이 참가하지 못해 안달이 난 투자를 언급하자 숨죽였던 정원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미덴트 남작 부인이 참 뻔한 것을 물어보셨네요.”
“그때 폐하께서 크게 기뻐하셨다고 소문이 파다했었죠.”
그 뒤로는 아가사가 더 이야기를 이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심기를 살피는 이들이 알아서 이야기를 더하고 꾸려 갔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올해 와인은 모두 맛이 좋네요.”
“전 남부 지방에서 올라온 레드 와인을 좀 구매해야겠어요.”
“노빌리스 상단을 통해 들어온 와인이죠?”
“아가사 부인께서 까다롭게 고르셨을 테니 품질은 보증이죠.”
“저도 몇 상자 더 사야겠어요.”
아가사가 잔을 톡, 건드리며 웃었다. 파도가 잠잠해진 바다처럼 마이뉴코르 사절단의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았지만 물밑은 그렇지 않을 터였다.
“와인이 과했나 봐요. 잠깐 정원에서 쉬고 올게요.”
“네, 부인. 다녀오셔요.”
아가사는 함께 온 이자벨을 잠시 얌전해진 부인들 사이에 놓아두고 빠져나왔다. 그녀가 등불이 환한 어느 소파에 자리를 잡자 이리스 부인이 다가왔다.
“미덴트 남작 부인이 네우타에 붙은 정황은 없었어요.”
“그럴 것 같았어요. 원래 좀 무례한 면이 있는 분이었죠.”
마이뉴코르의 사절단에 페르난드 2황자가 끼어 있다는 것이 알음알음 퍼진 모양이었다.
막 일곱 번째 결혼식을 올린 아가사와 그녀의 두 번째 전남편의 등장은 미덴트 남작 부인 같은 이들에겐 즐거운 이야깃거리일 터였다.
‘주의를 조금 줄까.’
뒤에서야 무슨 이야기가 오가든 적당히 눈감아 주는 편이었으나 이번 일은 달랐다.
무려 그녀의 눈앞에서 입을 놀린 것이었으니.
거기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이쯤에서 살짝 눌러 주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가끔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생각하는 이들이 꼭 나오기 마련이라서.
“지금 미덴트 남작가의 자금 흐름이 썩 좋지만은 않죠?”
아가사의 말을 들은 이리스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투자했던 상단이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소식은 들었답니다.”
“저런, 도움이 절실하실 텐데 요즘 그럴 만한 여유가 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가문의 저력이 있으니 얼마간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참 다행한 일이죠.”
노빌리스 상단의 영향력이 닿는 곳에선 미덴트 남작가에 돈을 빌려줄 이가 없을 것이다.
대단한 수단은 아니어도 가벼운 경고 정도는 될 터였다.
아가사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 봐야겠어요.”
에녹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침 시간도 적당히 보낸 터였다.
아가사가 돌아갈 의사를 비치자 오늘 시음회를 주최한 조돌프 자작 부인이 인사를 하러 나왔다.
“벌써 돌아가시려고요?”
“네, 오늘 부인 덕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별말씀을요. 부족한 점도 있었을 텐데 즐거웠다 해 주시니 도리어 제가 기쁜 마음이랍니다.”
“그럼 다음 모임에서 뵙지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달이 울창하다. 움직이는 마차 창 너머로 멍하니 밖을 내다보던 아가사가 눈을 반짝 떴다.
신혼 저택의 정문을 넘어서기 무섭게 저 먼 본저택 앞에 누군가가 보이고 있었다.
남편이다.
“에녹.”
“다녀왔습니까, 아가사.”
아가사는 오늘도 호위로 따라나섰던 제1부단장, 레온이 문을 열어 주자마자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아가사?”
자연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은 사내가 작게 속삭였다. 꼭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당신이 저택에 있으니 좋아요.”
“…….”
긴 숨을 내뱉은 그가 미적지근하게 웃었다.
“늦게까지 기다린 보람이 느껴지는군요.”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뭘까요, 그게.”
아가사는 탄탄한 가슴팍에 턱을 대고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여태 거친 기색이 남은 손이 그녀의 뺨을 가볍게 지분거렸다.
“말해 봐요. 궁금합니다.”
“오늘 살롱에 갔다가 미덴트 남작 부인을 만났거든요.”
“미덴트.”
“내 앞에서 감히 마이뉴코르 제국 사절단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보니 당신에게도 그런 말을 꺼내는 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랬습니까.”
단 설탕처럼 그녀를 응시하던 사내가 천천히 그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아가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 봐요? 일단 미덴트 부인은 처리했어요.”
“잘했습니다.”
다시 시선을 원위치시킨 남자가 나직하게 웃었다.
“이제 당신 차례예요. 혹시 감히 당신에게 뭐라고 하는 자가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있어도 없게 했고.”
정말인가?
아가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에녹을 응시했다. 약간 취기가 올라왔는지 조금 멍한 기분이었다.
등을 토닥이던 손이 내려가더니, 어느새 에녹이 그녀를 훌쩍 안아 들었다.
“추우니까 우선 들어가서 마저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목욕실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좋아요.”
그 밤은 좀 더 덥게 보냈던 것도 같다. 아침에 일어난 아가사는 간밤의 대화를 떠올리고 이마를 짚었다가 애써 긍정했다.
일단 에녹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아가사가 손을 쓴 이후 다시는 그녀의 앞에서 마이뉴코르 사절단에 관해 묻는 이는 없었다.
미덴트 남작 가문을 통해 전한 경고가 사교계 전체에도 잘 알려진 덕이었다.
단풍이 지기 시작한 가을.
가을 사교계가 열리고 날아든 가장 큰 소식은 역시나 마이뉴코르 제국 측에서 파견한 사절단의 등장이었다.
가을을 맞아 수도 아라투스 저택과 신혼 저택을 비롯해 노빌리스 제1, 제3저택까지 새 단장을 진행하고 있던 아가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에 서류를 내려놨다.
“왔나 보네.”
“지금 막 성문을 통과했을 겁니다.”
앞에서 저택 단장 상황을 보고하고 있던 제1보좌관, 에셀이 입을 열었다.
한숨을 내쉴 찰나.
똑똑, 공손한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측근 하녀, 제시가 예를 갖췄다.
“다녀왔습니다, 마님.”
사절단이 올 시각에 맞춰 성문 근처로 보냈던 하녀가 돌아온 것이다.
“어땠니?”
“사절단이 들어오고 있어서 대로에 꽃을 뿌리고 있었어요. 그 선두에 2황자 저하께서 계셨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끄러워지겠구나.”
고작 두 번째 전남편이 온다는 소문에도 사교계가 들썩였었다.
경고야 해 두었다지만 이제 실물이 등장했으니 얼마나 난리일지.
네우타 쪽도 신경 써야 했던 터라 썩 좋은 타이밍의 등장은 아니었다.
“저, 그런데요, 마님.”
“응?”
내내 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던 제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는 길에 새로운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슨 소문을 들었는데?”
“사절단에 2황자 저하의 아드님이 계신다고 합니다.”
“뭐?”
당황한 아가사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제시는 아가사의 두 번째 결혼 생활에서도 함께했었던 만큼 페르난드의 아들, 그러니까 아단 마이뉴를 본 적이 있었다.
“네 눈으로도 확인했고?”
“예, 사절단의 끄트머리에서 보았습니다.”
록스바드로 오면서 황손을 데려왔다고?
“세상에.”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아가사는 머리가 아파졌다. 솔직히 페르난드가 제 아들을 데리고 뭘 하든 알 바는 아니었으나 록스바드로 데리고 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사절단에 동행한 것을 보면 황손의 나이는 대충 성인은 넘었을 것이다.
아마 열여섯 살쯤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설마 여기서 신붓감이라도 찾으러 온 건 아니겠지.’
순간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지워 버린 아가사가 고개를 저었다.
사교계는 물론 수도 전체가 한층 더 시끄러워질 터.
“에셀. 2황자가 무슨 의도로 황손을 데려왔는지 알아보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비가 충분할수록 충격도 줄어드는 법이었다.
‘네우타 쪽을 더 신경 써서 살펴야겠어.’
더불어 사교계의 동향도.
아가사는 즉시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수신인은 이리스 부인과 마담 샬레트였다.
* * *
마이뉴코르 제국에서 파견한 사절단은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록스바드 제국의 수도로 진입했다.
아가사 노빌리스와 혼인했었지만 황자인 페르난드가 록스바드 제국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록스바드의 황제를 알현할 때까지 줄곧 아가사가 있나 찾아보던 페르난드는 웅장하게 울리는 뿔 나팔 소리에 예를 갖췄다.
“록스바드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록스바드 제국 황제, 워밀라이 2세의 등장이었다.
“록스바드에 온 것을 환영하네, 페르난드 2황자.”
“황공하옵니다.”
백금발에 푸른 눈.
중년의 황제는 아가사와 가까운 혈족답게 제법 닮은 구석이 있었다.
페르난드의 눈짓을 받은 마이뉴코르 제국 측 실무자 대표, 몬티올 백작이 마이뉴코르 제국 황제의 서신을 공손히 받쳐 올렸다.
“마이뉴코르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폐하께 안부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는 그 서신입니다.”
시종장을 통해 그 서신을 받아 본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협정은 그대로 이행될 모양이군. 곧 환영 무도회가 열릴 것이니 그때까지 푹 쉬게, 2황자.”
“황공하옵니다.”
황제의 시선이 찰나 사절단 사이에 있던, 페르난드와 닮은 청년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미세하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펴졌으나 그를 눈치챈 이는 황제와 가까이 있던 시종장과 근위대장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