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대목욕탕을 준비해 두었으니 기사님들은 하인들을 따라 움직여 주십시오.”
총집사, 알렌의 요청에 하인들에게 말고삐를 넘긴 기사들이 앞다투어 별채로 이동했다.
‘고기부터 찾다니 진짜 레온 경의 말이 맞았구나.’
연회는 걱정 없을 듯했다.
“그대가 미리 준비해 준 덕에 한시름 덜었군요.”
아가사를 말에서 내려 준 에녹이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뭘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어요.”
“그렇습니까.”
에녹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가사는 그의 손을 잡고 본저택으로 이끌었다. 반대쪽 손은 알렌을 부르고 있었다.
“알렌. 알렌이 에녹의 시중을 들어 주었으면 좋겠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물론입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난감한 얼굴이었지만 그는 순순히 목욕실까지 따라왔다.
“씻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알렌과 하인들이 에녹의 뒤를 따라 들어섰다.
마음 같아서야 여기에서 지키고 서 있고 싶었지만.
아가사는 서둘러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측근 하녀와 집사, 하인들이며 기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연회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음식 준비는.”
“완벽합니다. 요리는 기사분들이 입장 즉시 드실 수 있도록 준비 중이고 술통도 테이블 사이에 개봉해서 빈틈없이 가져다 두었습니다.”
“좋아. 다른 건?”
“밤새 교대할 수 있도록 제2, 제3의 악단 모두 대기 중입니다. 묘기꾼도 여럿 불러 두었습니다.”
“완벽하네. 전부 유쾌한 악곡만 연주하라고 하고.”
“예, 마님.”
신호를 받은 주방에서 테이블마다 요리를 그득그득 채웠다.
곧 목욕을 마친 기사들이 1층의 연회 홀로 쏟아져 들어왔다.
한쪽 구석에서는 악단이 유쾌한 음을 뜯고 있었고.
곳곳에서 묘기꾼이 등장했으며.
연회장 중앙에는 화덕이 놓이고 통돼지며 사슴 등의 각종 구이가 돌아가고 있었다.
“으하하! 대단한데!”
“와, 흑맥주가 통으로 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백의 기사들이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통상적인 연회와 달리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기사들이었다.
격식 따위는 없었다. 먹고 마시고 소리 지르고 울 뿐.
“음…….”
생전 처음 보는 기사들의 연회는 듣던 것보다 낯선 형태였다.
소문에 과장이 섞였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달까.
뒤에 선 제1부단장, 레온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님.”
“그러게요.”
에녹이 들어온 것은 한창 연회가 절정으로 달아올랐을 때였다.
“이곳에 있었습니까.”
영주가 입장했지만 신경 쓰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쯤에는 아가사도 이 기묘한 연회에 적응했던지라 뒤따라 들어온 집사장, 알렌에게 먼저 시선을 주었다.
알렌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일단, 안주인이니까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니었습니까.”
그가 옆자리에 자연스레 앉으며 말을 걸었다.
“음, 보시다시피요.”
상석 아래 연회 홀을 점령한 기사들은 저들끼리 취하며 전장의 여파를 풀어내고 있었다.
정말 술과 고기만 있으면 족한 자리였다.
목욕을 마친 에녹도 미미하게 나른한 낯이었다.
가볍게 포도주부터 들이켠 그가 다른 기사들처럼 고기를 집었다. 격식 없이 벌어진 흰 셔츠 사이로 백금줄이 보였다.
그녀가 골라 보냈던 짙은 회색빛의 연수정 목걸이였다.
아가사는 무의식중에 팔목에 걸린 자줏빛 사파이어 팔찌를 매만졌다. 그가 선물했던 것이었다.
“팔찌는 마음에 드십니까.”
“응. 예뻐요.”
그가 툭, 목걸이를 건드리며 웃었다. 저도 그렇다는 듯이.
결국 아가사는 에녹이 자리를 비울 때까지 연회 홀을 지키다가 그와 함께 새벽녘에 4층으로 올라갔다.
각자의 공간이 갈리는 중앙 복도에서 멈춰 선 그가 지그시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내일 아침 식사를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응. 시간 맞춰서 내려갈게요.”
뺨에도 입을 맞춘 사내가 웃으며 돌아섰다.
비로소 전쟁의 끝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아가사는 조찬장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며 제1보좌관, 에셀 마스로에게 전장의 사후 처리 보고를 받았다.
“전부 지하 감옥에 가둬 두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몇이라도 죽거나 일부 그가 처형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황제의 정식 재가를 얻을 생각인지 에녹은 다섯 가문 일가를 모두 사로잡아 데려온 상태였다.
‘쉽지 않았겠지.’
스스로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얼마나 수고했는지 등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가 했을 노력이 훤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폐하께 재판 청원서를 올려야겠어요.”
“예. 준비하겠습니다.”
땅의 통치권은 노빌리스, 그러니까 상속자인 아가사에게로.
다섯 가문에서 모아 둔 재물은 아라투스에게로 귀속될 것이다.
노빌리스 가문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가주가 없었으나 영지의 회수를 주장할 상속자는 있었으니 나올 수 있는 판결이었다.
“마님. 조찬이 준비되었습니다.”
“응. 내려갈게.”
그 자리에서 쓰인 상소가 곧장 궁내부로 올려졌다.
이어서 단장을 끝낸 아가사가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래간만에 개방한 테라스 안의 원형 테이블에 먼저 자리 잡은 인영이 보였다.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어 앉은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난간 너머의 정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차갑게 굳은 눈매와 굳게 다물린 입술, 미세하게 흘러나온 기세가 순식간에 달라진 것은 저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였다.
서서히 현실감을 입는 사람처럼.
확연히 누그러진 사내가 명백히 두 눈에 애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사.”
멍하니 서 있던 아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에녹.”
그가 빼 준 의자에 앉아 아가사는 근 두어 달 만에 에녹과 가까이 마주한 채로 식사 자리를 가졌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울렸지만 전과 다른 아늑함이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에녹이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침에 파발이 나서는 것 같았습니다만.”
“네. 아침에 보좌관에게 당신이 포로들을 모두 지하 감옥에 가둬 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폐하의 재가를 받아 비공개 처형식을 열까 하는데 어떠세요?”
“가장 깔끔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고려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보며 사내가 미미하게 웃었다.
“여전하군요, 아가사.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택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더니, 라고 뒤에 붙인 말은 귀가 예민한 기사들밖에 들은 이가 없었다.
아가사가 뿌듯하게 웃으며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가을 사교계 준비를 했어요. 역시 이번 시즌에 네우타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간 살롱을 열고 네우타와 다른 가문 간의 연결 고리를 찾았답니다.”
“바빴겠군요.”
“아, 폐하께서 황궁 무도회를 도우라 말씀하셨지만 그건 거절했어요. 황족이랑 깊이 엮이는 건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라.”
“폐하께서 자주 그대를 부르셨나 봅니다.”
“가끔? 황태자 전하께서 폐하의 생각을 알려 주셔서 잘 빠져나왔어요. 음, 폐하께서 당분간 당신을 빨리 퇴청시켜 주고자 노력하실지도 몰라요.”
“……거기서 오간 대화는 상상이 안 되는데.”
“모르셔도 괜찮으실 거예요. 그리고, 참.”
아가사의 눈짓을 받은 측근 하녀가 오늘 도착한 서신들을 테이블 중앙에 놓아두었다.
거의 작은 산처럼 쌓인 서신들 가운데 아라투스 방계 가문의 문장으로 봉한 편지가 한 줌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약속을 어긴 건 아니에요. 서신도 열어 보지 않았고 일절 만나지도 않았거든요.”
주변 영지에 압박을 넣어 고립시키고 노빌리스 상단을 통해 이번 일에 가담한 친족 가문의 경제권을 틀어쥐었노라고, 작게 고백한 아가사가 수줍게 웃었다.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답니다.”
“…….”
이제 두 번 다시 아라투스의 친족들은 에녹에게 대서지 못하겠지.
그럴 만한 여유도 없도록 자금을 모두 이쪽 손아귀에 쥐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여전히 아가사의 밀착 호위를 수행 중인 제1부단장, 레온 타크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온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혹, 또 있습니까.”
“이제 가을 사교계가 열리잖아요. 사냥 대회도 심심찮게 열리고 황궁 무도회며 각종 행사가 예정되어 있으니 옷이 필요할 것 같아서 원단과 보석을 구해 두었어요. 당신 취향에 맞춰서 도안도 골라 두었으니 같이 치수를 맞추러 가고 싶어요, 에녹.”
딱 좋을 때였다. 에녹의 귀환이 더 늦었다간 가을 사교계의 시작을 놓쳤을 터.
어쩌면 아가사 혼자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에녹이 마른 입술을 쓸어내렸다.
“……알겠습니다. 가야겠군요. 그대가 힘들게 골라 둔 것이니.”
“네. 의상실에 전갈을 보내 둘게요.”
분위기가 한창 훈훈해지고 있는데 집사, 알렌이 들어와 소식을 전했다.
“후작님. 마님. 황궁에서 사신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