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소원대로 죽여 주마.”
간신히 욱신거리는 몸을 수습해 앉은 아가사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높이 검을 쳐드는 침입자를 보았지만 반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도를 쥔 손을 가만히 늘어뜨린 채 눈을 감은 순간.
촤악-
뭔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얼굴 위로 뜨거운 것이 흩뿌려졌다.
아가사가 눈을 떴을 때 어둡던 침실은 뜯긴 커튼과 활짝 열린 테라스 문 너머의 달빛으로 환하게 밝혀진 지 오래였다.
허물어지는 침입자의 몸 뒤로 그보다 한 뼘은 더 크고 굵은 형체가 서 있었다.
잔뜩 흐트러진 짧은 청색 머리칼과 서늘하게 굳은 회색 눈.
피 묻은 장검을 쥔 에녹이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그대로 허물어진 자의 목을 짓밟은 그가 피에 젖은 그녀의 뺨을 쓸었다. 사내의 숨이 거칠었다.
“주, 죽여!”
에녹이 뒤돌아섰다. 침입자 여섯을 상대로 단칼에 목을 쳐 내며 압도적으로 찍어 누른 사내는 돌아와 다시 허물어진 자의 목을 짓밟았다.
“왜 그랬습니까.”
콰득……!
뼈가 부서지는 소리에 아가사는 그제야 흠칫,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망연히 올려다본 그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이자를 자극했습니까. 그대라면 적당히 요구 사항을 들어주면서 지원을 기다리는 게 낫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요. 내 일에 상관하지 말아요.”
간신히 입을 연 순간 사내의 숨이 다시 한번 거칠어졌다.
“원래는 그대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어떻게든 참으면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
“이건 아닙니다. 내가 그대가 죽는 걸 두고 보고만 있을 것 같습니까.”
이를 악문 사내의 음성은 갈퀴로 긁은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아가사는 아프게 일그러진 에녹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왜 이제 와서야.
“……그런 말은 당신 연인에게나 가서 하세요. 저는 필요 없으니.”
“연인? 나는 당신의 전남편들과 다르다고 했잖습니까.”
“아니면 내가 아직 필요해서 그래요? 내가 ‘노빌리스’라서?”
선연한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어 버릴 듯 응시했다.
아가사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를 살폈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마주한 사내는 강인한 모습과 달리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살이 내려 베일 듯 날카로워진 턱과 여윈 뺨.
지끈거리는 가슴의 통증을 피하려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준 순간 그가 입을 꽉 다물었다 열었다.
“좋아합니다.”
“……!”
“내 인생에 마음을 준 여자는 그대 하나뿐이었어.”
놀란 아가사가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마른 눈가를 짚었다.
“……이제 와 내게 이런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회에 당신의 친족들을 처단하겠습니다. 그러니.”
철그렁, 아무렇게나 검을 내던진 남자가 아가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단검은 놓고, 이리 오십시오, 아가사.”
거기서 사람 미치게 만들지 말고.
마지막에 바람처럼 들린, 그답지 않은 거친 말이 고막을 훑었다.
아가사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 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그가 뭐라고 했더라.
희망과 기대와 의심과 혼란으로 범벅된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가사는 손에서 단검을 놓았다. 챙, 단검이 튕겨 나가는 소리가 울리고 질척한 붉은 바닥에서 자진하여 움직일 때까지 그는 그저 손을 내민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저가 스스로 와야 한다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자 에녹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품에 안았다. 무자비하게 침입자들을 베었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그대를 상처 입혔습니까. 죽고 싶을 만큼.”
“……침입자의 비위를 맞추기 싫었던 것뿐이에요. 방금 한 이야기나 계속해 주세요.”
아가사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눈앞에 있는 군 제복 상의와 손에 닿은 천 부분이 조금 해져 있었다.
피야 그렇다 쳐도 가볍게 침입자들을 찍어 누른 사내의 장식이며 옷이 왜 헐었을까.
아가사가 문득 열린 테라스에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에스더는 친족들이 내 후계를 가지라고 보낸 여자였습니다.”
“……!”
“내가 3년이나 죽지 않고 버텨 내고 있으니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흔한 일이었다. 아가사만 해도 납치해서 후계를 가져 보려는 이들이 넘쳐 나지 않나.
아가사는 반사적으로 에녹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사내는 쉽게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에녹.”
“몰락 귀족 출신에 오갈 곳 없는 고아였습니다. 죽어도 상관없는 여자를 골라 보낸 거였는데…….”
“에녹.”
“필사적으로 곁에 있게 해 달라고, 좋아해 달라고 매달리는 여자를 보고 그래, 네게 무슨 죄가 있겠나 생각해서 전쟁터에 있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좋아하진 않았지만 책임은 질 생각이었지.”
곧 죽을 수도 있는 판에 목숨 하나 더 얹는 것, 상관없다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무려 10년이나 지속되었던 대규모 점령전이었다.
눈앞에 그의 상황이 그려지는 기분에 아가사는 아득해졌지만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녹!”
“이제야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겁니까.”
그의 이름을 제대로 입에 담은 것도 거의 며칠 만이었다.
탁, 막힌 숨을 뱉어 낸 에녹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여자와 그대를 겹쳐 봐서 미안합니다. 그대가 좋아해 달라, 이야기하는데 그 당시에는 그대의 고백이 아니라 그 여자가 했던 배신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 여자가 당신에게 해를 끼쳤나요?”
“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내게 독을 먹이고 도망쳤습니다. 곧 죽을 것 같은 후계자보다야 내 친족들의 보상이 더 좋은 선택이었겠지.”
느리게 고개를 튼 사내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러고 그의 앞에 또 나타났다고.
아가사는 갑자기 치민 분노로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왜 말을 안 했어요!”
“말하려고 했습니다. 에스더와 다시 만나고 나니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알겠더군요.”
낮게 웃은 사내가 그 전에는 이상하게 과거 이야기를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노라, 속삭였다. 아가사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그 여자가 뭐라고 했어요?”
“궁금하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고개를 번쩍 쳐드는 아가사를 품에 꽉 끌어안으며 에녹이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지금은 대강 정리를 끝내 두었습니다. 7년 전 일과 지금 일을 사주한 친족들도 처리했고 그 여자도 곧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죗값을 받게 될 겁니다.”
“읏.”
“그러니 화내지 말아요.”
며칠 전, 아라투스 기사단이 움직인 것이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주의 깊게 살폈으면 알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때는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아가사는 이제라도 한 손 거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7년 전에도 모자라 지금도 뻔뻔하게 이런 일을 계획한 자들도, 나머지 친족들도 가만 놔둘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참에 가문 내부 정리를 할 거예요.”
“그대가 아라투스 가문의 안주인이니, 무엇을 한다 해도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할 겁니다.”
아가사가 조용히 에녹의 품속으로 파고들었을 때였다.
쾅!
저 멀리 있던 내실 문이 거세게 열렸다. 깜짝 놀란 아가사가 에녹을 꼭 붙들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쏟아져 들어온 이들은 제1부단장, 레온 타크란과 아라투스의 기사들이었다.
“레온 경.”
무사한 아가사를 보고 안심하던 레온은 곧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사는 문득 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인지했다. 얼른 에녹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고.”
머뭇거리던 레온이 못 본 척 제 할 일에 집중했다.
이럴 수가.
아가사는 조금 배신감을 느꼈다.
“침입자 150명 중 절반은 죽었고 절반은 사로잡았습니다. 일단 외부에서 지휘하던 자도 잡긴 했습니다만…….”
레온이 엉망인 침실에 시선을 주었다. 침실 내부로 침입한 자들 중 생존자는 없었다.
“포로들은.”
“일단 지하 감옥에 가둬 두었습니다.”
“심문할 수 있는 상태인가?”
온화한 부단장이 처음 보는 낯으로 웃었다.
“풀어 주면 제국 횡단도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행이로군. 수고했다, 레온.”
배후를 뱉어 내게 하려면 긴 심문이 필요할 터.
생생한 포로는 이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아가사가 그의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사이 레온이 주변 정리를 명하며 물었다.
“그런데 휴버는 어디 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주군. 휴버도 주군처럼 벽을 타고 올라간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군요.”
“네?”
깜짝 놀란 아가사가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모를 침입자를 방어하기 위해 4층 근처에는 발코니나 테라스는 물론 벽에 발 디딜 곳도 없이 수리된 곳이 신혼 저택이었다.
“당신 벽을 타고 올라왔어요?”
위험하게?
“음…….”
그가 약간 곤란해하며 시선을 피할 찰나.
활짝 열린 테라스에서 슬금슬금 나타나는 인영이 있었다.
아라투스 기사단의 제2부단장인 휴버 카르웬과 기사들이었다.
“그, 나 여기 있다, 레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