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흡족한 얼굴로 시종장에게 포로들을 인수해 오라, 명한 황제가 물었다.
“그래. 가을 사교계 준비는 잘하고 있느냐?”
“그럼요. 충분합니다, 폐하.”
설마 또 황궁 무도회 준비를 도우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동안 결혼과 이혼, 상속과 궁정 관련 문제를 제외하면 크게 관심이 없었던 황제였다. 뜬금없는 서두에 의심이 불쑥 솟았다.
느릿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황제가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였다.
“마이뉴코르 제국에서 곧 사절단을 보낸다는구나.”
아가사는 본능적으로 오늘 황제와 오찬을 함께한 자가 마이뉴코르 제국 측 사신임을 알아챘다.
“사절단 명단에 페르난드 마이늄콘티 제2황자가 있나요?”
대답은 없었다.
“들어 있군요.”
그럴 줄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인선이었다.
옆에서 에녹의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가사의 표정이 좋지 못하자 황제가 그녀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환영 무도회에 참석하기로 한 건 잊지 않았지?”
사절단을 맞지 않기로 한 대신 무도회에는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아가사는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약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남편과 함께요.”
달았던 단서를 덧붙이자 황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느니라.”
그 약속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도 이 자리의 목적 중 하나였던 모양이었다.
사정을 대강 알아챈 에녹이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 훈훈하던 정자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큼, 작게 헛기침한 황제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짐이 있으니 2황자도 전처럼 굴지는 못할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감히 폐하 앞에서 그런 짓을 하면 폐하께서 그자를 가만두시겠어요?”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러니 너는 그동안 아라투스 후작과 우애를 다지는 것에만 힘쓰거라. 내, 약속대로 후작에게 힘도 실어 주고 일찍 귀가도 시켜 줄 것이니. 응?”
다시 옆에서 에녹의 시선이 느껴졌다. 앞선 것보다 더욱 진해진 시선이었다.
아가사는 절대 옆으로 돌아보지 않으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겠어요, 폐하.”
“그래, 그래. 짐이 기대하고 있느니라.”
황제의 다과 시간은 짧았기에 자리는 금방 파했다. 에녹과 함께 황제 궁을 나서던 아가사는 집요한 시선에 못 이겨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하셔도 돼요.”
“마지막에 폐하와 나눴던 말은 뭐였습니까.”
에녹이 득달같이 입을 열었다.
“지난 회담을 다녀온 이후에 했던 약속이에요. 사절단을 맞지 않는 대신 환영 무도회에는 참석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그것 말고.”
회피를 시도해 봤으나 먹히지 않았다. 귀족적 소양이 뛰어난 남자인 만큼 그는 이미 그 이면에 깔린 계산과 거래를 눈치채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오늘 그대가 아침에 한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만.”
-폐하께서 자주 그대를 부르셨나 봅니다.
-가끔? 황태자 전하께서 폐하의 생각을 알려 주셔서 잘 빠져나왔어요. 음, 폐하께서 당분간 당신을 빨리 퇴청시켜 주시고자 노력하실지도 몰라요.
-……거기서 오간 대화는 상상이 안 되는데.
-모르셔도 괜찮으실 거예요. 그리고, 참.
아가사는 그렇게 말하며 화제를 돌렸었다. 그런데 그 아침의 대화가 조금 전, 황제와의 대화로 이어지고 있었다.
“…….”
침묵하던 아가사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어느덧 복도 벽까지 물러선 그녀의 귓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정말 몰라도 되는 내용이 맞습니까.”
시야를 가리며 바짝 맞붙은 사내의 낮은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짙은 시선 아래 노출된 그녀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전하께 들으니 폐하께서 황가의 일과 엮으려는 이유는 이제 안정을 원해서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말씀드렸어요. 당신이 수도에 있었으면 후계가 생겨도 진작 생겼을 거라고요.”
“…….”
“사실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당신이 돌아왔으니 언제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뺨이 불타는 기분에 아가사는 고개마저 옆으로 돌렸다. 서서히 아래로 내려선 사내의 긴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방금 그 말, 내 뜻대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신사답게 물러서는 건 어젯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찰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아가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런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직한 음성에 얕은 흥분과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내가 그대로 손등 깊숙이 입을 맞추며 눈을 빛냈다. 어둑하게 가라앉은 회잿빛 눈동자가 진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뻔한 아가사가 간신히 이성을 잡아챘다.
“……우리 의상실에 가기로 했잖아요.”
“그럼 그것만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뺨에 입을 맞춘 사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팽팽하던 긴장이 일시에 이완되는 기분이었다.
짧은 숨을 토해 내는 아가사의 손바닥 아래로 사내의 손이 얽혀 들었다.
“갈까요.”
아가사는 에녹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황제 궁을 벗어났다.
의상실로 가는 마차 안에서 그는 조금 전과 달리 담백하게 웃으며 가는 길에 옷을 더 맞추겠느냐, 물어보았다.
“응. 좋을 것 같아요.”
“가는 김에 장신구도 더 맞추는 게 좋겠습니다.”
언제나처럼 마담 샬레트의 환대를 받으며 의상실에 도착한 아가사는 에녹 몰래 황금 토파즈로 장식된 술을 골랐다.
검 손잡이 아래 다는 것으로 청색 수실이 달린 것이 그와 제 머리카락 색을 합친 것 같았다.
해가 저물기 전, 저택으로 돌아온 아가사는 내실 앞에 선 그에게 조금 전에 고른 토파즈 술을 내밀었다.
“이 귀걸이에 대한 답례예요.”
귀걸이가 잘 보이도록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웃은 순간.
그대로 입술을 겹친 사내가 아가사를 안고 내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튿날은 고생한 기사들을 위한 날이었다.
“제2부단장, 휴버 카르웬, 앞으로.”
에녹은 수도 아라투스 저택의 연무장에서 전장에서 활약을 한 기사들을 호명해 치하했다.
어마어마한 포상금과 새 검과 갑주, 말, 훈장 등을 상으로 내리고 교대로 누릴 수 있는 휴가까지 주어졌으니.
주군의 인정과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은 기사단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일동, 묵념.”
마지막은 죽은 기사단원과 병사들을 위한 추모식이었다.
아라투스 영지와 노빌리스 영지에서도 포상과 추모식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터.
집안일을 잘 처리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가을 사교계를 잘 보내는 것이었다.
가을 사교계가 시작되었다.
황실 무도회가 열리기 전이었지만 가을 정취를 즐기는 모임이 생기고 선선해진 저녁 무렵 새 가을 드레스를 뽐내는 자리가 생겨났다.
아가사가 오늘 참석한 자리도 그런 자리로 늦은 저녁 야외에서 열리는 와인 시음회였다.
참가한 귀부인들은 누구나 소매가 손등까지 내려오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얇은 망토를 걸친 채 와인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와인을 마신 뺨들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참, 그 말씀 들으셨어요?”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마이뉴코르에서 사절단이 온대요. 재상께서 사절단을 맞으러 국경까지 나가셨다더군요.”
“저도 그 소식은 들었어요.”
은은한 술 냄새와 함께 가을 사교계를 함께할 마이뉴코르 사절단 이야기도 함께 번져 갔다.
아가사의 곁에서 와인 잔을 들고 있던 이자벨이 그 말을 듣고 속삭였다.
“팔라비 섬에서의 협상과 관계된 일이죠?”
“맞아요.”
비밀도 아니었으니 이자벨이 알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데뷔도 하지 못한 이자벨이 아는 일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아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벌써 와인을 일곱 잔이나 마신 미덴트 남작 부인이 여덟 번째 잔을 들고 아가사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라투스 후작 부인.”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그녀가 상당히 취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듯했다.
“팔라비 섬에서 있었던 일을 좀 들려주세요. 이번에 오는 사절단과 이미 안면이 있으시죠?”
그러나 반짝이는 두 눈과 발음이 또렷한 것이 어찌 보면 또 멀쩡한 상태인 듯도 했다.
“첫 가을 무도회가 사절단의 환영 무도회를 겸한다던데 어떤 분들이 오시는지 알고 싶네요.”
아가사는 미덴트 남작 부인의 질문을 듣고선 작게 웃었다.
수작이 빤히 보였지만 어쩔까, 싶기도 하고.
미덴트 부인이 살짝 긴장한 손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주변에서도 와인을 즐기는 척, 은근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아가사가 잔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이번에 오는 사절단이 팔라비 섬에 왔던 사절단과 같은 이들인지는 모르겠네요.”
“아, 무, 물론 그러시겠지요. 아무렴요.”
이성이 돌아온 미덴트 부인이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아가사가 한껏 치솟은 귀부인들의 관심에 응하듯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번엔 제가 사절단을 맡아 일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어서요.”
“호호호. 그렇죠.”
“사절단의 구성 같은 문제까지 제가 다 신경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마지막으로 시선이 정착한 곳은 미덴트 남작 부인이었다.
“안 그런가요? 미덴트 남작 부인.”
“그, 럼요. 아라투스 후작 부인.”
적대 파벌은 물론 중립 파벌도 아가사와 대놓고 맞서는 것은 기피하였으나.
아주 가끔 저 자신을 억누르지 못하고 꼭 한 번씩 사고를 치는 이들이 있었다.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