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에스더 포르토니는 순식간에 모여든 귀족들 뒤로 물러섰다. 멀어지는 창가 너머로 이미 사라지고 없는 두 인영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중에서도 에스더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초췌한 기색의 사내였다.
익숙한 청색 머리칼과 낯선 흉터가 생겼지만 여전히 수려한 얼굴.
‘……에녹 님.’
죽을 줄 알았던 사내가 살아남아 전쟁 영웅이 되어 귀환했다.
대륙 최고의 신붓감과 결혼하고 제 손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했던 사내는 수도에 자자한 핑크빛 소문과 달리 안색이 썩 좋지 못했다.
‘부부 사이가 좋다고 했던 건 헛소문이었을까?’
에스더의 머릿속에 얼마 전 접촉해 온 아라투스의 방계 혈족 하나가 떠올랐다.
대처 남작이라고 했던가.
-가주와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은 없습니까?
-솔직히 가주가 부인을 가만히 놔둔 이유가 뭐겠습니까. 아직 미련이 있어서지.
-이번에도 우리는 부인의 일을 최선을 다해 조력할 겁니다. 어쩌면 가주의 애인이 되는 것을 넘어, 이번에야말로 후작 부인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전의 아라투스 후작의 모습을 보고 나니 에스더의 마음속에도 자그마한 용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염치없지만, 그분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 있어.’
원래 귀족은 결혼 따로, 연애 따로인 인종이었다.
그 과정에서 에녹을 해하려 들었던 자들과 다시 손을 잡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이 끝나면 버려도 되는 거지.”
부채를 펼쳐 들며 에스더가 싸늘하게 읊조렸다.
“응? 에스더 부인.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인.”
이번 기회에 그 당시 일이 친족들이 계획했던 일이라는 것을 밝히고 그에게 용서를 구해도 좋을 것 같았다.
‘저택에 돌아가면 대처 남작에게 연통을 보내야지.’
에스더는 아름답게 꾸며진 고풍스러운 저택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수도에 이렇게 멋진 저택을 가진 명문가의 진정한 안주인이 어쩌면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 * *
첫 번째 티 파티 이후 아가사는 아라투스 저택에서 간이 살롱을 열었다.
경매를 열어 저택에 필요한 그림과 조각, 술 등을 사들였고 예술에 조예가 깊은 귀족들의 참석을 유도했다.
예술에 관심이 없는 귀족들을 위해 체스나 카드 게임을 하기도 했고 평범하게 티타임을 가지기도 했다.
오늘은 특별히 초대장이 없어도 저택을 방문할 수 있도록 저택 1층을 개방한 두 번째 날이었다.
“어머. 저택이 생각보다 더 아름답군요.”
“유서 깊은 가문 특유의 예스러움이 느껴져요. 후작 부인이 수도에 귀환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텐데. 아라투스가는 가문 내부에 문제가 많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나 보죠. 아라투스가는 명문가잖아요. 역사가 제국 건국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들은 것 같아요.”
이자벨 아라투스는 본저택 1층을 구경하며 소곤거리는 귀족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녀는 이 몇 주 사이, 가문의 변화를 한 몸에 느끼고 있었다.
오라비는 여전히 전쟁 영웅이자 제국 최고의 기사였고 저택은 크게 변한 것 없이 수리만 했을 뿐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바닥까지 추락했던 가문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었다.
이자벨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변화가, 아가사 노빌리스가 나서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복도를 벗어나자 본저택 정원에서 티타임과 독서, 담소와 체스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보였다.
그 중심에서 집사, 벤이 건네준 서류를 결재하며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아가사가 그녀를 발견했다.
“어서 오세요, 이자벨.”
“어머. 아라투스 영애. 오늘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같이 차 한잔 어떠세요?”
물끄러미 아가사를 응시하던 이자벨은 사교계의 거물들이 내준 자리로 이동했다.
아가사의 바로 옆, 두 번째 상석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른쪽 카우치였다.
“다들 혹시 네우타 상단에 관련된 소식 들어 보셨나요?”
그때 이리스 도뮤니아 후작 부인이 흥미로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새로 가을 사교계에서 쓸 원단을 출시했다는 것 말인가요? 그것, 반응이 썩 좋지 않다고 하던데요.”
귀부인과 영애들이 두 눈에 웃음을 머금었다. 알음알음 그 이유가 유명했던 탓이었다.
“아가사 부인의 선택을 받지 못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색이 너무 중후하긴 했어요. 음, 나이가 지긋하신 귀부인들의 취향에는 어느 정도 부합한 것 같았지만요.”
“그분께서 고르셨을 테니 무리는 아니죠. 그러니까, 네우타 가문에 계시는 그분들 중 가장 큰 어른이신 분 말이에요.”
아가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딱히 그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귀부인들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가사 부인. 그분들은 아마 가을 사교계 때 복귀하실 것 같아요.”
“그럴 거예요. 그분들은 자신들이 쓸 원단은 직접 들여오는 것을 즐기시거든요.”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찻잔을 내려놓은 아가사가 적당한 평을 내놓았다.
“뭐, 질은 괜찮았지만 색이 썩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사감은 없지만 오랜만에 야심차게 내놓았을 새 상품이 잘 안 되었다니 조금 안타깝네요. 물론 이제 저와는 상관없는 분들의 상단이지만 말이에요.”
“호호호. 아가사 부인도, 참.”
그 뒤로도 사교계의 주요 소식이 줄을 이었다.
아가사가 간간이 반응하며 마지막 서류를 결재했을 즈음 집사, 벤이 나타났다. 이번에 가져온 것은 서류가 아니었다.
“마님. 주인님께서 오셨습니다.”
오늘은 아가사가 후원하는 애브룸 악단에서 여는 첫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약속대로 에녹이 아가사를 데리러 온 것이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여러분.”
“어머, 부인.”
아가사가 갈 채비를 하자 곳곳에서 아쉬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신혼의 아라투스 후작 부인을 적극적으로 붙잡는 손님은 없었다.
“오래간만에 남편과 함께 연주회에 가려고요. 후원하던 악단의 첫 공연이 열리는 날이거든요.”
“그런 일정이 있으셨군요.”
“그리고 이자벨 영애도 여러분과 친해질 시간을 가지면 좋지 않겠어요?”
“물론 아라투스 영애와 친분을 다지는 시간도 즐거운 일이지요. 호호호.”
이후의 시간은 이자벨 아라투스의 몫이었다.
몇 번의 간이 살롱을 거치며 여유가 생긴 이자벨이 웃으며 그녀를 배웅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아가사 부인. 마무리는 제가 잘하고 있을게요.”
“그럼요. 내일 봐요, 이자벨.”
손님들과 인사를 나눈 뒤 아가사는 집사, 벤을 앞세워 정원을 벗어났다.
저택 1층을 관람 중인 방문객들과 간간이 인사를 나누며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본저택 앞에 선 남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에녹.”
며칠 사이, 살이 조금 내린 사내가 살짝 누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반겨 주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그 손등에 입을 맞추고.
“가요.”
아가사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마차 문이 열렸다.
그대로 제 손을 받쳐 주는 그의 손에 의지해 마차에 올랐다.
뒤따라 그가 오르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은 마차가 출발했다. 햇빛과 등불로 밝은 마차 내부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먼저 신혼 저택으로 돌아가서 연주회에 걸맞게 단장을 마치고 나온 아가사는 에녹과 함께 아르망드 홀로 향했다.
수도에서 가장 큰 전당, 아르망드 홀 앞에는 예술 사업에 관심이 있는 귀족들은 물론 사교계에서 위명을 떨치는 이들의 마차가 오가고 있었다.
아가사가 후원하는 애브룸 악단은 제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악단으로 이후 음악계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있는 척도였기 때문이었다.
서서히 공연 시간이 다가오는 가운데.
아르망드 홀 앞으로 아라투스 가문의 마차가 다가오자 애브룸 악단의 단장, 루이 모랄레스가 얼른 달려 나왔다.
“아라투스 후작님. 아라투스 후작 부인. 이렇게 왕림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애브룸 악단의 단장, 루이 모랄레스입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에녹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던 아가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에요, 모랄레스 단장. 그동안 바빠서 서신으로밖에 연락을 못 했네요. 잘 지냈나요?”
“예. 부인께서 잘 살펴 주신 덕분에 저도, 악단도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단장이 앞서서 아라투스 후작 부부를 아르망드 홀로 이끌었다.
공연 시각이 가까워진 상황에 입장했기에 공연장 밖의 복도와 계단에 선 인파는 많지 않았다.
가볍게 안면이 있는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며 2층으로 올라간 아가사는 홀과 악단이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석으로 안내되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줄을 당겨 주십시오. 직원이 상시 대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고마워요, 단장.”
탁, 문이 닫히자 웅성거리던 소음이 깔끔하게 차단되었다.
녹빛 공단이 깔린 바닥에 크고 푹신한 소파와 넓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아가사는 소파에 앉아 난간 너머로 아직은 빈 악단의 자리를 응시했다. 옆에 앉아 같이 아래를 응시하고 있던 에녹이 입을 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던데.”
“…….”
누가 할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가사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며칠 사이 별일은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그리고, 에녹.”
“네.”
“지금은 우리를 주시하는 시선이 없으니 말을 걸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연주가 끝나면 저택으로 돌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