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32)

34화.

“마님.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어, 지금 나가.”

계단을 내려가자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녹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와 한 쌍으로 맞춘 의상은 에녹에게도 참 잘 어울렸다. 아가사는 그것이 만족스러워서 계단을 가뿐히 내려와 그의 옆에 섰다.

“옷이 참 잘 어울려요.”

“그대도 오늘 참 아름답습니다.”

주고받는 칭찬은 형식적인 것 같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아가사는 에녹의 진심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그녀의 드레스와 같은 옷감으로 만든 흰 크라바트와 드레스와 같은 문양이 은은히 깔린 정장이 마음에 쏙 들었다.

“늦기 전에 출발해요.”

현관을 나오니 호위를 맡은 제1부단장, 레온 타크란이 10여 명의 기사들과 함께 마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잘 부탁해요, 레온 경.”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에녹과 함께 마차를 타자 기사들이 마차 앞뒤를 철저히 둘러쌌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레온 경의 보고가 있은 직후 마차가 출발했다. 저택 내 정원을 지나 문을 빠져나온 마차는 곧 대로로 나왔다.

자주 보던 길이지만 황실 무도회가 열리는 수도의 밤은 특별했다.

황성이 가까워질수록 황가의 상징과도 같은 노란 잎사귀 등이 지상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고 귀족들의 마차가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수많은 마차 사이에 끼어 10여 분을 달리니 오늘 무도회가 열릴 궁이 보였다.

황궁에서 두 번째로 큰 파티 홀, 아사그라트.

저녁노을 아래 찬란히 빛나는 흰 상앗빛 궁은 이 시기에 가장 아름답게 핀 꽃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확실히 황제가 이 행사에 금을 넉넉히 배정했다는 느낌이 왔다.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요, 경.”

우아하게 마차에서 내린 아가사는 에녹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계단을 올라 궁의 입구에 섰다.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천장을 장식한 등불이 홀을 눈부시게 물들이고 있었다.

드넓은 홀은 이미 먼저 입장한 귀족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초대장을 확인한 시종이 소리 높여 외쳤다.

“아라투스 후작님과 아라투스 후작 부인이십니다!”

소음이 뚝, 멎었다가 한층 더 커졌다. 아가사는 사뿐히 붉은 융단을 밟아 내려가며 주위를 훑었다.

대대적인 황실 무도회라 낯선 면면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는 먼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도 있을 테고 갓 데뷔한 어린 귀족들도 있을 터였다.

올해는 참석 인원이 더 많아진 것 같네.

아가사가 걷는 동안 수많은 귀족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녀의 손짓 하나, 눈길 하나, 의상에 이르기까지 주목받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어서 오세요, 아라투스 후작님, 아가사 부인.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큰일을 하셨다고 들었답니다. 벌써 수도에 소문이 자자해요.”

입구를 벗어나기도 전에 한 무리의 귀부인과 영애들이 아가사를 마중 나왔다. 이리스 도뮤니아 후작 부인을 위시한 아가사의 최측근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휴양은 즐겁게 즐기고 오셨나요?”

“물론이죠.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아가사 부인에 관한 여러 소문이 들려서 즐거워하고 있었답니다.”

“신혼여행은 어떠셨나요?”

“새 드레스를 후작님과 함께 맞추러 가셨다면서요?”

“요즘 그 일로 사교계가 들썩이고 있답니다.”

아가사가 에녹과 함께 요즘 유행하기 시작한 남녀 동반 부티크 방문에 대해서 웃으며 듣고 있을 때였다.

빠바밤-

경쾌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황족의 등장이었다.

“록스바드 제국의 작은 태양, 안토니 록시바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아가사를 비롯해 모든 귀족이 즉각 예를 갖췄다.

안토니는 그 화려한 황실 특유의 백금발을 부드럽게 늘어뜨린 채 벌써 단추 두어 개가 풀린 차림이었다.

“아아.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지.”

손짓으로 예를 물린 안토니는 막 애인에게 가려다 말고 아가사와 에녹을 향해 걸어왔다.

아가사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좋은 소식인가, 안 좋은 소식인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다시 예를 갖추는 이들을 만류하며 안토니가 씩, 웃었다.

“요즘 수도에 부부 동반 부티크 방문이 유행한다지? 아라투스 후작 부부의 화목이 수도를 진동시키는군. 신혼이 좋긴 좋은가 봐.”

아무래도 전자였나 보다. 쓸데없이 놀리러 온 소꿉친구이자 육촌을 보는 아가사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이리스 도뮤니아 후작 부인을 필두로 한 귀부인과 영애들이 눈치 좋게 멀어졌다.

“전하께선 옆자리는 어쩌고 제게 와 이러시는 걸까요?”

“나는 예외 아닌가. 이래 봬도 록스바드 최고의 난봉꾼인데.”

“그러니까요. 난봉꾼께서 그 많은 연인은 어디 두고 쓸데없이 육촌에게 와서 이러신답니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수위를 넘지 않은 것은 순전히 함께 있는 에녹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었다.

장난스럽게 씩 웃은 안토니가 에녹에게 거짓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 육촌이 이렇게 날 괄시한다네, 후작.”

“우애가 깊어 보이십니다.”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가는 동안 세 사람은 홀의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어느새 황태자의 호위 기사와 보좌관이 자연스럽게 주변을 점하고 있었다.

이목이 적어지자 아가사가 작게 투덜거렸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세요?”

“황실 무도회는 오랜만 아닌가? 노빌리스의 유일한 상속자이자 전쟁 영웅을 남편으로 둔 혈족과 친분 과시 정도는 해 줘야지.”

“폐하의 유일한 적자시면서 말은 잘하시네요.”

안토니가 아무렇지 않게 홀을 쭉 훑으며 덧붙였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기도 했고.”

“…….”

황태자의 의미심장한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에녹이 입을 열었다.

“테오도르 네우타 공작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 알고 있었나?”

안토니가 기특하다는 눈으로 에녹을 돌아보자 아가사가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며 대답했다.

“저는 제 친족들을 말씀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둘 다 알고 있었군. 난 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늘 화제의 중심에 선 그녀였지만 오늘따라 특별하게 따라붙는 시선들이 있었다.

한층 더 집요해진 노빌리스의 친족들과 자꾸만 그녀를 의식하는 여섯 번째 전남편, 테오도르 네우타 공작이었다.

다만 에녹이 테오도르의 시선을 알고 있을 줄은 아가사도 몰랐다.

페르난드에 이어 테오도르라니.

‘그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혼 후 특별히 접점이 없던 전남편들이 자꾸만 나타났다. 에녹이 아가사의 이전 결혼에 대해 알고 있어도 기분 좋을 리 없는 상황이었다.

친족들이야 그렇다 쳐도 테오도르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물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도 아가사는 개의치 않았다.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하면 될 것이다.

테오도르가 그녀를 만나려고 한다면 그 자리에 에녹이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

유쾌한 결론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에녹. 네우타 공작을 지금 이 자리로 부르면 어떨 것 같으세요?”

아가사의 제안을 들은 에녹은 그녀와 눈을 맞춘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피할 수 없다면. 지금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중재를 볼 수 있는 황태자도 같이 자리한 상황이었다.

이윽고 에녹이 동의하자 아가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부터 시선을 주던 테오도르 네우타, 여섯 번째 전남편이 거기 있었다.

아가사와 눈이 마주친 공작은 잠시 멈칫하더니 거침없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게, 공작. 이제 건강은 괜찮은가?”

“예. 폐하와 전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석 달 전,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초췌한 안색과 달리 지금 그는 어느 정도 상태가 회복된 얼굴이었다.

오자마자 황태자에게 예를 갖춘 공작이 잠시 아가사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먼저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아라투스 후작 부인.”

테오도르는 아가사의 곁에 선 에녹에게도 짧게 인사를 건넸다.

적당히 예의를 차린 인사가 오간 뒤, 아가사는 망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가 오해한 게 아니라면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맞나요?”

“후작 부인에게 우리 가문과 관련해서 알려 드릴 게 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황태자, 안토니 록시바가 막 꼈던 팔짱을 풀었다.

다소 냉소적인 태도로 서 있는 에녹도 테오도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함께 들어도 괜찮은 내용입니까.”

“예, 괜찮습니다.”

테오도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안토니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도 폐가 되지 않는다면 동석을 부탁드립니다. 전하께서 함께 계셔 주시는 편이 후작 부인에게도 좋을 겁니다.”

“이런. 공작은 그렇게 이혼하고 나서도 전 부인을 꽤 아끼고 있나 보군.”

짓궂은 놀림에 아가사가 안토니를 제지했다.

“전하.”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뿐이네.”

안토니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다물자 테오도르가 쓰게 웃었다.

“그렇게 이혼했기 때문입니다. 제 가문의 일로 이제는 외부인이 되어 버린 부인에게 더한 해를 끼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말이 길어졌군요, 후작 부인. 먼저, 내가 이렇게 찾아온 건 일종의 사죄라고 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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